MEMORIZE RAW novel - Chapter 757
00756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의 열쇠. =========================================================================
붉은 황무지로 진입한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행군했다. 거기다 제갈 해솔의 수송 능력에 힘입어, 마침내 늦은 오후에는 도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쪽 정문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바로 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랜원들을 먼저 캐슬로 보낸 후, 나는 한소영을 배웅하기로 했다.(중간에 선율이 ‘아, 수지가 안 맞네~. 고생만 실컷 하고 얻은 게 없는 원정이었어.’ 라고 투덜댔지만,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곧 조용해졌다.)
잠시 후, 도시를 잇는 통로를 앞두고 나와 한소영은 굳게 손을 맞잡았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고생은요. 나름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때 홀로 연기를 걷어내 주신 것, 그리고 치명상을 입히신 것 모두 잊지 못할 겁니다.”
“금칠이 어색한 건 오랜만이네요. 저야 적절한 행동을 취했을 뿐, 상황을 만든 건 머셔너리 로드에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한소영은 겸손히 응수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차후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답이요…. 아니요. 괜찮아요.”
“예?”
“보답은 이미 받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품속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냈다. 기록용 구슬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눈이 즐거울 것 같다는 뜻이에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그러나 한소영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느릿하게 가로저었다. 그때 찰나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 것 같다. 아니, 잘못 본 건가?
“배웅해주신 거 감사해요.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이윽고 기록용 구슬이 말간 빛을 뿜는 동시, 한소영은 빠르게 나를 스쳤다.
(머셔너리 로드.)
(냠냠…. 응? 아니, 예?)
지나치는 찰나,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똑똑히 귓전으로 들어왔다.
(누나라고 한 번 해보시겠어요?)
(예? 누나라고요?)
(네. 어서.)
(아니. 갑자기 왜 이러….)
(누, 나.)
(누, 누, 누…. 누나.)
돌연 엄청난 부끄러움이 가슴으로 솟구친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어서 저 구슬을 부숴야 한다는 생각이 치솟았으나, 한소영은 이미 통로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이어서 주변으로 웅성웅성 소음이 들려온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얼굴 화끈거려.
*
머셔너리 캐슬로 돌아간 후, 나는 바로 1층 회의장으로 향했다. 클랜원들은 예상대로 좌우로 가지런히 도열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간간이 생환을 축하한다는 인사만이 나올 뿐, 예전처럼 커다란 소란은 없었다. 아마 앞서 도착한 클랜원들이 어느 정도 상황을 설명했으리라.
이윽고 야릇한(?) 윙크를 보내는 고연주와 눈인사를 건넨 후, 나는 권좌로 걸어가 앉았다. 그러자 클랜원들도 동시에 몸을 앉힌다.
“근 한 달. 아니 한 달은 좀 더 됐겠네요. 아무튼, 모두 오랜만입니다.”
나는 가벼운 인사로 서두를 시작하고서, 차분히 임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씩 상세하게 이야기할 것도 없고, 어차피 어느 정도 들었을 테니까.
그리하여 안타깝지만 소년의 동료들은 사망했다는 사실과(정확히는 식물 군단의 양분으로 쓰인 모양이지만,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식물 군단과 악마 14 군주를 쓰러트린 일, 그리고 근원의 조각을 얻게 된 경위까지 간략하게 설명을 마쳤다.
“이번 원정으로 얻어낸 성과는 창고에 보관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축하할 일이 있는데요.”
고연주에게 마녀 세트를 넘겨주고 나서, 나는 왼편으로 눈을 돌렸다. D 등급 라인에 앉아 있는 이유정이 나를 보더니 황급히 눈을 피한다. 나오라고 손짓하자 모두의 고개가 쏠렸다. 이유정은 스리슬쩍 시선을 깔았다가, 곧 주저하는 걸음으로 중앙으로 나왔다.
“사용자 이유정은….”
살그머니 운을 떼자 장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번 원정으로 시크릿 클래스를 계승했습니다.”
“예?”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안현이었다.
“형. 정말이에요?”
“안현!”
고연주가 엄히 지적하자 안현은 아차 한 얼굴로 머리를 수그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중앙을 응시했다. 거의 모두가 경악한 눈을 하고 있다. 반응을 보니 아직 스스로 말을 꺼내지 않은 모양이다. 같이 원정을 다녀온 이들도 서로 입을 맞춘 듯했고. 이윽고 이유정은 수줍어하는 소녀처럼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평소와는 다르게 딱딱히 끊어 말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음성. 그렇게 간신히 인정한 순간,
“오오오오오오오오!”
안현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다. 낯을 와짝 찌푸린 고연주가 얼른 일어서려고 했으나 나는 빠르게 손짓했다. 가만히 놔두라는 의미였다. 왜냐면 반응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약간 의외였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얼른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줄 알았는데, 이유정은 심히 창피해 하고 있었다. 아니. 부끄러워하는 동시, 달려오는 안현을 보는 게 무언가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최대한 비밀로 하고 싶어 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이러면 괜히 미안해지는데.
“야, 진짜야? 진짜 시크릿 클래스야?”
“응? 어, 어….”
그러나 안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어서 도처에서 가벼운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이유정이 낯에 멍한 빛이 떠오른다. 마치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다.
“클래스 이름은 뭔데?”
“용병 여왕이라고….”
“와, 개 쩌네. 꽤 있어 보이는 이름이잖아?”
“…….”
연이어 칭찬하자 이유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응시했다. 살짝 원망 섞인 눈길에 나는 느릿하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장내가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리고 하나 더.”
안현은 곧장 수다를 멈추고 B 등급 라인으로 돌아갔다.
“들으셨는지는 모르나…. 사실 이번 원정은 용이 잠든 산맥 이상으로 어려웠고, 정말로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
“멸망하는 세상을 우리는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요. 아마 그때 계속 가만히 있었다면,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수 없었을 겁니다. 최악에는 모두가 사망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
나는 도로 중앙을 응시했다. 이유정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사용자 이유정.”
이름을 부르니 흠칫 몸을 떤다.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상황에서, 홀로 돌격해 세상의 붕괴를 멈췄으므로, 그 공을 인정해 D에서 C로 등급을 재조정합니다.”
그러자 이유정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기뻐하기보다는 황망해 하는 게 흡사 ‘이게 아닌데.’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바로 입을 열었으나,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지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깨문다.
나는 빙긋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
나는 어지간하면 홀 플레인의 어느 한구석이라도 ‘집’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냐면 여기는 언젠가는 떠날 세상이지 돌아갈 집이 아니니까.
허나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캐슬로 돌아오니 확실히 편하기는 편하다.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금화를 쏟아 부은 만큼, 캐슬의 시설은 간이로 세운 야영 캠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아늑함을 자랑한다.
여하튼 회의를 끝낸 이후,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뜨끈뜨끈한 물로 목욕을 즐기고 나오자 어느새 밤은 깊어져 있었다. 그러자 이대로 자기는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계단을 올라가기 전 식당에 들러 좋은 술 한 병을 집었다. 그리고 니냐니뇨 콧노래를 부르며 집무실로 들어간 찰나, 걸음을 멈칫하고 말았다.
“너희…?”
방안에는 3명의 선객이 있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현과, 한숨만 흘리는 허준영과, 담담히 앉아 있는 이유정. 3명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니 동시에 고개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본능적으로 모종의 사건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좋다. 나는 침착히 소파로 걸었다. 그리고 우선 여유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그래. 그토록 원하던 힘을 얻은 기분은 어때?’ 라고 말하려는 찰나,
“오빠. 나 등급 조정 안 해줘도 돼.”
귓전으로 들어온 이유정의 음성은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말은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뭐라고?”
“그리고 최하위로 떨어트려 주라. F 등급으로.”
이어지는 말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기껏 C 등급으로 복원시켜놨더니, F 등급으로 떨어트려 달라고? 제정신인 건가?
“아 형. 얘 좀 어떻게 해봐요. 미쳤나 봐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안현과 허준영의 음성이 겹쳤다. 우선은 소파에 앉고 나서, 나는 바로 옆의 이유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도 삐쳤어?”
“에이, 삐치기는.”
“그럼 반항이냐?”
“그런 거 아니야.”
이유정은 쓰게 웃었다. 반응을 보니 장난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다.
“왜.”
“그냥….”
이유정은 살짝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소파 아래 둔 두 종아리가 흔들흔들 움직인다.
“궁금해졌거든.”
“궁금해졌다고?”
“응. 돌아오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어.”
“생각이라….”
이유정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은 곧 황금빛으로 물들며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이번에 새로 얻은 힘인 모양이다.
“이 힘…. 정말로 강력한 힘이야. 나한테는 과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그런데.”
“사실, 나 그때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선택을 약간만 바꿨으면, 아마 수인의 힘을 완벽하게 끌어냈을지도 몰라.”
“…….”
“근데, 그러지 않았어. 그래. 나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더 강력한 힘을 얻을 방법이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소린가?”
“응.”
“왜?”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버리고 경청하기로 했다.
“왜냐면 그렇게 얻은 힘은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 같았거든.”
이윽고 이유정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이 힘을 온전한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만 내 것으로 만들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그리고 조용히 말을 잇는다.
“오빠가 보기에도 그렇잖아. 시크릿 클래스를 얻었다고 해도 아직도 약해. 전혀 강하지 않아. 나는 여태껏 실력에 맞지 않는 위치에 있었고, 이번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됐어.”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그게 등급 조정이랑 무슨 상관이고, 또 뭐가 궁금해졌다는 소린데. 그냥 앞으로 열심히 하면 되는 거잖아.”
“아니. 나는 이제 더 이상 위만 바라보지 않을 거야.”
“유정아.”
“오빠.”
“…….”
이유정은 번뜩 고개를 돌리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많이 늦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나, 밑바닥부터 시작해볼래.”
“뭐라고?”
“홧김에 결정한 거 아니야. 돌아오면서 계속 생각했어. 정말로 내가 노력하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는 건 그런 의미였어.”
“너….”
그래서 F 등급으로 떨어트려 달라는 거였나. 이해는 갔지만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거니와, 핏빛 눈동자에 깃든 절박한 기색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최소한 이유정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안현과 허준영이 멍하니 이유정을 쳐다보고 있다. 어색하지? 나도 낯설어.
여하튼 이렇게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다. 아니 하겠다는 애를 막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 이유정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고.
“그냥 허락해주지 그래. 김수현. 본인이 저렇게나 원하는데.”
그때 허준영의 음성이 들렸다.
“아, 나도 처음에는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생각이 달라져서. 입만 살았음을 참작하고서라도, 의기는 장하잖아.”
허준영은 태연히 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병은 절반이나 비워진 상태였다. 이 녀석, 누구 멋대로 마시는 거지? 기껏 좋은 술을 받아왔더니만.
허준영은 술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연거푸 잔을 채웠다.
“적어도 무사 수행을 떠나겠다고 몰래 클랜을 떠나려 했던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본다.”
“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
“그럼 이유정이 나가려는 걸 형이 막은 거예요?”
안현의 물음에 허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잔을 쭉 들이킬 뿐.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살그머니 시선을 회피하는 이유정이 보인다. 쯧쯧.
나는 길게 숨을 흘린 후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진심이야?”
“응.”
“나중에 울고불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당연하지! 내가 나중에 딴소리하면, 그때는 오빠가 나를 죽여도 좋아.”
한순간 ‘침대에서?’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마음대로 해라.” 라고 말했다.
결국 허락해주자, 이유정이 그제야 활짝 미소 짓는다. 그렇게나 기쁜 걸까.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온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안현은 흐뭇하게 나와 이유정을 보다가 슬쩍 허준영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기억나네요.”
“……?”
“저 쫓겨날 때요. 그때 형이 저 챙겨주셨잖아요. 배 곯지 말라고 용돈 쓰라면서.”
“노잣돈으로 준건데. 오해하지 마라.”
“에이, 노잣돈이라뇨. 형 마음이 그렇지 않은 건 이미 알고 있다고요.”
“흥. 착각은 자유니까.”
허준영은 잔을 채우며 코웃음을 쳤다. 안현은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더니, 똑같이 배시시 웃으며 허준영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허준영은 막 잔을 꺾으려다가 느릿하게 탁자로 내려놓았다.
잠시 후.
스릉!
“이 개 같은 자식! 죽여버리겠다!”
“혀, 형? 가, 갑자기 왜!”
“한창 기분 좋게 마시는데, 감히 술 맛을 떨어트려? 거기 안 서?”
“수현이 형은 가만히 있는…. 잠깐, 잠깐만요! 그거 진짜 검이잖아요! 으아아악!”
도망치는 안현과 검을 휙휙 휘두르는 허준영. 둘은 삽시간에 방을 벗어나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계단을 쿵쿵 내려가는 소리가 울린다. 야밤에 뭐 하는 짓일까.
“킥, 바보 같아.”
이유정은 킬킬 웃고는 사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서너 걸음 걸어가 책상을 짚고 테라스를 바라본다.
은은히 흐르는 어둠과 휘황찬란한 월광. 밤의 마력 때문일까? 교교한 달빛이 비치는 이유정의 모습이 돌연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올해 25살이었던가? 가슴도 제법 봉긋하고, 엉덩이도 탱탱하니 탄력적인 게….
“근데 오빠. 나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그때 이유정이 갑자기 몸을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한창 입맛을 다시던 와중이라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절반 정도 남은 병을 잡아 잔에 따랐다. 짧은 시간에 많이도 마셨네.
“뭐가 궁금한데?”
“김한별이랑 어디까지 갔어?”
오호라. 이건 상당히 의외의 질문이다. 하지만 내가 당황하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일 텐데. 나는 술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궁금해?”
“아니. 그냥 안 들을래. 어차피 나는 나고, 걔랑 나는 다르니까.”
그러나 예상외로 이유정은 빠르게 포기했다. 절로 싱거운 웃음이 나온다.
“호. 정말로?”
“응. 상관없어. 아무튼, 우선 목표는 최대한 빠르게 B 등급에 다다르는 거야.”
“B 등급이라. 우선 김한별을 따라잡겠다는 뜻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흐흐. 쉽지는 않을 텐데. 너도 알겠지만, 김한별은 상당한 노력가야.”
“인정해. 근데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한 이유정은 도로 몸을 돌려 테라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달빛에 물든 이유정의 자태를 안주 삼아, 느릿하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오빠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한 찰나,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이유정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무언가 분한 어조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왜, EX 등급으로 올라서 클랜 로드라고 꿰차려고 그러나?
여하튼 맹랑하기는 하다만, 이 정도 패기는 나쁘지 않다.
“내가 B 등급에 오르면….”
이윽고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던 이유정이 흘끗 나를 흘겼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가 싶더니 돌연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며 씩 웃는다. 까닭 없이 요사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 오르면?”
어쩔 거냐고 생각하며 나는 담담히 잔을 기울였다.
그 순간,
“나도, 오빠한테 따먹히러 올 테니까.”
“푸.”
나도 모르게 머금은 액체를 세차게 뿜고 말았다.
뭐, 뭐라고? 뭘 먹히러 와?
“너 방금 무슨…!”
곧바로 쳐다봤으나 책상 앞에는 더 이상 이유정이 없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니, 까르르 웃는 소리와 후다닥 복도를 달리는 소음이 들렸다. 소리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허, 참.”
절로 탄식이 나왔다.
“아니, 같은 말을 해도….”
따먹히러 온다니.
그건 너무 야하잖아.
============================ 작품 후기 ============================
밟아도 뿌리 뻗는 여성 설처럼, 시들어도 다시 피는 유미 설처럼.
끈질기게 지켜온 내 성정체성, 옛날옛적 독자들은 자꾸만 놀리지.
유진도 근육 키워 하나로 뭉쳐, 힘세고 튼튼한 사내 만드세.
유진 유진 로유진 유진 유진 로유진, 로유진 가슴에 붕댈 감으세.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을 놓았네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여러분께서는 그냥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여인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로유진 : 저 여자 아닌데요.
Reader : 말투가 아님. 거짓말 ㄴㄴ.
로유진 : 정말이외다.
Reader : 엌ㅋㅋ. 딱 남장 여자 말투.
로유진 : 저 예비역이에요. 군대도 다녀왔습니다.
Reader : ㅇㅋ. 여군.
로유진 : 그럼 인터뷰 할게요.
Reader : 대리 ㄴㄴ. 압박 붕대 ㄴㄴ.
로유진 : 하체 인증?
Reader : 어디 말만한 처녀가. 땍.
0ㅁ0….
어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