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5
00824 “…인정 못 해.” =========================================================================
지하 2층.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아니.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터벅터벅 내딛는 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 보이고, 어깨는 축축 늘어졌다. 낯에는 지친 기색만이 가득하다. 꾸역꾸역 행군하는 원정대의 낯빛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잠깐 움트던 희망의 씨앗은, 다시 고개를 꺼트렸다.
괴물의 출현이 본격화된 이후 원정대의 행군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나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하다. 100미터도 채 못 가서 괴물이 출현해 전투를 해야만 했다. 간신히 전투를 넘겨도 그다음에는 도처에 도사린 함정을 신경 써 건너야 한다. 그냥 매 순간순간이 전투의 연속이었고, 방심하는 순간에는 함정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뿐일까. 조금이라고 쉴라치면 귀신같이 알아챈 괴물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모두가 암암리에 느끼고 있었다.
괴물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조심스러운 감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180도 달라졌다.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끊임없이 수색과 돌격을 반복할 뿐이다. 수는 또 어찌나 많은지. 여태껏 원정대가 썰어버린 놈들만 해도 사백 마리는 넘을 터. 이러니 지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연락은 좀 어때요?”
“아직…. 응?”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전투 직후. 휴식 겸 가만히 수정을 만지작거리던 고연주가 화들짝 고개를 치켰다. 한껏 치뜬 눈이 곧 실처럼 가늘어졌다. 저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후유….”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던 정하연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마력을 많이 사용해서일까. 지팡이를 쥔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또 포위됐어요.”
꼴깍꼴깍 물약을 마시던 임한나는 가슴에 흘린 액체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으나 이를 악물며 활을 쥐었다.
“망할!”
땡그랑! 마찬가지로 물약을 마시던 진수현은 병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전선에서 날뛴 근접 계열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심각한 상처는 보이지 않으나 온몸에 검붉은 체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게다가 진수현의 의복은 검게 그을리거나 군데군데 찢어진 것이 유효타를 제법 허용한 듯싶다.
이미 방진을 유지한 채로 쉬고 있어 딱히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클랜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거머쥔 채 사방을 경계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동시에 사각거리는, 무언가 쓰는 듯한 소리가 공간을 소슬히 울렸다.
“…온다.”
이미 알고 있지만, 사용자들은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임한나의 등 뒤로 서너 개의 구체가 떠오르고, 서너 명이 빠르게 주문을 외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트인 통로는 물론, 땅속에서도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못해도 4미터 이상이 길이를 가진 그것들은, 마치 뱀처럼 땅을 유영하며 빠른 속도로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 ────. 아이스 랜스(Ice Lance)! 연발(Repeatedly)!”
십수 개의 얼음 창이 도처로 뻗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길쭉한 검은 파도가 원정대를 덮쳤다.
잠시 후, 미친 듯한 고함과 폭음이 어두운 지하 통로를 떠르르 울렸다.
*
‘환상의 도플갱어’가 사라지니 연기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차차 사그라지는 연무(煙霧) 사이로 가려져 있던 광경이 어슴푸레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사멸 무저갱’의 최 심층부는 확실히 여느 방과는 다른 공간이었다. 약 10미터 높이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아치(Arch)형 천장에는 아직도 빛을 뿜는 구슬이 절반이 넘는다. 각진 벽돌로 쌓인 회색빛 벽은 낡기는 했으나 한 군데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다.
내부는 우리가 들어온 거실을 제외하고 총 여섯 개의 문이 더 있는데, 은신처임을 고려하면 다용도의 방을 만들어놓은 듯싶다. 지면에 더러 구멍이 있거나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기는 했지만, 방은 유수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기야 왕족이 숨는 공간이니 허술히 설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열어보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다. 이 중에는 분명 창고도 있을 테니까.
“흠. 여기는 식량 창고였나? 텅 비었네.”
“흐윽! 흐으으윽!”
“오~. 여기는 침실인가보다. 얘들아 이거 좀 봐봐. 침대도 있고, 욕실도 있는 것 같은데?”
“어엉…. 어어어엉….”
나는 하나씩 문을 열 때마다 일부러 과장해 감탄을 터뜨렸다. 여기 좀 보라는 의미로 살짝 문을 흔들었으나 곧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흑, 흐윽!”
“으아아앙!”
인어 자세로 주저앉아 비련의 여인처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김한별. 이제는 숫제 엎드려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어 젖히는 이유정. 울음보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깨어난 이후로 계속 빽빽 울기만 하는데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에는 탐사를 중단하고 다시 앉고 말았다.
“그만 좀 울어라. 응? 병아리도 아니고 4년 차씩이나 된 사용자가….”
하나 신기한 사실은 내가 이렇게 앉기만 하면 두 명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방금도 그렇다. 실컷 울어 젖히다가도 내가 있는 쪽으로 앙금앙금 기어오지 않는가. 이뿐인가. 중간에 길이 부딪치니 서로 어깨로 밀치거나 붙잡아 젖히는 등, 진정 이해 못 할 행동이다.
이윽고 두 여인은 내 품에 고개를 묻고 또 울기 시작했다. 혹시 나를 어미로 아는 건 아닐까. 아주 귀여운 새끼 고양이 납셨다.
– 그냥 이해해. 얘들은 너랑 다르잖아. 아마 엄청나게 시달렸을걸? 오죽하면 저러겠어?
그건 알고 있다. 한데 무슨 환상을 봤느냐고 물어도 도통 말을 하지 않는다. 외려 말을 꺼낼 때마다 우는 소리만 더 커지니 역효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또다시 조용히 토닥거려주고 말았다. 그때였다.
웅웅웅웅!
불현듯 품 안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손을 넣어 꺼내자 통신용 수정이 번쩍번쩍한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조금만 마력을 넣으면 누가 연락했는지 알 수 있다. 아니. 누가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
아주 짧은 시간, 오만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으나 수정은 빛을 꺼트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한동안 수정을 쳐다보다가 도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김한별과 이유정은 울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엉?”
“…으앙?”
그래. 이제 울음을 언어로 삼기로 한 거냐.
연락을 받지 않고 집어넣자 둘은 서서히 눈물을 그쳤다. 이윽고 젖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이제야 겨우 상황을 직시한 모양이다. 한참을 돌아보던 김한별이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여기는….”
“끝.”
“…끝, 요?”
“자다가 끌려들어 간 것까지는 기억해?”
둘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 방은 아마 유적의 최 심층부가 아닐까 싶은데.”
이유정은 아까부터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한별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돌연 “아.” 탄성을 터뜨렸다. 경계 때 나와 근원에게 들은 말도 있으니 빠르게 알아들은 듯싶다.
“설마…!”
“걱정하지 마. 괴물의 식량 저장고는 아니니까.”
“보스는요?”
“이미 해치웠어. 그래서 너희가 깨어난 거고.”
김한별은 살며시 눈을 감고서 기나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곧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 아직 의문이 남은 듯하다. 아마 왜 연락을 받지 않았는지 궁금하겠지.
“그럼….”
예측은 했다만 말문이 막혔다. 이 둘이 같이 딸려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냥 혼자 끌려와 단독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한데 상황이 꽤 오묘해졌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오빠. 연락하는 게 좋지 않아? 언니들이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을 건데….”
이유정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 김한별도 동의했다.
“맞아요. 아니면 제가 할까요? 우리 살아 있다고. 괜찮으니까….”
“글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네?”
“연락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어차피 우리는 길도 모르잖아. 차라리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는 게 낫지.”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둘은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야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설명이다.
“오빠. 혹시 누가 걱정해주는 거 즐기는 성향이야?”
“내가 변태냐.”
“그럼 왜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그래야, 더 필사적으로 찾을 테니까.”
결국에는 조금이나마 진심을 말하고 말았다.
일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일부러 둘을 보지 않았다. 연초를 꺼내 물며 턱을 젖히고 시선을 올렸다. 천장이 빛에 섞여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지그시 눈을 감자 여러 음성이 뇌리를 스쳤다.
‘에이 뭐야. 괜히 걱정했네. 그럼 이번에도 형님만 믿고 가면 되겠네요? 헤헤.’
왜 내게 기대려 하는 거지? 자신을 믿어도 될 텐데. 실력도 있잖아? 1회 차 때 단신으로 마법사 부대를 전멸시켰던, 내가 가장 닮고 싶었던 ‘마법사 사냥꾼’이잖아?
‘내가…? 아, 응. 그래야지.’
왜? 나는 엄연히 근접 계열이고 너는 궁수인데. 원래 탐험은 궁수가 선두에서 선도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한데 왜 그렇게 어색하게 쳐다보는 건데.
‘그런가? 하긴 오빠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올 수 있었을 거야. 특히 너는 무려 검후(劍后)인데.
‘맞아, 맞아.’
왜, 왜, 왜, 왜.
왜 당연하게 여기는 건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인정 못 해.”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젠장, 인정 못 하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눈은 감고 있는데 눈동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간다. 아차 싶었으나 이왕 내친 김이었다.
“여덟 명이잖아.”
“…….”
“그림자 여왕, 검후, 주문 저격수, 황혼의 무녀, 군단 소환사는 둘에, 초 정보 집합체, 거기다 제갈 해솔까지. 시크릿만 다섯, 레어 같지도 않은 레어 하나, 희귀한 마법사 둘. 이 인원으로 사멸 무저갱을 돌파 못 한다? 너희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한 번 말이 트이니 둑 터진 물처럼 쏟아졌다. 이 유적을 돌파하는 게 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한때는 용이 잠든 산맥과 비슷한 악명이 쌓일 뻔한 곳이니까. 하지만 어쨌든 결국 공략됐다. 사용자에 의해서.
김한별과 이유정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냥 살아 있다는 말 한 마디면 되는데. 아마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 그러나 갑갑하기는 나도 매 한 가지였다.
문득 이런 상황이 조금은 우습다고 느껴졌다. 2회 차를 선택한 이후, 하나씩 준비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무어라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끝이 다가올수록 확연히 체감했다. 정확히는 내가 지옥으로 끌려들어 갔을 때부터, 아니. 이렇게 생각했을 때부터 느꼈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건너뛰지 않았어야 했나….’
기실, 늦게 깨달은 감도 없잖아 있었다.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하고, 스스로 해줄 수 있는 선에 선을 그었다.
한편으로는, 알면서도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후회한 순간부터 인정해버린 것과 진배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바라고 있었다.
클랜원들이 내 인정이, 내 생각이 틀렸다고 증명해주기를.
내가 없는 상황에서, 클랜원들은 과연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여기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 머셔너리 라는 클랜이 ‘계획’을 이루기에 적합한 집단인지….
아니면, 실패한 집단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