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5
00844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
그 순간이었다.
‘…미안하다.’
문득, 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내 능력이 부족했다.’
‘모든 게 생각대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 것 같다. 그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는…. 총사령관의 자격이 없어.’
강철 산맥 공략 중이었던가. 쿠샨 토르와의 일전이 끝난 후, 형은 내 앞에서 스스로 책망했다. 나무에 기대앉은 채 힘없이 자책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 왜 갑자기 그때의 기억과 겹쳐 보이는 걸까.
갑작스레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침묵 속에서, 나는 침착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우선 내가 밖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형이 많은 생각을 했다는 건 알겠다. 그러니 나도 감정적으로 이끌리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는 게 낫겠다.
북 대륙의 수호자.
확실히 좋은 생각이다. 물론 수호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8할은 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 사용자의 경우에 불과하다. 현재 북 대륙에 터를 잡은 대형 클랜 중 상당수가 수호자의 덕을 봤고, 그 존재를 알고 있다.
즉 내가 지적한 부분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사용자는 기본적으로 이익을 좇는 존재지만, 이제껏 서로 남남으로 지내다, 갑자기 기록 몇 개 주며 친하게 지내자면 당연히 의심을 품는다. 그러나 여기서 내 신분을 은근슬쩍 밝히면 만사가 OK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봐도 수호자가 조건 없이 클랜을 도운 전례는 무수히 많으니까.
결국에는 모든 것이 형의 말대로였다. 과거의 수호자들이 여러 클랜을 전전하며 ‘명분’만 쥐었던 것에 반해, 나는 이미 머셔너리 클랜을, 그리고 이스탄텔 로우, 해밀과 동맹이라는 ‘무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형의 행동으로 ‘민심’까지 잡게 된다면? 역대 어느 수호자보다 강력한 권한을 쥐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터.
단,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마냥 장밋빛 미래만 생각하기에는 크게 두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우선은 나와 천사들의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다.(물론 일방적으로 적대하는 내 탓이 크지만 서도.)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수호자 역할까지 병행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피로에 절은 이효을을 보며 안쓰럽다 여겼는데, 머셔너리 클랜과 중앙 관리 기구를 겸임하는 건 현실적으로 애로사항이 많다.
한동안 이리저리 저울질한 결과, 결국 한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글쎄. 형도 알고 있겠지만, 수호자라는 역할 자체가 천사의 따까리 성향이 짙어서….”
“그래서 네가 하라는 거야. 천사도 너한테는 함부로 못 하는 것 같고, 수현이 너라면 따까리가 아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보다 말이지.”
“으음. 그래도 수호자는 좀….”
“흠…. 왜?”
“일단 나나 천사나 서로 싫어해서….”
“그건 이유가 안 돼.”
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기도 하고.”
“응?”
잠시 고민하는 낯빛을 보였으나 곧 침착히 말을 잇는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덧붙이마.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우리가 악마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는 이상, 나는 네가 천사와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천사의 따까리가 되라는 소리 아냐.”
“그게 아니지. 내 말을 조금도 이해 못 하는구나.”
“…….”
형은 갑갑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네가 천사를 적대하는 이유는 이해해. 그리고 싫어하지 말라는 말도 안 했고. 하지만 이런 말도 있잖아?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 상황이 이런 이상, 우리는 천사와 협조하면서 최대한 이용할 필요가 있거든. 물론 속으로는 절대로 믿지 말아야겠지만, 최소한 겉으로나마 ‘척’이라도 하라는 거야. 아마 내가 너였다면, 나는 그랬을 거다.”
긴 설명을 들은 순간,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젠장. 이래서 형이랑 말로 싸우기가 싫다. 오늘 단단히 작정하고 찾아온 것 같은데,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논리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워낙 구구절절 옳으니 할 말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렇기는 한데. 지금 나로서 수호자를 겸임하기가….”
“아,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
“이미 말해놨거든. 네가 수호자가 돼도 기본적인 업무는 이효을이 처리하기로 했고, 중앙 관리 기구 수장 직도 계속 유지할 거다. 물론 대사를 결정하는 일에는 네가 나서야겠지만,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야.”
벌써 거기까지 해놓은 건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쯤 되면 형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잖은가.
“…너한테는 정말 많이 미안하다고 생각해.”
내 표정을 봤는지 형이 쓰게 웃었다.
“안 그래도 복잡할 텐데,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것 같아서.”
“아니, 그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귀환 계획을 세웠다고는 하나 알고 있는 사람은 전무하고, 어디 기댈 대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한데 앞가림에 급급해 하는 동안, 형은 알아서 움직여주고 있었다. 실제로 막연하던 계획이 조금씩 구체화하는 기분을 느끼니 외려 고맙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러한 찰나, 돌연 미세한 진동 소리가 들리더니 형이 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냈다.
– 클랜 로드…. 지금….
“음, 음. 그래?”
– 네…. 벌써….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짧게 연락을 끝낸 형은 아쉽다는 얼굴로 푹 한숨을 쉬었다.
“수현아. 미안한데….”
“아니, 가봐. 괜찮으니까.”
전혀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 오늘 그런 발표를 했으니 바쁘지 않은 게 비정상이다. 형도 한 클랜의 로드이니만큼 꼭 필요한 자리가 있으리라. 어찌 보면 이것도 내 탓이지. 내가 형한테 부탁한 일이니까.
“그래, 고맙다. 그럼 한 번 생각해봐.”
형은 두툼한 봉투를 툭 건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아.”
그러나 문을 열기 직전, 우뚝 멈춰서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참석했으니까 대답은 들은 거로 해도 되려나?”
“대답?”
“양자택일.”
“아~. 아니, 아직.”
싱겁게 웃으며 머리를 가로젓자 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린 거냐?”
“글쎄. 굳이 지금 선택할 필요가 있나?”
“뭐?”
“그렇잖아. 아직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온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도 천지인데. 김칫국 들이켜는 것도 아니고.”
세라프는 말했다. 경험의 차이로 인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내 상황과 오묘하게 맞물리는 말이다. 그렇잖은가. 고통과 슬픔으로만 얼룩진 일 회차와는 달리, 지금 내가 있는 이 회차는 확실히 다르니까.
“아무튼, 모르겠어. 조금 더 겪어보면 내 생각도 달라질지 모르지. 그때까지 꾸준하게 고민할 생각이야. 왜, 이러면 안 돼?”
형은 살짝 턱을 들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안 될 건 없지.”
달칵, 문 열리는 소리와 잔잔한 목소리가 겹쳤다.
“아니, 차라리 그런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문을 나서기 전, 형은 나를 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
형이 떠난 이후, 나도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생각은 길었지만, 결정을 내린 이상 굼뜨게 행동할 생각은 없다. 괜히 어물쩍거리다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신전으로 가면서도 오만 생각이 스치기는 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는 하나, 십 년 넘게 이어져 온 선입견이 한순간 씻은 듯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건 요원한 일이다. 여전히 ‘수호자’라는 것 자체가 곱게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형의 뜻은 이해했다. 형은 내가 진정한 의미의 왕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구심점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초점을 ‘나’로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까지 멍석을 깔아주는데, 까짓거 못할 것도 없다.
그나저나 수호자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이효을한테 연락하기는 좀 그렇고. 어차피 공석이기도 하니 우선은 직접 만나 얘기를 꺼내보면 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소환의 방으로 입장한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했다. 왜냐면 중앙 제단에 앉아, 아니 엎드려 누워 있는 천사는 세라프가 아니었으니까.
정작 세라프는 제단 뒤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다른 세 명의 대 천사와 함께.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문득 아까 들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진짜 왔네?”
그때 생생한 음성이 공간을 웅혼하게 울렸다. 제단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천사는 바로 가브리엘이었다.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꼼꼼히 손톱을 다듬고 있다.
“이렇게 왔다는 건…. 수호자가 될 생각이 있다는 건가?”
이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아니면…. 세라프랑 또 얼레리 꼴레리 하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한 찰나, 흘끗 나를 올려다본 가브리엘이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가, 가브리엘 님.”
세라프가 당황해 하는 동안, 나는 정지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잿빛 바닥에 주저앉으며 차분히 앞을 응시했다. 미카엘은 의젓이 눈을 감고 있었고, 쭈그려 앉은 라파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으며, 우리엘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세라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가브리엘은 한 차례 까르르 웃고는 다시 손톱을 다듬는 데 열중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후자라면 자리를 피해 줄 용의는 있는데.”
관심 없는 듯한 말투. 그러나 두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다.
“우선…. 내 형과 만난 건가?”
“아, 전자인가.”
가브리엘은 피식 웃더니 천연스레 고개를 까닥였다. 두 다리도 연신 까닥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거슬린다.
“응, 맞아. 사실 그때 좀 놀라기는 했어. 뇌제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우리를 보자 했는지 궁금했거든.”
“…….”
“근데 지금이 더 놀랍다. 반신반의하기는 했는데, 설마 진짜로 올 줄은 몰랐거든?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뭐….”
간신히 말끝을 흐렸다. 차마 말이 나오지가 않는다. 이렇게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뭉클뭉클 치솟는다. 가증스러운 년들.
…하지만.
“조금….”
참아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억눌러야 한다. 무조건적인 감정 소모는 좋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형의 말을 기억하자.
“생각이 변했다고 할까.”
그 순간 어수선하게 움직이던 가브리엘의 종아리가 멈칫 정지했다. 미카엘이 눈을 뜨고 라파엘은 눈을 반짝였다.
그 순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 여기는 시험의 자리라고나 할까. 나는 아직 수호자가 된 게 아니니까. 아마 지금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나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으리라.
“흐~응.”
비로소 가브리엘이 반응을 보였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제단에 사뿐 걸터앉았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상대는 대 천사장. 어설픈 연기나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거의 완벽한 사실 속에 아주 조금의 거짓을 섞으면 되니까.
“뭘 듣고 싶은 거야? 나는 여전히 너희가 싫어.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뭐라고…!”
역시나. 말하자마자 우리엘이 발끈하는군. 이건 끊는 게 낫겠다.
“단, 너희를 조금 오해하고 있었다는 건 인정하마.”
“오해? 하, 오해라고?”
“그래. 오해.”
“우리엘, 닥쳐. 아니, 잠깐 조용히 하고 있어봐.”
우리엘이 성난 짐승처럼 노발대발하자 가브리엘이 날카롭게 끊었다.
“건방진 놈! 가브리엘 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엘?”
“저놈이 잠에서 깨어난 순간, 세라프는 장막을 쳤습니다!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호 마법을 걸었다고요! 심지어 지금도요! 무언가 꿍꿍이가…!”
“우~리~엘~?”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으르렁거린 순간,
“…내가, 닥치라고, 하지, 않았나?”
살짝 고개 돌린 가브리엘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우리엘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니, 아마 한 대상에게만 살기를 집중시킨 듯싶다.
눈빛만으로 우리엘을 제압한 가브리엘은, 곧 도로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자학하는 취미는 없는데, 사실 그동안 맹목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 생각해보니까 간단한 일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너희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악마를 싫어해.”
“음~. 얼마나 더 싫어하는데?”
“눈앞에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실상 증오한다는 말이 옳겠지.”
“음, 음.”
가브리엘의 질문에 이어, 미카엘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선봉에서 전투를 이끄는 천사인 만큼 내 말이 마음에 드는 듯하다.
“그런데, 이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두말하면 잔소리!”
되물은 순간, 미카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때 불현듯 빤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왜인지 세라프는 대 천사들보다 약간 뒤로 물러난 채, 한껏 긴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
우리엘이 순간적으로 세라프를 돌아본 찰나,
“좋아. 그럼 얘기는 끝났네.”
얼른 시선을 거두며 품으로 손을 넣었다.
“악마 소멸. 이 목적이 부합하는 이상….”
꺼낸 연초를 입에 물고 씩 웃었다. 선웃음이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물은 완전히 엎질러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 나는….
“수호자로서 너희와 협력할 수도 있겠지.”
============================ 작품 후기 ============================
김유현의 입장은 사실 이미 한 번 나왔습니다.
810화 초반부를 보면 나오기는 하는데, 아마 귀찮으신 분들이 많으실 거라 사료됩니다.
그러니 후기에 해당 부분을 직접 복사, 붙여넣기를 하겠습니다.
후기는 연재 용량에 포함되지 않으니, 이 부분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
현재의 북 대륙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일까?
‘대륙’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구 북 대륙에서 얻어낼 수 있는 성과는 대부분 얻어냈다 봐도 무방하다. 대 도시 바바라는 물론, 일반 도시 프린시카, 헤일로, 모니카, 파멜라는 매우 높은 수준의 안정화를 이루어냈다. 북부 소 도시 뮬이 미진하기는 하나, 애초 미개척 지역과 맞닿아 있는 지역이니 어쩔 수 없다.
신 북 대륙 아틀란타의 상황도 엇비슷하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고 워프 게이트를 뚫은 이후, 선발대는 물론, 구 북 대륙에서 활동하던 전투 사용자의 대다수가 넘어왔다. 북 대륙과 강철 산맥 공략 경험을 발판 삼아, 그 어느 시절보다 활발한 탐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직 안정화라는 말을 꺼내기는 시기상조지만, 안정화됐다고 볼 수 있는 데까지 이르는 속도가 날로 가속이 붙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허면 ‘성’은 어떠한가. 중앙 도시를 관리하는 중앙 관리 기구를 기준으로, 동 도시는 이스탄텔 로우 클랜, 서 도시는 (구) 북부 연합, 남 도시는 머셔너리 클랜, 북 도시는 해밀 클랜이 관리하고 있다.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 클랜 간 반목하는 현상은 옛날 일이 됐다. 머셔너리 클랜이 부상하고 중앙 관리 기구가 출범한 이후로, 각 도시의 관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회복됐다. 천지가 뒤바뀌지 않은 이상 해밀과 머셔너리가 서로 등을 돌릴 일은 없다. 이스탄텔 로우는 머셔너리 출범 이후 시종일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고, 구 북부 연합도 딱히 배타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는다.
그럼 ‘내부 현황’은? 발전 상황은 썩 괜찮다. 네 개의 외(外)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내(內) 도시도 발전을 마쳤다. 첫 발견 때 낡고 추레한 외관은 온데간데없고, 깔끔하게 정돈된 신 도시로 부활했다. 기본 베이스가 탄탄할수록 사용자들의 여타 활동이 편해지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종합해보면 북 대륙은 현재 아틀란타를 안정화할 만한 역량이 충분하며,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좋게 보면, 여기까지다.’
탕. 가볍게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얹은 손가락이 마치 피아노 치듯 간헐적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일종의 버릇이라 봐도 좋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종종 나오는 김유현의 습관이다.
‘단순히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라면 지금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 천년만년 홀 플레인에서 살 것이라면 현 상황은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최종 목적이 ‘지구로의 귀환’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순항에 마냥 앞일을 자신하기에는, 과거의 사정을 들은 김유현으로서는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의문이 일었다.
탁 까놓고 말해서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공략만 하면 되는 거라면 왜 김수현이 지금껏 원정 얘기를 꺼내지 않는 걸까. 조금 무리를 한다손 쳐도 제로 코드만 가지면 모든 게 끝나는데. 결국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다.
이뿐인가. ‘악마’를 생각하면 다가올 앞날은 더 어둡다. 악마를 언급했을 때의 김수현은 그야말로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만만한 놈들은 아닐 터. 이렇게 여러 방해물과 현 상황, 그리고 과거 1회 차의 사용자들을 맞물려 생각해보면 걱정이 아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쥐도 궁지에 몰렸을 때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그러나 악마는 쥐가 아니다. 그래서 더 무섭다. 어떤 미친 짓을 꾸밀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데, 실제로 이룰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과연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맞부딪쳤을 때, 북 대륙은 1회 차 시절의 역량을 보일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 악마가 출현해 활동하면 ‘원정’이 아닌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두 단어는 의미상 엄청난 차이가 있다. 북 대륙은 ‘단체’로 행동한 횟수가 극히 적다. 바바라 공략, 아틀란타 공략, 그리고 3년 전 연합군과의 전쟁을 예로 들기에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특히 강철 산맥을 공략하면서 문제점을 여실히 절감하지 않았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
그래서 김유현은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대로 가만히 흘러가는 대로 놔두기에는 불안하고, 모든 걸 김수현한테 맡기기에는 동생이 안쓰럽다. 최소한 사정을 아는 자신이라도 도와야 한다고, 김유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춘추 전국 시대’의 재현을 계획하는 건 아니다.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니까. 여하튼 의도적으로 전쟁을 조장할 수 없는 이상, 다른 방향으로라도 최대한 전투 경험치를 높여야 한다. 그래서 비밀 도서관 내 기록의 3분의 2를 공개하겠다고 했을 때 내심 기뻤다. 혹여 독식한다 하면 어쩌지 심려했으니까.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한참 부족하다. 현재 북 대륙에 가장 필요한 건 사용자든 클랜이든 앞장서서 선도할 수 있는 존재다. 몇 년 전 바바라 공략을 이끌었던 황금 사자의 클랜 로드처럼. 말인즉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물론 이에 관한 계획은 이미 어느 정도 세워둔 상태였다. 김수현은 그냥 조건 없이 비밀 도서관 내 기록을 공개하라고 했지만, 김유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이용할 수 없을 기회였다. 더구나 북 대륙 수호자가 공석인 지금이 외려 최고의 호기가 아닐까.
‘수현이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김유현은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돕겠다고 한 주제에 어쩌면 더 큰 짐을 지우는 건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대신할 수 있는 사용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1회 차를 직접 겪고 정상에 오른 김수현이 최고의 적임자였다.
귀환의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는 이미 끝났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운은 띄워놔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