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46
00845 The First Step Toward Return, Eight. =========================================================================
짝, 짝, 짝, 짝….
그때 일부러 그러는 듯한, 간헐적으로 끊어치는 손뼉 소리가 소환의 방을 울렸다.
“좋아, 아주 좋아….”
가브리엘은 몹시 만족한 낯빛이었다. 아니. 정말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암암리에 흐르던 예리한 기운이 사라지고, 예의 푼수 같은 기색이 돌아왔으니까. 흡사 전통 가면극을 방불하는 낯짝 변화에 속이 메스꺼웠지만, 간신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가브리엘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휘둘렀다.
“있잖아 있잖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저는 찬성입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단발머리의 대 천사였다. 나를 두루 살핀 미카엘이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저희를 싫어하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악마를 증오한다는 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실제로 이뤄낸 성과도 독보적이지 않습니까?”
“응응. 그렇지? 그리고 맹아라 때처럼 불안해하느니, 차라리 얘한테 맡기는 게 깔끔하지 않겠어?”
“오, 그렇네요. 사용자 김수현이라면 누구도 함부로 건들 수 없을 테니까요.”
“저는 반대입니다!”
훈훈한 말이 오고 가는 와중, 느닷없이 고성이 몰아쳤다. 가브리엘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틀어막고, 미카엘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가브리엘 님! 제가 전에 말씀드린 걸…!”
“응~. 글쎄? 상관없지 않으려나?”
무어라 외치려는 찰나, 싱글벙글한 목소리가 스리슬쩍 끼어들었다.
“나는 재밌을…. 아니, 괜찮을 것 같아. 히히.”
라파엘은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시종일관 쭈그려 앉은 자세로,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엘은 기막히다는 눈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 그러지 마라.”
은근히 말을 건네니 단박에 나를 쳐다봤다.
“네 담당 사용자를 죽인 건 미안한 데, 내가 유현아를 괜히 죽였겠느냐고. 죽일만하니까 죽였지. 안 그래?”
“무, 무어라고?”
“어차피 이미 결정 난 것 같은데, 앞으로 서로 잘해보자는 소리야. 케케묵은 옛 감정은 시원하게 털자고. 너무 인상 구기지 말고. 후.”
“이놈!”
허공에 흐르는 연초 연기 사이로 서슬 푸른 빛이 스쳤다. 앙칼진 눈으로 무섭게 노려보는 것이 당장에라도 때려죽일 기세다.
…그래, 부디 계속 그런 태도를 보여달라고. 내가 혹시나 하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지금이야 악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지만, 제로 코드를 얻고 최후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만, 그만해. 우리엘도 진정하고, 김수현 너도 적당히 긁고.”
가브리엘은 느긋한 태도로 우리를 중재했다. 우리엘은 잡아먹을 듯 씩씩거렸으나 그 이상 나서지는 않았다. 나는 으쓱 어깨를 들췄다.
다음 순간, 선명한 빛무리가 갑작스레 시야를 가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우리엘이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아무 말도 않고 돌아간 건가.
“쟤도 참.”
가브리엘은 한 번 쓰게 웃고는 자세를 고쳐 앉고 나를 바라봤다.
“그럼 우리도 너를 수호자로 인정은 하겠는데.”
그렇게 말하더니 검지로 턱을 받치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음~. 고민이네.”
“고민?”
“응.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수호자 클래스 때문에. 이게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는데, 사실 지금 네 클래스랑 비교하면 굉장히 떨어지거든?”
“어차피 활성화, 비활성화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지 않나?”
“그것도 알고 있었어? 맞아. 그런데 좀 아까워서. 무력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차이점이라고 해봤자 제 3의 눈으로 모조리 커버할 수 있고. 들어보니 당분간 전 전대 수호자가 많은 부분에서 보조해주겠다는 것 같은데, 차라리 걔한테 주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흠….”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수호자는 나쁜 클래스는 아니지만, 기타 권능을 제외하면 별로 좋을 것도 없다. 특히 각성 시크릿 클래스인 ‘검의 군주’와는 비교하기조차 미안할 정도였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응?”
“내가 그 특권을 포기하는 대신, 각성 시크릿 클래스 하나 더….”
“아니. 그건 더는 안 돼. 그러느니 그냥 너한테 수호자 권능을 주고 말겠어.”
혹시나 싶어 찔러봤는데 역시나 단호히 거절했다.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는 마. 이제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으니까.”
“…줄 수가 없다고?”
“그래. 그때 너한테 네 개 넘기고 나서, 동 대륙과 남 대륙에 세 개씩 뿌렸거든. 너희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게 말이…?”
“알아. 말 안 되는 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그렇게 해서라도 최소한의 균형은 맞춰야 했으니까. 물론 그냥 무상으로 준 건 아니고, 대륙마다 상응하는 대가는 받았으니 너무 억울해 할 필요는 없을 거야.”
“…….”
치밀어 오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강철의 여황, 마도 황제, 복마전의 성인, 혼돈의 황녀 등등. 장고 끝에 포기했던 것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정말 아쉽지만 이미 뿌렸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냥 포기하기는 좀 그러네.”
“정말, 욕심쟁이라니까. 어차피 쓸모도 없잖아?”
“그래도 적당한 보상을 받았으면 하는데.”
“뭐, 그게 합리적이기는 하지.”
예상외로 가볍게 수긍한 가브리엘은 문득 제단에서 일어섰다.
“그럼….”
눈웃음치며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살며시 허리 굽혀 얼굴을 들이민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뽀뽀는 어때?”
“뭐?”
“끌리지 않아? 무려 대 천사장의 입맞춤인데.”
“축복 효과라도 있나?”
가브리엘이 눈을 찡긋하려다가 떠름히 맥 풀린 기색을 비쳤다.
“아, 재미없어. 그냥 확 기습 키스를 해버릴 걸 그…?”
그때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가브리엘이 느닷없이 흠칫 몸을 떨었다. 부지불식간에 허리를 펴고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윽고 떫은 감이라도 씹은 양 움츠러들며 뒤돌아보는 모습을, 나는 멀뚱히 응시했다.
혹시 남근에 키스해줄 생각은 없느냐고 받아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미카엘과 라파엘도 갸우뚱하고 있고, 세라프도 시종일관 고요한 얼굴로 서 있는데….
그 순간이었다.
“……!”
순간적으로 본능에 따라 몸이 떨렸다.
언뜻 스치기는 했지만, 분명히 느꼈다.
아니, 확실하게 봤다.
“세….”
조용히 서 있는 세라프의 오른손이,
“…….”
꽈악 주먹 쥐어진 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
1. 이름(Name) : ‘신살자(神殺者)’ 김수현(4년 차)
2. 클래스(Class)
①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 활성화
② 북 대륙의 수호자(정)(Guardian Of The Northern Continent) – 비활성화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검의 군주(君主) 2. 마성(魔性)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결국에는….’
받고 말았다. 북 대륙의 수호자.
사용자 정보를 보니 한숨과 함께 뜻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안도하는지, 씁쓸한지 스스로 모를 모호한 기분이다.
하지만 아까 마음먹었듯 이미 일은 벌여놨다. 그런 이상 지나간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옳으리라. 이도 저도 아닌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그리하여 도망치듯(?) 소환의 방을 벗어나자마자 공교롭게도 머셔너리에서 연락이 왔다. 서 도시의 대형 클랜 하나가 나와의 면담을 요청하며, 성을 방문하는 사용자들이 서서히 늘어날 추세가 보인다는 소식이었다.
예상보다 빠르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튼, 일단 면담 요청은 들어오는 족족 내일로 미뤄두고, 늦어도 저녁 즈음에는 돌아갈 테니 간부 회의를 준비하라는 말로 통신을 끝냈다. 바로 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어떤 것보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삐 걸음을 놀렸다. 목적지는 남 도시 머셔너리 캐슬이 아닌, 동 도시 이스탄텔 로우 클랜 하우스.
사실 미리 약속을 잡은 게 아닌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윽. 어떡하죠. 지금 클랜 로드 님이 안 계시는데….”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손을 꼼지락거리며 곤란해 하는 박다연을 보니 아차 싶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던가. 하기야 워낙 바쁜 분이니 탓할 거리도 못 된다. 애초 연락도 않고 방문한 내 잘못이지.
“저 그럼….”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들어와서 기다리실래요?”
“아, 곧 오십니까?”
“네.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일단 제가 연락해볼게요.”
이렇게 박다연의 손에 이끌린 결과, 나는 응접실도 집무실도 아닌, 무려 한소영의 개인 숙소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사실 왜 여기로 안내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괜스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박다연이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며 문을 닫고 나간 후, 나는 실례란 걸 알면서도 살금살금 방을 돌아다녔다.
숙소는 한소영의 성격을 대변하듯 하나하나 각 잡혀 정리돼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예리하게 벼린 칼날처럼 서늘한 느낌이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내 집무실과는 다르게 딱 있을 것만 있다고 해야 하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청결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새하얀 침대 시트를 보며 코를 묻어볼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문득 창문 너머로 모종의 기척이 느껴졌다. 스리슬쩍 들여다보니, 눈에 확 띄는 긴 생머리의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부리나케 거리를 가로질러 오는 것이 보였다.
거의 뛰는 걸음으로 입구에 도착한 한소영은 잠시 두세 마디를 주고받고는, 곧장 클랜 하우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곧 올 것 같아 얼른 자리에 앉고 뚝 시치미를 뗐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문밖으로 여러 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다가 문 앞에서 돌연히 정지했다. 이어서 소리 죽여 승강이 벌이는 소리가 들려, 살그머니 청력을 높였다.
– 이 안에…. 기다리고…?
– 네….
– 왜…?
– 왜긴요…. 무릇 남자란 여인의 방에서…. …할 때 정복감을…. …도 몰라요?
워낙 소곤소곤 말하는 터라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한소영이 몹시 당혹해 하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어느 여인이라도 외간 사내를 숙소에 들이는 건 썩 달갑잖을 터. 좋다고 들어온 나도 문제지만, 박다연도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크게 혼날 것….
– …그래?
“?”
…………내가, 잘못 들었나?
– 하지만 숙소에 준비물이….
– 그건 제가 빌려드릴 테니까….
잠시 후.
두 인기척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고, 나는 멍하니 방문을 응시했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십 분 안에는 올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방문이 엇갈렸듯 예상도 어긋났다. 십 분은커녕, 이삼십 분을 넘어, 장장 사십 분이 지나서야 겨우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들어온 한소영의 자태는, 아까 창밖에서 봤을 때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긴 머리카락을 뒷머리로 맵시 있게 올려 묶어 정갈하게 늘어트렸고. 숫제 몸을 가렸던 칙칙한 색의 로브는, 착 달라붙는 깊게 파인 브이넥 원피스로 교체해 폭발적인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한소영은 의례적으로 인사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물기를 말끔하게 말리기는 했지만,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러운 살 내음은 방금 씻고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촉촉해 보이는 살결이 자아내는 색정적인 분위기에 취한 걸까. 불현듯 목이 바짝 타는 듯한 느낌에 침이 살그머니 넘어간다.
“방문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조금 놀랐네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한 사십 분 정도….”
“미안해요. 하지만 미리 연락을 주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렇지요. 제가 무례하게 찾아온 것이니 너무 신경 쓰실 건 없습니다.”
순순히 인정하자 한소영은 새초롬히 턱을 까닥거렸다.
“그래요. 저도 외근이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온 거라서…. 방금 도착하자마자 온 거거든요. 그러니 양해 부탁 드려요.”
“예?”
“네?”
“…아, 아닙니다.”
방금 왔다고…? 그럼 아까 창밖으로 본 여인은 누구지? 설마 숨겨둔 쌍둥이 자매라던가….
“아무튼,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차갑고 무감정한 음성이 시답잖은 생각 말라는 듯 상념을 일깨웠다. 나는 헛기침과 함께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한소영의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 거짓말이라고는 하실 줄 모르는 분인데….
“이것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애써 찜찜함을 털며 꺼낸 것을 탁자에 놓고 쭉 밀었다. 형이 가져온 비밀 도서관의 기록을 담은 종이봉투였다. 한소영은 손만 움직여 입구를 살짝 열어보고는 흘끗 눈을 치켰다.
“이건….”
“예. 비밀 도서관이 기록이죠.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몫으로 가져왔습니다.”
한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당히 많은데요.”
“원래 발견한 서재는 총 세 개였습니다. 그중 두 개는 공개하고, 남은 한 개는 머셔너리, 이스탄텔 로우, 해밀 클랜 이렇게 세 몫으로 나눴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많아요.”
“원하신다면 산하 클랜에 조금 베푸셔도 상관없습니다.”
문득 한소영이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려 하다가, 올려 묶은 걸 깨달았는지 멈칫하며 금세 손을 내린다.
포커페이스의 달인인 만큼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과거 오랜 시간을 지내온 나는 한소영의 감정 변화를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다. 바로 행동으로 말이다.
가령 화낼 때는 눈썹이 움직이거나 미간이 좁아진다. 기쁠 때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거나, 몸을 편히 묻으며 다리를 꼬거나,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등의 행동을 한다. 방금 같은 경우는 조금 갑갑해하고 있다는 행동으로 볼 수 있겠다.
“저도 그 자리에 참석했어요. 제가 알기에는 발견자는 머셔너리 로드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비밀 도서관은 북 도시의 관할 하에 있으니 해밀 클랜은 그렇다 쳐요. 혈연관계기도 하고. 하지만 저는….”
“음…. 받을 이유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한소영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결국에는 이런 특혜를 받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또 의좋은 남매로 변신해 볏단을 놓네 마네 한참을 옥신각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제부터는 다르다.
“간단합니다. 이스탄텔 로우가 더 성장하기를 바라며, 그럴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게 제가 따로 챙겨드리는 이유입니다.”
같은 대표 클랜인 만큼, 어찌 보면 실례라고 볼 수도 있는 말이다. 여기서 나오는 통상적인 반응은 총 세 개로 볼 수 있다. 발끈하는 사람, 숨기는 사람, 그리고 생각하고 알아차리는 사람.
“꼭….”
그리고 한소영은,
“수호자처럼 말씀하시네요.”
후자였다.
여기서 숨길 이유는 없겠지.
“예. 맞습니다.”
가볍게 긍정하자 나를 바라보던 두 눈이 살짝 치떠졌다.
“확실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현재 북 대륙의 수호자입니다.”
그때였다. 정확히 ‘수호자’까지 말을 꺼낸 순간,
딱!
한소영이 곧장 손을 튕기는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삽시간에 방을 감쌌다. 사일런스 필드. 좋은 무영창이다.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는군요.”
엄청나게 빠른 대응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 찰나, 한소영이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아마 내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심이라고 느꼈을 터. ‘초감각’을 가진 이상, 진실의 가부를 논할 필요는 없다.
“언제부터…. 되신 건가요?”
한소영의 목소리가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한 한 시간…? 그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네?”
“오늘, 방금 계승했습니다. 사실상 받고 바로 온 거니 이스탄텔 로우 로드에게 가장 먼저 밝힌 셈이네요.”
“가장 먼저…?”
한소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침묵하더니 돌연 무심히 눈을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음…. 왜 기뻐하는 거지?
“왜요?”
“그야 도움을 얻고 싶은 것도 있고, 이스탄텔 로우를 누구보다 믿고 있으니까요. 겸사겸사 찾아온 것도 있습니다만.”
“그럼 해밀 로드는요?”
“형이요? 글쎄요. 뭐, 형에게도 곧 말해야겠죠.”
나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사실 형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진배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한소영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다.
“그래요.”
돌연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살며시 다리를 꼰다. 이어서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뜨며 나를 빤히 응시한다.
이상하네. 왜 아까부터 계속 기쁘다는 신호를, 그것도 연달아 보내는 걸까?
아, 그러고 보니 하나 더 있었다. 정말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나오지 않는 겸상 권유….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하셨죠.”
한소영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차가운 얼음이 봄바람을 만나 살살 녹아내리듯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후, 어렵군요. 요즘 정말 바쁘지만, 수호자의 요청은 가벼운 사안은 아니니까요. 이 건에 관해서, 좀 더 심도 깊은 말을 나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예? 아니 바쁘시면 그냥 이 봉투만 받아주시면….”
찰나의 순간, 한소영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아, 물론 그렇지요.”
나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아, 아뇨. 아직.”
“저도 마침 식전이라서. 우선 같이 식사라도 하시며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요.”
“저….”
“괜찮아요. 식당으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 제가 내려가서 가지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게….”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바로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문을 열고 나갔다.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한소영의 기분이 상당히 좋은 듯하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여기서 이어지는 내용이 하나 더 있기는 한데….
사실 어제 조금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북 대륙의 무대를 잠시 내리는 만큼, 임팩트 있는 내용을 적고 싶었거든요. 나름 생각한 구상도 있었고요.
문제는 집필을 끝내고, 습작에 올리고, 다시 읽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생각하면 창피한데요.
저는 제가 소위 말하는 ‘오글거림’에 좀 면역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어제 마무리 내용은 제가 읽어도 진짜 미치겠더라고요.
하나 말씀드리면, 이것저것 끝내고, 김수현이 폼을 잡고 먼 곳을 쳐다보며 홀로 생각하는 내용이 나와요.
이렇게요.
‘이제 진정한 시작인 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자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미친 듯이 방을 돌아다니고, 벽에 머리 쿵쿵 찧고, 괜히 이불을 발로 걷어차는 등등. 여하튼 별별 짓을 다한 것 같습니다.
아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아직 결말이 아니니 그냥 이어지는 내용으로 놔두고, 무난하게 가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아, 후기 적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