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71
00870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탕.
우르르르르르르르!
문을 닫고 일 층으로 내려가자, 클랜원들이 여기저기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히 십 면 매복(十 面 埋伏)의 계를 방불케 하는 전술 행동에 삽시간에 에워싸이고 말았다. 후, 훌륭해.
“마르는요?”
“어떻게 됐어요? 그ㄴ, 아니 요정은 뭐래요?”
포로를 붙잡았으니 이제 심문을 하려는 건가. 어쩔 수 없다. 성실하게 응해주는 수밖에.
“아직 방에 있습니다.”
“그럼 둘만 있는 거예요?”
“마르와 둘이서 얘기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어머. 그렇다고 애를 혼자 두고 와요? 홀랑 납치해서 도망치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고연주는 펄펄 뛰며 화를 냈다. 왜인지 다른 여인도 필요 이상으로 초조해 하고 있다. 심지어 손톱까지 물어뜯으면서.
“어쩌지? 혹시 엄마라 부르라고 세뇌한다거나….”
“그럼 또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거예요?”
아니, 납치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저은 후, 나는 겹겹이 구축된 포위망(?)을 뚫고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르르르르르르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혼자 쉬면서 차분히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굶주린 승냥이 떼가 먹잇감 쳐다보듯 바라보는데 어찌 무시할 수 있으랴. 결국에는 적잖은 시간을 들여 니뮤에와 나눴던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고 말았다.
“그럼 그 가시나무 관이라는 걸 사용해도 마르의 상태는 장담할 수 없다는 거네요?”
“그런가 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마르는 특이하고, 또 특별한 존재잖아? 그래서 그 요정도 함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것 같네.”
니뮤에는 그랬다. 마르가 어떻게 될지는 자신도 감히 알 수 없다고. 단 하나 확실한 건, 가시나무 관으로 이 차 각성에 성공 시 직면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본(本)을 통제하고, 정상으로 돌려놓는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것뿐이다. 본을 새로이 흡수하고 다스리는 과정이 마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결과 마르가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이건 니뮤에를 탓할 수도 없는 문제다. 제 3의 눈으로 봐도 ‘역사상 최초로 출현한….’ 이라고 명시돼 있으니까.
그때 조용히 눈치만 살피던 김한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안 하면 안 돼요?”
“한별아. 그건.”
“알아요. 현재 상태도 결코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는 거. 하지만…. 마르는 아직 애잖아요.”
“…….”
“너무, 너무 가혹해요. 성장은 빠르지만, 햇수로 치면 아직 갓난쟁이에 불과한데….”
“음….”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아마 각성은 일단 보류하고, 더 무난한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일 터. 실제로 상태 유지 시, 당분간 안전하다는 보장만 있다면 어느 정도 일리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는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과 같은 상태다. 말인즉 어쩔 수 없는 상황이요, 선택이다.
…그래. 선택은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르가 스스로 생각해 결정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자리를 비켜줬다.
“우선은 기다려보자고….”
결국 현재로써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살며시 눈을 뜨니 눈 부신 햇살이 시야를 가득히 물들였다.
“벌써 아침인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자,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가 보였다. 임한나가 평소 사용해서 그런지, 시트에는 따뜻하고 고소한 우유 냄새가 감돈다.
어젯밤 두 요정은 새벽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 듯했고, 덕분에 집무실을 비워줬다. 셋이서 같이 자자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나도 오랜만에 임한나의 젖을 실컷 빨면서 잠들 수 있었으니. 그나저나 벌써 나간 건가? 깨워주고 씻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세안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고용인이 두 요정이 깼다는 말을 전했다. 둘은 이미 세안과 식사를 마쳤다고 한다. 지금은 정원에서 놀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이 말인즉 마르가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리라.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원으로 나가자, 이미 나 말고도 여러 명의 클랜원이 나와 있었다. 어제만큼은 아니었으나 전원 조용히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는 수로 부근서 두 영물과 깔깔거리는 중이었고, 니뮤에는 근처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헛기침하며 걸어가자 귀를 쫑긋 세우며 나를 돌아보더니, 얼른 몸을 일으킨다.
“좋은 아침입니다. 많이 낯서셨을 것 같은데요.”
“아니, 전혀 아니에요. 생각해주신 덕분에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김수현 님.”
요정의 인사인지, 또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참으로 조신하면서 기품 넘치는 태도였다.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수현 씨면 됩니다.”
“네?”
“김수현 님은 제가 좀 낯간지러워서.”
“아…. 네. 그럼 수현 씨.”
니뮤에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카락을 귀로 쓸어 넘기더니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을 보니 정말 마르의 엄마가 돼도 괜찮겠다 싶었다. 내가 어떤 심한 짓을 해도 상냥하고 포근하게 받아들여 줄 것 같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음…. 왜 뒤통수가 따가운 걸까?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저를 기다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이야기는 끝난 겁니까?”
“네. 마르 님은….”
그때였다.
“아빠!”
이제 막 이야기하려는 찰나, 누군가 앙증맞게 외치며 앞으로 세차게 달려들었다.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 잘 잤니? 라고 말하려는 찰나,
“저 할래요!”
갑자기 입이 다물어졌다. 잽을 예상했는데 어퍼컷을 후려 맞은 기분이다.
“저요. 각성 할래요.”
“…어?”
“가시나무 관 쓸래요. 쓰고 싶어요.”
“마르야?”
무언가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좋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라면 무조건 말릴 것이다. 흘끗 눈을 흘기자, 니뮤에가 침착히 고개를 흔든다.
“절대로 구슬리지도, 종용하지도 않았어요.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말씀드렸으며, 선택은 마르 님이 하셨습니다.”
“아빠. 저 전부 들었어요. 그래도 하고 싶어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마르는 얼른 덧붙였다. 나는 잠깐 침묵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면서도 하겠다는 거니?”
“네!”
이제는 숫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 막힌 말문은 쉽사리 트이지 않았다. 왜? 어째서? 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으나 계속 맴돌기만 한다. 그 기색을 느낀 걸까.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마르는 정원을 발로 살짝 긁었다.
“저요. 계속 생각해왔어요.”
“생각?”
“네. 저도, 저도 이제 아빠한테….”
“…….”
그리고 스리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아빠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요.”
한층 힘을 준 목소리로 말을 맺는다.
그러니까, 내게 도움이 되고 싶으니 각성을 하겠다고.
“마르야. 그건 말이다.”
물론 장하고 기특한 생각이기는 하다. 게다가 성공한다면 즉시 전력으로 도약할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 이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어라 말하고 싶었다. 무언가 아니라고, 정확히는 짚을 수는 없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그건 조금….”
그러한 찰나, 갑자기 먼빛으로 클랜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연주는 어딘가 씁쓰레한 기색이 느껴지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그녀뿐만 아니라, 거의 전원이 비슷한 반응이다.
그러자 문득, 클랜원들이 왜 저렇게 물러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저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마르만큼은 참가하게 하고 싶지가 않다는….
그래도 결국 물러난 것은.
“…안 돼요?”
시무룩해 하는 음성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
…그래도 물러난 건, 마르의 결심이 그만큼 확실히 섰기 때문이리라.
화정이 그랬다. 요정 여왕이 하려는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마르는 각성을 하고 싶어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았는가. 이것 하나만 해도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복잡하던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됐다.
“좋아.”
허락해주자 마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존중할게.”
“아빠!”
“그래도 무섭기는 하지?”
“…조금요.”
마르는 어슴푸레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꼭 구해줄 테니까.”
조금 창피하기는 했으나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마르는 몸을 배배 꼬면서도 수줍게 미소 지었고, 그 다음 순간, 누가 말하는지도 모를 격려의 말이 시끄럽게 터졌다. 힘내라는, 꼭 성공하라는 등 상투적인 말이 주를 이루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응원이었다.
그렇게 마르를 향하는 환호 속에서, 니뮤에는 글썽거리면서도 맑고 하얀 미소를 짓는다.
“수현 님, 아니 씨.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하시는 것 같은데요.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행복해서요. 어제 이야기하면서 느꼈지만, 마르 님이 그동안 얼마나 좋은 분들한테 아낌을 받으셨는지 알 것 같아서….”
“…….”
결국 참지 못했는지 니뮤에는 살며시 눈시울을 붉혔다. 나름 감동적인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 얼마나 여왕을 생각하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총할 요정이 이 정도라면 일반 요정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졌다.
물론 호기심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각성에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합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길지는 않아요. 가장 빠른 분은 관을 쓰자마자, 가장 늦었던 분도 오 분 이상은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마르 님은.”
“장담할 수 없다는 거군요.”
“…네.”
그럼 아마 사용자가 장비의 주인 의식을 치르는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되는데.
아무튼, 좋다.
환호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마르와 눈을 한 번 맞춘 후,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클랜원들이 있는 곳까지 물러섰을 때는 어느새 사방이 조용해져 있었다.
이윽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니뮤에는, 어제처럼 두 손으로 가시나무 관을 고이 받쳐 들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숨을 고르다가,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딛는다.
오직 마르만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조용히 떨리면서도 한없이 비장하다. 흡사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듯, 몹시 정숙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내려앉는다.
갑작스러운 정적. 햇살이 드리운 정원에는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만이 난다.
서서히 치솟는 모종의 감정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간다.
돌연 시야가 흔들려, 마력을 한껏 높였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전 감각을 한계까지 끌어올리자, 주변 상황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마르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반듯이 서 있다.
니뮤에는 눈에 띌 정도로 떨면서 꾸준히 전진한다.
별것 없는 일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투 상황도, 누군가 죽어가는 상황도 아니다.
그냥 가시나무 관을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주변에서는 무거운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더는 못 보겠다는 듯 고개 돌리는 임한나.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짓씹고 있는 진수현.
양손을 맞잡고서 기도하는 안솔.
여기 모인 전원이 각자의 방식으로 마르를 생각한다.
이윽고 느닷없이 마르와 눈이 맞았다.
그리고 마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 미소와 마주하자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흡사 처음 마르를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이 전신을 엄습한다.
그 순간이었다.
사르르르….
문득,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약간의 거리를 남겨둔 채, 니뮤에의 걸음도 멈췄다.
그리고 두 팔을 하늘로 느릿하게 뻗더니,
그대로, 손을 놓았다.
“……!”
순간적으로 소리 없는 탄성이 터졌다.
분명 가벼운 바람이었다.
머리카락을 살짝 스칠만한 한 줄기 미풍에 불과했다.
그래, 그러할진대.
“말도 안 돼….”
떨어지기는커녕, 가시나무 관이 바람에 몸을 실어 부드러이 날아간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지만, 확실히 마르를 향해 훨훨 날고 있다.
맑고 조용한 어느 날의 아침.
팔백 년간 바라왔던 요정의 염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별안간 가시나무 관이 빙그르르 회전하며 활공을 멈춘다.
멈춘 지점 아래에는 정확히 마르가 서 있다.
이윽고 춤을 추듯 서너 번 빙글빙글 돌더니, 회전하는 그대로 하강을 시작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잠시 후.
일 초가 십 초처럼 느껴지는 시간 흐름 속에서,
가시나무 관은,
가벼운 깃털과도 같이,
사뿐히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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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연재 주기를 보니 확실히 제가 못났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월은 좀 더 성실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