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72
00871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바람이 차서 그런지 창문에 서리가 잔뜩 꼈다. 하필 이럴 때 찬바람이…. 라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봐도, 자연 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가슴 한 켠의 걱정은 가시지 않아, 결국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고 만다.
한밤중의 바람은 상당히 차갑다. 게다가 몹시 날카롭기까지 해 얇고 느슨한 가운을 사정없이 침투해 들어온다. 뭐 ‘소망의 셔츠’를 걸친 이상, 딱 알맞게 시원하다고 느끼지만 말이다. 셔츠 자락을 살짝 움키며 탁 트인 시야를 바라본다.
깊은 밤의 정원은 짙푸른 달빛으로 물들어 있다. 건물도, 나무도, 수로도, 풀도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천연 한껏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두 조용히 주시하고만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
가시 돋친 넝쿨 수백 개가 둥글게 뭉쳐 있다. 얽히고설킨 넝쿨은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듯 겹겹이 에워싼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크기 또한 어마어마해, 높이만 봐도 물경 육 미터를 넘는다. 아마 저 정체 모를 물체의 중심부에 마르가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저런 건 아니었다. 처음 가시나무 관을 썼을 때는, 갑자기 튀어나온 넝쿨이 마르를 휘감아 매우 놀랐다. 그러나 곧 각성의 한 과정이라 이해했고, 그때부터 내내 기다리는 중이다.
하루하루 오늘은, 오늘은 하며 얼른 끝나기를 노심초사 기다렸으나, 이레가 지났음에도 소식이 없다. 그러는 동안 넝쿨은 서서히 몸을 키워, 어느새 정원의 중앙을 차지할 정도로 불거진 상태였다.
“언제 끝날는지….”
멍하니 보고만 있으려니 속이 갑갑하다. 걱정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제 3의 눈으로 봐도 어떤 정보도 출력되지 않고, 그냥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다.
결국, 쓸쓸히 방으로 돌아가려는 즈음, 문득 어슴푸레한 형체가 눈에 밟혔다. 누군가 넝쿨 앞에 꿇어앉은 채 양손을 꼭 맞잡고 있다. 시야 한구석에 비치는 요요한 반사광에 나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여인은 바로 니뮤에였다.
소환한 당시, 클랜원들은 니뮤에를 썩 좋은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아마 허준영이 했던 말이 그럴듯하다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마르의 각성이 시작된 이후, 니뮤에가 한 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적의는 어느 순간 동정으로 변했다. 아직 호의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안쓰럽게 여기는 클랜원이 몇 명 있는 듯하다.
“흠, 흠!”
그때였다. 한창 니뮤에를 보는 동안, 등 뒤서 갑자기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마르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누군가 몰래 들어온 듯싶다.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예의 없게…. 무심코 언짢은 눈으로 몸을 돌아보자, 테라스 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비비앙이 보였다.
“역시, 아직 잠들지 않았나.”
“비비앙?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의아히 묻자, 비비앙은 훗 건방지게 웃더니 느긋이 테라스로 걸어 나왔다.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다. 마침 잠도 안 오고 심심했는데 얘나 좀 가지고 놀아야겠다.
“뭐…. 네가 이러고 있을 거라는 걸 예상했다고나 할까?”
“아, 그렇구나.”
나는 납득했다는 뜻으로 끄덕인 후, 그대로 비비앙을 지나쳤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방으로 돌아가 침대로 몸을 누였다.
“…저, 저기?”
반응은, 생각보다 늦게 돌아왔다.
“김수현?”
“…왜? 아, 응. 괜찮아.”
“응? 뭐, 뭐가 괜찮아?”
“바람 쐬러 온 거지? 꽤 쌀쌀하지만, 경치가 좋으니 즐길만할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적당히 쐬고 돌아가라. 나는 이만 잘 거니까 절대로 깨우지 말고. 아주 깨우기만 해봐.”
위협하듯 말을 끝내고 곧장 이불을 덮었다.
“야, 야아~. 나 왔잖아.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우리 얘기 좀 하자. 응?”
“…….”
“자려고? 진짜 잘 거야?”
“…….”
침묵하고, 못 들은 척한다. 이 상황이 매우 어이없는지 기막혀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자자, 자자….
그리하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약 오 분 동안 끊임없이 나를 부르짖던 비비앙이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그 대신, 한동안 씩씩대는 분해하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 소리마저 끊겼다.
잠시 후.
“흐아아앙….”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어엉, 어어어엉….”
흘끗 눈을 흘기자, 비비앙은 테라스 난간에 쭈그려 기댄 채 목놓아 울고 있었다. 양 무릎을 꼭 붙인 채, 뺨에 줄줄 흐르는 눈물이 몹시 서럽다. 그래, 울어라 울어. 흐르는 강물처럼 울어라, 비비앙이여.
“이 나브 노므아아…. 빠리 다래저어….”
낄낄대는 걸 들었는지 비비앙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렸다. 엉엉 울며 몸을 일으키더니, 흡사 엄마 찾는 아이처럼 어정어정 걸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진다. 순간 매몰차게 밀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고 품으로 끌어들였다. 너무 불쌍하잖아.
“나브, 나브 노옴….”
“그래, 그래.”
“너 저아 그어는 거 아이야아….”
“미안, 미안해. 그러니 너도 다음부터 그렇게 건방 떨며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귀에 속삭이며 등을 토닥거려주자, 비비앙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를 반주 삼아, 나는 웅크린 비비앙을 꼭 끌어안았다. 조금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덕분에 우울한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니까.
*
스슥, 스슥….
살살 귀를 긁는 거슬리는 소음에 절로 정신이 들었다. 방 안이 어슴푸레한 걸 보니 어느새 까무룩 잠들어버린 듯싶다. 아마 비비앙이 잠꼬대하는 거라 생각해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손에 걸리는 감촉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저을 뿐.
찡그리며 눈에 힘을 주니 가물가물한 시야로 비비앙이 보였다. 문제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하기야 잠버릇이 험할 수는 있다만,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스스로 저기까지 갔는데, 저렇게 반듯하고 예쁘게 누워 있을 수가 있나? 그것도 이불까지 곱게 덮고서.
그 순간, 은빛 광채가 번뜩였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무언가가 흔들거리고 있다. 누군가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찰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마력을 한껏 뿜으며 안력도 최대로 높였다. 어두운 방 내부가 일시에 환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누.”
“…으응?”
초점이 완전히 돌아온 순간 눈앞의 것이 갸우뚱 기울어졌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멍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투명한 눈망울이 바로 앞에서 나를 물끄럼말끄럼 바라보고 있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딘가 낯설지 않은 얼굴. 왜인지 잘 숙성된 향기로운 브랜디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조금 뜬금없기는 하지만, 문득 토끼가 떠올랐다. 그냥 토끼가 아니라, 바니 복장을 걸친 야한 토끼.
나와 마주하는 눈동자는 분명 맑고 순수하나,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은 것이 충분히 무르익은 느낌이다. 언뜻 순결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색스러운 야한 기운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휘휘 흔들고 다시 쳐다보자, 그제야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이제 갓 고등학생, 아니 발육 좋은 중학생 정도 되려나?
얼굴 곳곳에 애티가 있어 앳돼 보이건만, 분위기는 단아하고 정숙한 대갓집 규수와 흡사하다. 갸름하고 부드러운 턱선은 아직 덜 여문 것 같아 보이지만, 소복이 부푼 불룩한 가슴께에 흘러넘치는 은빛 머릿결은 화려하고 우아한 품격을 자아낸다.
그래, 그러니까….
“아빠.”
그때, 처음 보는 여인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아빠라고 불렀다.
“저 때문에 깨셨네요.”
소녀 같지만, 예의 바르고 고상한 아가씨 말투.
“죄송해요. 곤히 주무시는 건 봤지만, 각성하는 동안 너무 외로워서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담담히 이어지는 나긋나긋한 음성을 들은 순간,
“…음.”
우선은, 소리부터 지르기로 했다.
*
아직 새벽 찬 기운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여느 날처럼 맑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으아아아아악!”
그러나 성의 일 층은,
“히이이이이익?”
오늘따라 굉장히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아직 식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클랜원 전원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무려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이렇게 모두 모이는 건 꽤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각성이 끝났다.
그러니까, 마르가 돌아왔다.
한데 클랜원들은 그 사실을 대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내심 이해는 간다. 우선 외양이 아주, 매우 달라졌거니와(예전의 마르는 정말 잘 쳐줘야 초등학생 일 학년 정도였다.), 나조차도 새벽녘에 봤을 때 한참을 믿지 못했으니까. 갓난아기 때부터 키우고 돌봐왔으니, 이 폭풍 성장을 어색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세상에…. 정말, 정말 마르 맞니? 엄마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네. 그럼요. 연주 언니잖아요.”
“이야, 이거 놀라울 정도로 엄청나게 변했네.”
“저도 조금 어색하기는 해요. 후후. …아, 오늘 새벽에 침대 끝으로 옮겨놓은 건 사과 드릴게요. 순간 질투가 나서요.”
“하하. 그럼 이제 마르 여왕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아이, 놀리시면 싫어요.”
그래. 이 정도 반응은 일반적이라고 치고.
“안 돼애애! 돌려줘! 순수하고 귀여운 마르를 돌려줘어어어!”
안현의 절규는 조금은 이해가 갈 듯 말 듯했고,
“헉헉, 여고생 만세! 여고생 다이스키!”
두 팔 벌려 외치는 진수현이라는 미친놈도 있었다.
“형님! 앞으로 장인어른으로 모셔도 될, 컥!”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진수현을 걷어차 준 찰나, 안현이 눈물 맺힌 얼굴로 다가왔다.
“형, 정말 마르 맞아요? 아니죠? 혹시 마르의 탈을 쓴…!”
“…적당히 좀 해라. 그리고 정원 보면 되잖아.”
안현은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현재 겹겹이 둘러싸여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은 마르가 틀림없다. 반신반의하며 데리고 나오면서 확인한 결과, 정원을 점령하던 넝쿨 덩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으니까.
단 하룻밤 새에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마 마르 정수리에 고이 얹혀진 가시나무 관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몸은 괜찮아진 건가요?”
아차, 그러고 보니 마르의 상태를 확인하는 걸 잊고 있었나. 워낙 놀라고 있다 보니 미처 볼 생각도 못 했다.
“네, 재룡 아저씨. 일단은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일단은, 이라고요?”
“네. 무질서하던 본의 흡수와 통제는 완전하게 이루어냈어요. 하지만 각성이 끝나는 동시에, 그동안 제 불완전한 몸의 구성을 맞춰주던 하늘의 기적도 같이 사라져서….”
“그, 그런가요?”
마르는 두 손을 왼쪽 무릎에 얌전히 얹은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새로이 탄생한 여왕을 보며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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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각성도 거진 끝냈고, 아마 다음 회부터 시작할 듯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