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86
00885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저예요.”
목소리를 쫓아 눈 돌린 김수현은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마침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은 바람의 움직임에 이끌려 춤추듯 흔들린다. 그에 따라 점점이 흩뿌려진 불씨도 느릿하게 굽이지다가, 몇 개는 여인에게 떨어져 그늘진 달빛을 밝힌다.
의연히 걸어온 한소영은 김수현의 맞은편에 사뿐 앉았다. 그리고 차가운 빛을 발하는, 가느다랗고 매끈한 손가락을 펴 불을 쬐기 시작한다. 앉아도 되냐는 등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로.
실례라면 실례라고 볼 수 있는 태도였지만, 이상하게도 한소영이 그러니 몹시 어울려 보였다. 심지어 김수현조차 말할 기회를 놓치고 한순간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는가.
확실히 경국지색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여인이다. 만으로 스물아홉을 맞이한 한소영의 육체는 한창 원숙한 어른의 내음을 선연히 뿜어낸다. 선선한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오는 그윽한 색향은, 가슴 속 깊숙이 짓누른 욕정에 불을 지를 만큼 치명적이다.
게다가 긴 다리나 보기 좋게 살집 오른 허벅지가 농익은 색기를 뽐내는데, 사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김수현이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한소영도 알고 있다. 아니, 느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상시 발동하는 초감각은 탄탄한 허벅지에 꽂힌 시선은 물론, 눈초리에 담긴 음탕한 욕정도 모조리 잡아내 전달한다.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한 원초적인 욕망. 원래대로라면 치 떨리게 싫어했을 감정일 터였다.
‘관심은 있어 보이는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소영은 안도하고 있었다.
원래 여인의 심리라는 게 참으로 오묘하다.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싫어하는 사람은 예쁜 짓을 해도 삐뚜름하게 생각한다.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일 경우, 눈앞에서 미운 짓을 해도 미소 짓고 응시한다. 아마 한소영도 이와 같은 사례가 아니려나.
한소영은 턱을 괸 채 후자에 해당하는 상대를 구경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김수현이 헤어나올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시선을 양 허벅지 사이 깊숙한 곳으로 차츰차츰 옮기는 중이었다.
한소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M자로 돼 있던 가랑이를 순간 좌우로 활짝 벌렸다. 검은 레이스로 장식된 지 스트링(G String) 속옷이 보일 정도로.
“푸!”
불시에 공격받은 김수현은 힘차게 기침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한껏 당황해 하며 상대를 응시한다.
그러나 한소영은 여전히 두 다리를 대담하게 벌리고 있었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이 흡사 ‘그렇게 보고 싶었니? 그럼 어디 한 번 네 마음대로 봐!’ 라고 엄히 꾸짖는 듯하다.
“아, 아, 아, 안녕하세요.”
김수현은 가까스로 인사를 건넸다. 기실 한참 늦은 인사였으나 한소영은 차분히 무릎을 모으며 끄덕였다.
“네.”
“여기는 어쩐 일로….”
“보고 싶어서요.”
“예?”
김수현이 반문한 순간 한소영이 눈이 실쭉해졌다. 가장 싫어하는,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하는 버릇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 예. 아니, 들었습니다.”
실수를 인지한 김수현은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이미 페이스는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저 눈만 깜빡이더니 멍청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행군 속도 문제 때문이십니까?”
“후우우우….”
한소영은 얼굴을 감싸며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흡사 너 들으라는 듯한 세찬 숨소리에 김수현은 난처한 얼굴로 눈치만 살핀다.
“때리고 싶어….”
“예?”
“못 들은 척하지 마. 이 멍청이.”
“예, 예?”
“아니, 됐어요.”
“…….”
결국에는 한소영이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전혀 이겼다는 기분은커녕 어색이 볼만 긁을 뿐이었다. 두 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묵했다.
모닥불이 탁탁 튀기는 동안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정적은 한소영의 분노를 서서히 사그라트렸고, 김수현을 진정하게 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한소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출발 때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요.”
“……?”
“왜 그렇게 불안해하시는 거예요?”
“불안해…. 한다고요?”
김수현은 갸웃했다. ‘왜 이렇게 행군 속도가 빠르냐.’ 와는 궤가 다른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불안해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글쎄요. 긴장이라면 몰라도, 불안은….”
“원래 긴장과 불안은 한 끗 차이죠.”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마음을 졸이고 정신을 바짝 차리느냐. 아니면 확신하지 못하고 조마조마해 하느냐.”
그렇게 말한 한소영은 김수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느끼기에는, 머셔너리 로드는 긴장이 아니라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기실 긴장이든 불안이든,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김수현은 한소영의 말을 흘려 듣지 않았다. 왜냐면 넘겨짚어 말하는 게 아닌, 초감각을 바탕으로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 사태는 복잡한 것 같아 보여도 사실만 놓고 보면 간단하죠. 남 대륙이 천사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동 대륙이 위기에 처했다. 북 대륙은 구원한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한소영치고는 드물게도 말이 길다.
“이 단순한 사실 관계에서 머셔너리 로드가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시는지.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게 있는 건 아닌지.”
어느새 김수현의 얼굴빛은 완전히 담담해졌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것이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하다.
잘 생각해보면 처음 선율이 그랬듯 한소영이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천사가 직접 나서 설득하기는 했으나 사실대로 밝히지 못한 사정도 있을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했다손 쳐도, 북 대륙 사용자 중 한 명이 그 간극을 못 알아챘을까.
한소영은 할 말은 전부 했다는 듯 무릎에 턱을 살짝 묻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상대가 계속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김수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말을 꺼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고.
잠시 후, 김수현은 빙긋 웃으며 눈을 떴다.
“아마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한소영은 두 눈을 살며시 치떴다. 김수현은 한소영의 예상을 인정했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지만 지금 전부 말씀드리는 건 좀 그러네요.”
김수현이 머리를 가로젓는다.
“그래요. 아직은….”
망설이는 듯 말을 흐리더니 천천히 턱을 젖힌다. 반쯤 감긴 두 눈이 칠흑 일색의 밤하늘을 공허하게 응시한다. 왜인지 그 모습은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뜻 모를 위화감도 느껴졌다.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나면, 그때는.”
그 순간이었다.
“지금 듣고 싶다면요?”
사용자가 된 이래, 한소영은 처음으로 생각 않고 말을 뱉었다. 아차 한 찰나, 김수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고 있었다.
“음…. 꼭 지금 들어야겠다는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그 말에 한소영은 침묵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현듯 느낀 위화감에 점차 사로잡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도 그랬다. 힘없는 얼굴, 허무하기 그지없는 눈동자. 육체가 아닌, 정신이 지칠 대로 지쳤다는 방증이다.
기실 한소영이 진정으로 궁금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너덜너덜하다 못해, 갈기갈기 찢겨 스러지기 직전인 것 같은 김수현을 끈질기게 지탱해주는 무언가.
굳이 비유해보면, 한소영의 눈에는 김수현이 마치 촛불처럼 보였다. 김수현이라는 촛불은, 현재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다. 보고 있는 이가 눈부실 정도로 환한 불빛을 뿜어낸다.
그러나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타고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이것만큼은 한소영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어떤 근거도 없는 일종의 감에 불과하다. 그냥 아까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까닭 없이 불안했다.
그런 만큼, 이걸 알 수만 있다면.
어쩌면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랬는데….
“없으면,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겠지요? 하하.”
속없이 웃는 김수현을 한소영은 야속하다는 눈길로 응시했다.
왜냐면.
“…….”
이따금 위태롭게 깜빡거리는 것이, 어느 순간 영영 사라져 없어질 것 같았으니까. 꺼지기 직전,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는 촛불처럼.
밤은, 가없이 흘러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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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실 완결에 필요한 복선을 까는 건 맞습니다. 아니, 플래그라고 해야 옳으려나요.
하지만 우로부치 겐이라는 말씀은 좀; 뭔가 싶어 검색해봤는데 보고 식겁했네요. 차라리 나이트 런 같다면 모를까요.(?)
독자 분들께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정말 그렇게 괜찮다 싶은 등장 인물을 자주 죽이나요? ㅜ.ㅠ
아무튼, 아무리 그래도 제가 무차별로 죽이겠나요. 고연주는 저도 애정하는 캐릭터입니다. 고연주가 죽을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