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87
00886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동 대륙 남서 방향의 소 도시는 네 성벽의 길이가 엇비슷한 마름모 형태로 구성돼 있다. 어쨌든 소 도시인 만큼 큰 규모라고 볼 수 없으나, 동 대륙의 발전 상황을 생각하면 ‘나름 튼튼해 보이는 것이 그럭저럭 성 구실은 하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이곳은 시작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대륙이든 홀 플레인에 첫발을 내디딘 사용자가 있을 것이고, 긴 세월 동안 차근차근 세력을 확장해왔다. 말인즉 일종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셈인데, 성에는 유독 오늘따라 긴장된 기조가 팽배해져 있었다.
아직 어스름한 새벽, 서리 낀 성벽 위에는 물경 수백을 헤아리는 그림자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동 대륙 사용자들이다. 천사를 통해 남 대륙 진군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방비에 들어간 것이다.
서쪽 성벽에 서 있는 숫자만 해도 수백 명, 게다가 성벽 아래에는 갑절이 넘는 인원이 대기하는 중이다. 전원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도열해 있는 것이, 흡사 최후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병사와도 같다.
그러나 비장해 보이기는커녕 두려워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왜냐면 대다수가 떨면서 다가오는 공포를 이겨내려 애쓰는 분위기였으니.
그중, 성벽에 몸을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던 사내가 푹 한숨을 흘렸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돋보이는 미남이었다.
“정말 오는 건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사내는 좌우로 목을 꺾으면서도 계속 성벽 너머를 흘끗거렸다. 그리고 옆에서는 흑발을 가지런히 늘어트린 훤칠한 여인이 성벽에 걸터앉은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주변 상황과 대조하면, 약간 특이하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수려한 외모는 둘째치고서 라도, 흰 상의와 소매에 끈을 동여맨 풍성한 붉은 치마는 흡사 무녀를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사용자 대다수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것에 반해, 여인은 홀로 천연한 낯으로 먼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동안 같은 곳을 바라보던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만 내려가지 그래.”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옆을 돌아봤다. 사내는 여전히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잇는다.
“여기는 내가 있을 테니까. 내려가서 워프 게이트나 통제해. 여차하면 도망쳐야 하잖아.”
잠시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차곡차곡 다리를 접더니 성벽 안쪽으로 사뿐 뛰어내렸다. 그러나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천천히 팔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와요.”
고요한 새벽 같은 음성. 여인이 지목한 곳은 하늘과 지평선이 맞닿을 만큼 머나먼 지점이었다. 반사적으로 여인의 손을 따라가던 사내는 순간 눈을 치떴다.
“뭐라고?”
“오고 있어요.”
흡사 뜬구름이라도 잡는 듯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게 거슬린 걸까. 사내는 눈을 찡그리며 앞을 응시했다. 두 손으로 싸늘히 식은 벽돌에 손을 짚더니 유심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딱히 시야에 걸리는 건 없었다. 오직 햇빛을 뿌리며 중천으로 오르는 태양과 따스한 빛을 분사하는 허허벌판만이 들어올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하나 이상한 건 있었다. 기연가미연가하기는 했으나 아주 작은 흙 연기가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주시하던 사내는 결국에는 갸웃했다. 여인은 천천히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죽음…. 네, 죽음이 오고 있네요.”
“아키노. 네 클래스는 알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좀 더 정확히 말해주지 않겠어?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결국에는 참지 못했는지 강한 불만을 쏟아냈으나, 여인, 아니 아키노는 변함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언짢은 얼굴로 입맛만 다시더니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바람치고는 거센 소리가 순간적으로 성을 한 바퀴 휩쓸었고, 청명하던 하늘이 돌연히 먹구름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하늘이 어두워지는 건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성벽에 서 있던 사용자들을 당황케 하는 데는 충분한 속도였다. 웅성거림은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가 성 전체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음 순간,
끄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찢겨 울리는 거대한 포효 소리가 사용자들의 고막을 세차게 때렸다.
아니. 실제로 하늘이 찢어지고 있었다. 몰려든 먹구름은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듯 쩍 갈라졌고, 벌어진 구름 사이로 시커먼 구체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흡사 태양조차 삼킬 듯한 거대한 크기였다.
그뿐일까. 볼수록 빨려 들어갈 듯한 기이한 뭉클거림과, 온몸을 짓눌러 압박하는 악의 가득한 기운….
이윽고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검은 구체는 점차 가속하며 하강하기 시작한다. 꼭 이대로 성을 부숴버리겠다는 것처럼.
“으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악!”
무시무시한 기운을 이기지 못했는지 결국 어디선가 비명이 터졌다. 하기야 이제 갓 대 도시를 공략한 수준인데 어디서 이런 공격을 본 적이나 있을까. 그러니 처음 보는 광경에 겁에 질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사용자들은 자연스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즈음, 검은 구체는 이미 충분한 속력이 붙은 상태였다.
“흩어져어어어!”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눈앞에 두고 사내는 절규하듯이 외쳤다.
그러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미 구체는 살벌한 연기를 푹푹 뿜으며 성벽으로 떨어지는 중이었고, 사용자들은 살이 터질 듯한 압력 때문에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포탄처럼 강하하는 구체를 그늘진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을 뿐.
잠시 후.
번쩍!
무언가 크게 폭발하는 소리와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
해가 살금살금 올라가 동쪽 하늘이 훤히 밝아올 무렵, 우리는 밤을 새우고 행군한 성과를 맞이할 수 있었다. 끝없던 초원과 질척했던 늪지대, 그리고 임한나 가슴 같은(허준영의 말에 따르면.) 굴곡진 언덕 지대를 벗어난 지도 어언 삼 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장장 오 주 동안 직진에 직진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눈앞에 메마른 황야가 펼쳐졌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몇 번을 자랑해도 부족할 정도다. 보통 팔 주는 걸린다는 대륙 횡단을 거의 절반 가깝게 줄인 셈이니. 물론 그만한 대가를 치르기는 했다만.
아무튼, 황야로 돌입하자 확실히 달라졌다. 단순히 풍경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늪지대까지 미개척 지역을 공략하는 느낌이었다면, 임한나 가슴부터는, 아니 언덕 지대부터는 흔적을 드문드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메마른 황야는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완연히 드러나 있었다. 한 마디로 도시에 가까워졌다는 방증이다. 어쩌면 인근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 뒤를 돌아봤다가 나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터벅터벅 쫓아오는 클랜원들의 모습이 좀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퀭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였다. 워낙 행렬이 길어 자세히 볼 수 없지만, 구원군 전체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기야 밤새도록 달렸으니 피곤할 법도 하다. 심지어 신재룡은 졸음 행군(?)을 하면서도 용케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품에 안겨 있는 차희영은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자고 있었으니.
원래는 도시를 발견하고 안에서 휴식하려 했지만, 잠시 쉬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이 찢어지라 하품하는 안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지. 여기서 한 시간 휴식하겠습니다.”
다들 고생한 만큼 아예 대 휴식을 하기로 했다. 그러자 클랜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멈춰 섰다. 이어서 마법사와 사제를 안고 있던 근접 계열들이 한꺼번에 손을 놓는다.
쿵쿵쿵쿵.
악악악악.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와 작은 비명이 연달아 들린다. 마치 인간 도미노를 보는 것 같군.
잠시 후, 근접 계열들은 벌렁 드러누우며 다 죽어가는 침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나를 원망하는 소리가 섞여 들렸으나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마법사는 통신 수정을 꺼내 중군과 후군에 상황을 전파하고, 사제는 눈을 비비며 가방에서 생수와 씹을 거리를 꺼내 나눠준다.
그나마 체력을 보존한 궁수는 주변을 경계하거나 지형을 살피러 쏜살같이 흩어졌다. 삼십오일 내내 같은 상황을 겪어온 만큼, 이제 다들 알아서 움직인다.
나는 적당한 곳에 앉고 안솔이 가져다준 마른 고기를 씹고 생수를 들이켰다. 바싹 마른 몸에 시원한 액체가 스미니 정신이 한층 맑아진다.
“크하아아!”
“사, 살 것 같아.”
그렇게나 힘들었던 걸까. 게걸스레 물을 마신 진수현이 괴성을 토하고, 이유정은 캑캑거리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짓는다.
안현은 힘없이 앉아 있었다. 어깨를 늘어트린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혹시 죽은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형.”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그것이 안현이라는걸 깨달은 건 약 이 초가 지난 후였다. 나를 보지도 않고 낮게 말하니 바로 알 턱이 있나.
“이 행군 언제 끝나요?”
“곧.”
“그 곧 이라는 말, 몇 번 더 들어야 해요?”
“거짓말 아닌데. 너도 오면서 봤을 거 아니냐. 주변 보면 모르겠어?”
그러자 안현은 머리를 번쩍 들었고, 나는 절반쯤 남은 수통을 휙 던져줬다. 놀랍게도 안현은 입으로 정확히 받아내더니 그대로 턱을 젖혀 꿀꺽꿀꺽 들이켰다. 주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이윽고 병나발을 불던 안현은 수통을 퉤 뱉으며 말을 이었다. 시꺼멓게 죽어 있던 눈이 미세하게나마 생기가 돈다.
“후우우우. 그럼 이제 진짜로 도착하는 거예요?”
“아마도?”
“…어? 잠시만요. 그럼 설마 도착하자마자 전쟁을.”
“그건 아니야.”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나는 싱겁게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해봐. 우리는 동남 도시 다나에서 출발했지. 그럼 동 대륙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어디일까?”
그리고 인근을 돌아보니 안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진수현은 멍하니 먼 산을 보고 있었고.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정은 몹시 정색하고 있었다.
…전혀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 설마 정신이 나간 건가?
조금 슬퍼질 무렵, 신재룡이 쓰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동북쪽 도시겠지요.”
“그렇죠. 그럼 남 대륙은?”
신재룡은 차분히 턱을 쓰다듬더니 약간 아리송해 하며 말을 이었다.
“글쎄요. 이건 몇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겠지만, 그네들은 아마 남서쪽 도시로 가는 게 최단 거리로 생각됩니다만.”
신재룡의 추측은 내 생각과 일치했다. 아니. 사실 누구나 예측 가능한 사안이다. 그런데, 너희는 왜 아직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늦어도 내일부터는 행군 속도를 정상화할 거야. 휴식도 충분히 취할 거고. 운이 좋아 도시를 빠르게 발견하면 하루 정도 푹 쉴 수 있을지도 몰라. 동 대륙도 우리가 구원하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적어도 박대하지는 않겠지.”
결국에는 딱 수준에 맞는 설명을 해주고 말았다. 효과는 확실했다. 유체 이탈을 시전하던 세 명의 안색이 순간 살아났으니까.
“형님! 정말이죠? 곧 도시에 도착할 수 있는 거죠?”
“만일 거짓말이시면 마르는 제가 데려갈 겁니다.”
안현은 마른 고기를 쭉 찢으며 낄낄거렸다. 저 대꾸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에 대답해주는 대신, 나는 스리슬쩍 옆을 흘끗거렸다. 그곳에는 수통을 들고 오던 차희영이 충격받은 얼굴로 멈춰서 있었다.
다시 앞으로 눈을 돌렸을 때, 안현은 이미 소리 없이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소곳이 웃은 차희영은 한 손을 뺨에 댄 채 성큼성큼 쫓아가기 시작한다.
곧 사방을 떠르르 울릴 안현의 비명을 기대하며 나는 연초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때 등 뒤로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선유운의 외침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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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앞에서 담배 물고 꾸벅꾸벅하다가, 갑자기 불씨 섞인 재가 가슴에 떨어져 낭패를…. ㅜ.ㅠ
그것도 하필 나시 안으로 쏙 들어가서 살갗이 데이다 못해 까졌네요.
보니까 명치 위쪽에 발그스름하게 얼룩도 졌는데, 쓰라려 죽겠습니다.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