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91
00890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메모리아 스톤을 장착한 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기다리는 것.
물론 그냥 가만히 앉아 놀고 있는 건 아니고 대기라는 표현이 옳으려나.
내 예상이 맞는다면 동 대륙은 최소한 도시 하나쯤은 지켜냈을 것이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연합군을 기다리며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일 수도, 아니면 함락 직전일지도 모른다. 아마 후자의 상황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지마는.
어쨌든, 그럼 포탈이 열리는 순간 얼마나 빠르고 신속하게 넘어가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아무리 압축하고 껴 넣어도, 워프 게이트로 한 번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은 서른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수를 늘릴 수 없는 이상, 결국 스무 명 단위로 병력을 편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군을 새로 편성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편성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려 앉았을 때, 도시는 이미 석양의 황혼에 물들어 사방으로 붉은빛을 반사한다.
워프 게이트 연결은 한참 전에 맞춰놨으나 아직 작동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바심내지 않으려 애쓰며 느릿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내가 앉은 곳은 일 열의 중앙. 열 클랜 중 머셔너리는 선두로 들어가는 임무를 맡았다. 기실 굉장히 위험한 자리였으나 클랜원들의 얼굴빛은 담담함 그 자체였다.
아니. 구원군 전체가 조용하다. 간간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만 들려올 뿐, 차분하고 침착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아마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물론 죽고 죽이는 전쟁을 앞두고 일말의 두려움이 없겠느냐마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갈무리할 줄 안다는 소리다.
천천히 한 명씩 둘러보고 있자 문득 한 여인이 눈에 밟혔다. 좀 전까지 니뮤에와 옥신각신하던 마르는, 고개 젖혀 붉게 저물어가는 노을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는다. 왜인지 그 모습이 애달프다고 느껴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두렵니?”
마르는 반짝 눈을 떴다. 이윽고 선한 눈동자 한 쌍이 나를 응시하더니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아니요. 아빠. 오히려….”
“…….”
“익숙한걸요.”
“…그래?”
기실 어폐가 있는 말이었으나 왜 익숙하다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날개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하기야 전대 여왕이었던 마르가리타는 세상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라는데, 이까짓 전쟁쯤 수없이 겪었겠지. 한데 이 상황에서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로 짐이 되지 않을게요.”
계속 쳐다보고 있자, 마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배시시 웃는다. 순간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그냥 한 번 끄덕이고 앞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파츳!
정적이 흐르는 와중, 갑자기 전기 오르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파츠츠츳, 파츠츠츳!
바로 앞을 쳐다보자, 놀랍게도 워프 게이트 제단 위의 허공이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이어서 바다 빛이 미세하게나마 드문드문 새어 나오더니, 돌연 소용돌이처럼 중심을 향해 나선을 그리며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수현!”
“클랜 로드!”
그래. 왔다.
“전원.”
나는 반사적으로 말하며 땅을 짚은 두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나직이 말했다.
“전투 준비.”
*
남 대륙이 동 대륙 대 도시로 진군한 것은 성벽이 무너진 이후였다. 엘도라는 오딘 휘하의 중앙군은 네 성문을 점거하는 데 집중하고, 녹스와 카르페디엠 클랜은 시가지 전투를 치르라 지시했다.
기실 홀 플레인의 공성전은 현대와 판이한 양상으로 흐른다. 굳이 공성 무기를 제작 및 동원할 필요가 없는 것이, 마법사가 공성 병기 역할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수천 명이 일거에 내뿜는 화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니까.
화력을 집중해 성벽을 무너트리고, 그곳으로 침입해 도시를 함락한다. 이것이 바로 남 대륙이 동 대륙을 상대로 고수해온 공성전이었다.
물론 상대의 마법사 전력이 비슷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아쉽게도 두 대륙의 전력 차이는 상당하다. 게다가 첫 도시가 허무하게 함락당한 이후, 하늘과 땅만치 벌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말인즉 현 상황에 이르러서는 남 대륙이 닥치고 돌격했어도 손쉽게 함락했을 것이다. 단지 소 도시라면 모를까. 대 도시의 성벽은 마냥 만만하지는 않은 터라,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을 뿐.
아무튼, 쉴 틈 없이 마법을 쏟아 부었으니 상대는 분명 심각한 손해를 입었을 터. 승리는 눈앞에 있다. 엘도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화르르륵!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시뻘건 염화가 춤추듯 꿈틀거리며 시커먼 연기를 뭉게뭉게 토해냈다. 사방에서 이글거리는 열기를 느끼며 반 백발의 사내, 카르페디엠 로드는 휙 휘파람을 불었다.
사실 성벽이 무너졌을 때만 해도 카르페디엠 로드는 일부러 늦장을 부렸다. 처음에는 동 대륙이 최후의 보루로 선택한 도시인 만큼 나름 치열한 전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의 저항은 생각보다 미미했고, 성벽은 보는 이가 허탈하리만치 쉽게 무너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우선 녹스 클랜을 들여보내고 천천히 상황을 볼 생각이었다. 상대가 가미카제를 불사하는 함정을 준비했을 수도 있으니까.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늘그막이 성으로 들어간 카르페디엠 로드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상대는 최후의 저항은커녕, 오히려 도망치는 데 급급했다.
게다가 시선이 닿는 곳마다 폭사 된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터라, 짧은 시간에 상황을 이해하고 의심을 깨끗이 지웠다. 앞서 들어간 녹스와 휘하 클랜이 신명 나게 날뛰고 있는 이상, 상황은 종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 클랜 로드.”
그때 옆에서 따라 걷고 있던 사내가 안달 난 목소리로 말하며 침을 삼켰다. 카르페디엠 로드는 싱겁게 웃었다. 이래서야 일부러 꾸물거렸던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왜냐면 자신도 그렇거니와, 부하들이 뭘 원하는지 아주, 매우 잘 알고 있으니까.
“뭘 물어봐?”
킬킬거리며 웃자, 부하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다. 혹시 자살 공격이라도 해오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건만, 시가지 전투는 무슨, 원초적인 축제를 즐길 일만 남았으니.
“오딘은 성문을 지킨다고 하니 눈치 볼 필요도 없잖아? 오늘이 마지막 전투인 만큼, 섭섭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잖아?”
카르페디엠 로드는 흡사 마에스트로라도 된 듯이 양팔을 쫙 펼쳤다. 그러자 등 뒤로 시끄러운 웃음과 환호가 터졌다. 그 호응에 응답해 사내는 목이 터지라 외쳤다.
“자, 가라! 마음대로,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고!”
오오오오!
카르페디엠과 휘하 클랜들은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노도와 같이 시가지 사이로 달렸다. 잠시 후, 끊임없이 이어지던 비명이 한층 커지기 시작했다.
원래 전쟁이라는 상황은 선량한 사용자라도 쉽게 타성에 젖게 만든다. 거기다 애초 선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의 구현을 꿈꾸는 카르페디엠 클랜원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압도적으로 승리해오며 상대를 복종시키는 즐거움을 알게 된 이상, 남은 일은 하나였다.
녹스와 카르페디엠의 깃발 아래, 침략자 입장에 선 자들은 신 나게 날뛰었다. 약탈, 방화, 강도, 살인 등등. 상대가 도망치든 저항하든 항복하든 가리지 않고 행동한다. 그 결과 도시는 순식간에 비명과 절규로 가득 찼다. 성내는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뿐일까.
“아, 안 돼! 시, 싫어!”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한 무리가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가기까지 했다. 강간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선발대에 불과한 만큼, 시가지 한복판에서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전쟁의 열기에 취할 대로 취했는데 거리낌이 있으랴. 이내 으슥한 곳을 찾아낸 무리는 여인을 내동댕이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히야, 앙탈이 좀 심한데? 역시 사무라이 소녀라서 그런가? 키히히히!”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뭐라는 거지? 가만히 좀 있어보라니까? AV 찍어주겠다는데 왜 반항이야?”
“하, 하지 마! 아악!”
두 사내가 억지로 가랑이를 잡아 벌리자, 거칠게 반항하던 여인이 돌연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한 사내가 있는 힘껏 허리를 들이박았기 때문이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인은 얼굴을 가리며 구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끔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용자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혀를 쯧쯧 차며 다른 곳으로 이동할 뿐.
“음! 이게 바로 전쟁이지.”
그때, 흐뭇하게 웃으며 구경하고 있던 침략자의 눈에 돌연 이채가 스쳤다. 방금 시작한 곳이 아닌 다른 능욕의 현장에서, 웬 거한이 동성을 상대로 한창 허리를 흔드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것도 혼자서.
“허? 녹스 로드!”
헛웃음을 터뜨리며 부르자 녹스 로드의 허리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러자 아래 깔려 덩달아 펄떡거리던 앳된 사내도 격한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이미 체념한 듯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잔뜩 흐려진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한동안 두 클랜 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일까. 녹스 로드는 무안해하는 얼굴로 살금살금 몸을 일으켰지만, 카르페디엠 로드는 괜찮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리고 엄지를 척 들었다. 그러자 눈을 끔뻑거리던 녹스 로드도 음험하게 웃더니, 자신의 흉한 양물을 허리 높여 척 치켜세웠다.
“미친놈.”
피식 웃은 카르페디엠 로드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인근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반주 삼아, 지휘자처럼 손을 휘저으며 시가지를 거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호?”
광장으로 들어선 순간 낄낄거리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냐면 이제 막 가동을 시작한 워프 게이트의 주변에 동 대륙 사용자가 상당수 모여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군도 이미 넓고 둥글게 퍼져 광장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다. 카르페디엠 로드는 킥킥 웃었다.
“이것도 좋지~. 그래도 저항은 좀 해줘야지 재밌잖아?”
또한, 설령 워프 게이트를 가동하더라도 도망칠 곳은 없다.
“그나저나 소용없을 텐데? 그놈들이 이미 전 도시를…. 응?”
느물거리며 앞으로 나서려던 찰나, 카르페디엠 로드는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파츠츠츳, 파츠츠츳!
어른어른 모여들던 푸른 빛무리가 중앙부터 쩍 퍼져나가더니, 커다란 타원형의 포탈을 생성한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동 대륙 사용자들이 태도였다. 포탈이 생성됐음에도 앞다투어 도망치지 않고, 원형 방진을 구성해 경계하고 있다.
그 순간이었다.
“뭐, 뭐야?”
미처 의문을 풀기도 전.
화아아아아아아악!
포탈이 눈부실 정도의 밝은 빛을 뿜었다. 그리고 그 빛 너머로 어스름한 그림자가 너울너울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나긴 거리를 뛰어넘어, 마침내 이 전장의 한복판에 누군가가 도착한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시꺼먼 칠흑색 갑옷과 붉은 망토를 걸친 건장한 청년이었다. 포탈을 쑥 뚫고 나오자마자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다.
뚜벅…. 뚜벅….
이어서 울리는 뚜렷한 발소리.
갑자기 난입한 누군가를 향해 도처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흠….”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무관심 일색이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두어 번 끄덕이고 천천히 걷는다. 사방팔방 창칼이 번뜩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기 그지없는 걸음걸이였다.
“뭐, 뭐…!”
무어라 외치려던 카르페디엠 로드는 불현듯 입을 쩍 벌렸다.
놀란 이유는 세 가지.
첫 번째는 왜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청년이 걸어가는 방향에 서 있던 아군이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발이 슬슬 뒷걸음질 치고 있었으니까.
============================ 작품 후기 ============================
김수현이 장비한 치우천왕의 갑옷에는 군중 제어 효과 중 하나인 공포가 있지요. 그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어제 학교에 가시거나 출근하신 분들이 상당히 많군요!
하하. 독자 님들. 어제 후기는 농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조크에 불과했어요. 에이, 제가 설마 정말 그런 기도를 했겠나요.
우리 모두 서로 놀리는 것 없이, 친하게 지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