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01
00900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Three. =========================================================================
두두두두두두두두!
세찬 돌풍이 휘몰아쳤다. 지축을 흔드는 진동을 동반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한 무서운 폭풍이었다. 흡사 지나치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듯한 시커먼 소용돌이. 그 중심에 위치한 오벨로 기사 단장이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그러자 하늘을 떠르르 울리는 함성이 호응하듯 터진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기세였다. 아니, 한층 흉포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득한 과거, 한 명 한 명이 영웅 반열에 오른 기사 일백 명이 죽자사자 달려들자,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물론 중간중간 거꾸러지는 기사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손해는 남 대륙이 훨씬 막심했다. 오벨로 기사단이 갑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덤벼드니, 교전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지와 핏물이 튀고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수십 명이 쓰러지고 흙먼지를 튀기는 땅에 선혈을 뿌렸다. 결국, 매섭게 돌격해오는 오벨로 기사단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한 남 대륙 사용자들이 가일층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오벨로 기사단의 힘이 놀랍다고는 하나, 원탁의 기사와 휘하 부대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북 대륙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벽서 어마어마한 마법과 화살을 퍼붓더니, 끝내 성문을 열고 나와 난전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이제는 숫제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 부대를 가다듬는 것조차 요원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망연히 서 있던 나탈리는 주먹을 바스러지듯이 쥐었다. 눈치 빠른 그녀는 온몸에 스멀스멀 오르는 불길함에 이를 악물었다. 아차 한 순간, 전장은 순식간에 손 쓸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으나,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탈리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북 대륙 중 자신을 노리는 사용자가 있다는 사실을.
쐑!
“아?”
갑자기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나탈리는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거의 동시에 날카로운 것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가, 잘려나간 머리카락 서너 가닥이 나풀거린다. 놀란 속을 추스르며 눈을 치뜬 나탈리는, 곧 눈살을 도로 찌푸렸다. 왜냐면 바라본 곳에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 있었으니.
“감이 꽤 좋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음성으로 말한 여인은 바로 ‘그림자 여왕’ 고연주였다.
“보아하니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 같고…. 죽이면 수현이 좋아하려나?”
그렇게 말하며 오른팔을 뻗자, 어디선가 날아온 검붉은 검 한 자루가 손에 착 잡혔다. 이윽고 고연주의 두 눈동자가 어둠을 번뜩였다.
키이이잉!
마검 티르빙이 살이 떨려올 만큼 거칠게 울부짖는다. 전신을 압박해오는 무시무시한 마력에 나탈리도 얼른 단검을 뽑고 응전 태세를 취했다. 쉬운 상대가 아닌 것은 직감했지만, 어쨌든 그녀도 ‘수색의 기사’.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물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그 무렵.
“허….”
짧은 탄식을 뱉은 백발의 사내, 라이언 윈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둥근 원형을 그리며 쌓여 있는 시체, 그리고 원 가운데서 긴 생머리를 흩날리는 여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핏빛이 번진 얼음 갑옷을 걸친 여인이 홀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흡사 시체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윈터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차다가, 눈을 빛냈다. 한 손에 얼음 칼을 든 여인이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내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과 마주하자, 코앞을 스치는 냉기 어린 살기에 괜스레 오한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두 남녀는 서로 검을 들어 상대를 겨누었다. 이윽고 사내의 검이 그르렁 울음을 토하는 것이, 백수의 왕 사자와 흡사할 정도로 기세가 맹렬하다. 실제로 ‘사자의 기사’라는 클래스를 가진 윈터스는, 엘도라를 제외하면 원탁의 기사 중 최고로 꼽히는 사용자였다.
하지만 여인도 만만치 않다. 왜냐면 여인 또한 ‘검후’로 불리는, 김수현을 제하고 머셔너리 클랜 중 첫손으로 꼽히는 사용자였으니까.
잠시 후, 계속 보고만 있던 윈터스가 갑자기 상체를 굽히고 질척이는 대지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가 사선으로 크게 베어 내렸다. 언뜻 봐도 무시무시한 힘이 서려 있었으나, 남다은은 가볍게 몸을 틀어, 되려 검을 날카롭게 찌른다.
“!”
그때였다. 검을 거둬 쳐내려던 윈터스는, 갑자기 반대편에서 빛이 번쩍이자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시린 냉기가 가슴을 스쳤다. 분명 공격로는 읽었을 터인데, 두 방향에서 반격이 들어온 것이다. 야수의 감각이 아니었다면 막는 순간 크게 다쳤으리라.
한데,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다.’
서둘러 물러난 윈터스는 고고하게 서 있는 남다은을 노려봤다. 예상치 못한 반격도 그렇지만, 왜인지 무감정한 눈으로 쳐다보는 여인의 자태가 몹시 아름답다고 느꼈다. 단순히 감정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팔다리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알게 모르게 힘이 빠지는 듯한….
‘알 수 없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윈터스의 추측은 정확했다. 현재 남다은이 들고 있는 얼음 칼 프라가라흐(Fragarach)는 앤서러(Answerer), 즉 맞받아치는 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갑옷 또한 상대를 유혹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나마 윈터스 정도 되니까 어느 정도 저항하는 거지, 보통 사용자였으면 초저녁에 힘이 빠져 칼날 앞에 목을 바쳤으리라.
‘젠장, 뭐 이런 괴물들이 있는 거지?’
‘…아무튼, 길게 끌면 불리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윈터스는 신속히 땅을 박찼고, 남다은도 사양하지 않고 검을 어울렸다. 두 개의 칼등이 공중서 사선으로 얽히고, 맑은 철성이 허공을 챙 하니 울렸다. 서로 떨어지는 것도 잠시. 이내 백광과 냉광이 춤추듯 어울리며 허공에 검광을 수놓기 시작한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질수록 두 남녀의 공세는 점차 격렬함을 더해갔다. 윈터스가 짐승처럼 파고들어 강한 일격을 날리면, 남다은은 귀신처럼 피해내며 반격한다. 그럼 윈터스가 다시 반격을 쳐내고 쫓아가는 광경의 연속이다.
하지만 막 삼 분이 지났을 즈음, 차차 손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는 건 윈터스였다. 확실히 검술은 비슷하고, 힘은 윈터스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남다은은 우월한 민첩으로 근력을 앞세운 공격을 흘리는 동시, 가슴 서늘한 카운터를 꼬박꼬박 넣고 있다. 지금이야 야수와 같은 감각으로 받아 치고 있다고는 하나, 시간을 끌수록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명약관화.
결국, 이를 악문 윈터스가 승부를 걸었다. 여태껏 반격을 생각하고 받아칠 힘은 남겨뒀지만, 순간 상대를 세게 밀치는 동시에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리고 적이 균형을 찾기 전, 일거에 마력을 폭발시켜 전방으로 튕기듯 쇄도한다.
크르르릉!
백광을 뿌리는 검이 한 차례 커다란 울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사자가 앞발을 휘두르듯, 갑절로 증폭한 힘을 앞세워 위에서 아래로 가열차게 내려온다. 피하는 건 글렀다 싶었는지, 남다은은 물러나는 와중에도 얼른 검을 눕혀 충격을 대비했다.
카앙!
그러나 불꽃이 튀긴 순간, 고요하던 두 눈이 처음으로 치떠졌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충격. 그리고 받아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상대의 검이 자신을 향해 쭉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치 이대로 두 동강을 내주겠다는 듯이.
찰나의 순간, 맞대어진 칼날이 남다은의 가슴팍까지 근접하자 윈터스는 승리를 직감했다.
우우우웅!
그러나 돌연히 상대의 몸이 신이 한 빛으로 물드는 것과 함께, 윈터스의 검은 톱니에 걸린 것처럼 덜컥 멈췄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여인이 차디찬 미소로 비웃고 있다. 검후의 고유 능력 ‘여왕은 절대로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다.’ 가 발동된 것이다.
남다은은 얼른 승부를 내려는 사내의 속셈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주는 능력을 아끼고 있었다. 더 확실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
이윽고 검을 반대로 밀쳐낸 남다은은, 눈앞에서 칼날을 바로 세워 예리하게 찔렀다. 윈터스는 순간적인 기지로 얼굴을 꼬아 피하며 급한 대로 상대의 다리를 향해 발을 날렸다. 그러나 남다은은 새처럼 날아올라 유려하게 손을 놀리는 동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직절(直切).”
그 순간, 윈터스의 전신으로 망연한 감각이 엄습했다.
감각으로 느낀 공격은 두 개.
좀 전에 뿌린, 정면으로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 하나.
알 수 없는 반격 능력을 이용한, 옆에서 머리를 베어 들어오는 공격 하나.
그러나 세 번째 공격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순간적으로 보랏빛이 번뜩였을 뿐.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정확히는 앞선 두 공격을 걷어냈을 때, 윈터스는 죽음을 직감했다. 왜냐면 어른어른한 희미한 궤적이 허리춤을 스치듯 지나갔으니.
“…….”
잔상이 사라지자마자 기다란 자상이 비스듬히 그어지고,
스칵!
뒤늦은 소리와 함께 핏물이 왈칵 치솟는다.
남다은이 사뿐 발을 디뎠을 때는, 윈터스는 검을 놓치며 털썩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이미 시야가 기우뚱 기울어지며 천천히 흐려져 간다.
힘겹게 숨을 뱉어낸 윈터스의 뇌리로 문득 이안의 경고가 떠올랐다.
‘강해요. 강합니다. 북 대륙은 결코 얕볼 수준이 아닙니다.’
“하하…. 좀 더…. 귀를 기울일 걸 그랬나….”
그 말이 라이언 윈터스의 최후였다. 힘없이 상체를 대지에 눕히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원탁의 기사 중 두 번째 사망자가 나온 순간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아아아악!”
전장의 다른 곳에서 높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개새끼!”
내동댕이쳐진 이유정이 땅을 데구루루 구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대로 눈앞의 거한, 아니 녹스 로드는 가만히 선 채로 비웃듯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유정은 살점이 한 움큼이나 뜯겨나간 왼팔을 짚으며 끙 몸을 일으켰다. 척 봐도 가벼운 부상은 아니지만,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닌 듯 거한의 복부에도 구멍 두 개가 숭숭 뚫려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구멍 난 상처는 스스로 살을 메우더니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마치 트롤이 살을 재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흐으으으…. 킥킥!”
이유정을 굽어 응시하던 녹스 로드는 원숭이처럼 두 팔을 축 늘어트린 채 다가오다가, 무언가 못 참겠다는 듯이 킬킬 웃는다. 발끈한 이유정이 콧김을 푹 뿜으며 돌진하려는 찰나, 갑자기 헉 숨을 들이켰다. 걸음을 디딘 순간, 느닷없이 녹스 로드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코앞으로 솟구쳐 입을 쩍 벌렸기 때문이다.
“미, 미친놈!”
이유정은 욕설을 뱉으며 두 단검을 교차해 그었다. 부욱, 피가 튀기며 녹스 로드의 낯짝에 깊숙한 자상 두 개가 새겨졌다.
그러나 그뿐. 삽시간에 흘러나오는 피가 줄어들더니, 이가 촘촘히 박힌 아가리를 가는 목덜미로 들이민다. 이유정은 서둘러 이형환위를 사용하려 했으나, 마력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애초 성공률이 극히 낮기도 했거니와, 붙잡힌 채로 있자 마음만 앞서는 것이다.
“힉!”
곧 목에 촘촘한 이빨이 닿자, 발버둥 치던 두 다리가 꼿꼿이 세워졌다. 온몸이 딱딱히 굳는 것 같으면서도, 하복부가 심히 아릿해진다. 이내 이대로 물어뜯겠다는 듯 이빨에 힘이 들어가니 악기를 느낀 이유정의 붉은 입술이 일그러진다. 그 순간이었다.
콰악!
“커헉!”
한순간, 콱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녹스 로드가 우당탕 나가떨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아래로 떨어진 이유정은 풀썩 주저앉으며 눈을 돌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옆을 지나치는, 핏물을 뚝뚝 떨구는 통나무 같은 허벅지를 보고 멍한 빛을 보였다. 한 사내가 검은 낫을 어깨에 걸친 채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이유정이 황급히 소리 질렀다.
“조, 조심해! 저놈 재생 능력이 장난 아니야!”
“크르르르!”
그러자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얼굴 절반이 날아간 채 쓰러져 있던 녹스 로드가 벌떡 일어나 으르렁거린다. 하기야 식사 직전 방해를 받았으니 화날 법도 하지만….
“크, 크륵?”
성큼성큼 다가오는 상대를 확인한 순간, 곧바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주춤주춤 물러난다.
“호오, 정말이잖아?”
눈앞에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씩 웃고 있다.
“크하, 머리통을 박살 냈는데도 일어나?”
그것도 온몸이 선혈로 범벅된 채로.
자고로 괴물은 괴물을, 미친놈은 미친놈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크흐흐흐….”
핏물로 떡 진 머리카락은 차치하고서라도, 두 눈은 자신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핏빛 광기를 희번덕거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길한 기운을 뭉클뭉클 뿜어내는 낫이 몸을 절로 움츠러들게 한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수라마창의 주인’ 공찬호가 광소를 터뜨렸다.
============================ 작품 후기 ============================
하하. 어느새 900회에 다다랐네요….
특집을 적을까 하다가, 그냥 평소처럼 진도를 빼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특별히 쉬는 날이 없다면 완결은 한 7, 8월 중에 날 것 같습니다.
미리 축하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 모두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