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32
00931 A Poisoned Chalice, Two. =========================================================================
잠시 후.
간신히 버텼다고 생각한 찰나, 덥석 삼켜질 것만 같던 거대한 기운이 흔적도 없이 증발한 걸 느꼈다. 부단히 귀를 긁던 녹슨 기계 소리도 한순간 사라졌고, 강풍도 멈춰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사뿐 가라앉는다.
방금 일어난 현상이 거짓말처럼 생각될 정도로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장내를 가득 메웠던 광채는, 어느새 빛을 점점이 흩뿌리며 차츰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단지, 시야로 여러 개의 메시지가 출력돼 있을 뿐.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켜고 침착히 눈을 내렸다.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업적!』
『사용자 김수현 외 네 명은 제로 코드(Zero Code)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로 코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차원인 십천(十天)에서 탄생한 신명(神命)입니다. 법역과 수호의 지대, 그리고 약속의 신전을 거쳐 제로 코드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업적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업적입니다.』
『사용자 김수현 외 네 명에게 총 150,000,000 Gold Point를 부여합니다!』
『보상 결과를 수정합니다. 제로 코드를 강제 공략으로 획득한 게 아니라, 자격을 갖추고 정식으로 인정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기존 Gold Point 보상이 열 배로 늘어납니다. 정정된 보상은 1,500,000,000 Gold Point이며, 사용자당 300,000,000 Gold Point가 부여됩니다.』
『사용자 김수현이 ‘정상(頂上)’ 칭호를 획득합니다.(해당 칭호는 특정한 상황이나 조건을 만족하면 발동합니다.)』
메시지를 읽는 도중 억 소리가 나올 뻔했다. 아니, 진짜로 억이다. 총 보상이 일억 오천 GP가 아니라 십오억 GP란다. 개인당 떨어지는 것만 해도 무려 삼억. 일 회차 때 받았던 GP보다 무려 두 배에 달하는 양이다.
1. 이름(Name) : 김수현(5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정상(頂上) 2. 검의 군주(君主) 3. 마성(魔性)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8)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거기다 두 번째로 얻은 정상이라는 칭호까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보다 비로소 실감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오른손을 꾹 거머쥐자 작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천천히 팔을 들고 손을 펴자, 말간 빛을 띤 푸른 구슬 하나가 손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몇 번을 봐도 제로 코드가 확실하다.
그래. 드디어 해냈다.
나는, 고통으로 얼룩졌던 과거를 내 손으로 직접 바꾸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형과 한소영을 죽게 놔두지 않았으며, 이제는….
이제는….
“…….”
이상하다. 왜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혀올까.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하기 싫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나는.
‘하지만 가슴 한 켠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었겠지?’
‘차라리 세라프의 조언을 듣는 게 더 나았을 테니까.’
‘너를 지금껏 지탱해온 단 하나의 뜻이, 신념이, 목적이, 목표가….’
‘모조리 무너져버릴 테니까.’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지?
바라 마지않던 일을 해냈음에도 왜 기쁘지 않은 거야?
그때였다.
“아?”
찰나의 순간, 시야가 느닷없이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위험해요!”
누군가가 내 등을 받치더니 팔을 붙잡는다.
언뜻 정신이 드니 천장이 보였다. 돌연히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했던 것 같다.
“괜찮아요?”
고연주가 눈을 살짝 내리뜬 채 그늘진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긴 한숨과 함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손에 쥔 걸 다시금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로 코드는 예의 말간 푸른빛을 은은히 흘리는 중이다. 꼭 이대로 빨려 들어가버리고 싶을 만큼 아주 아름답다.
그 순간 또다시 나를 확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수현!”
“예, 예?”
깜짝 놀라 눈을 들자, 고연주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네?”
“왜 이래요. 제가 뭘 어쨌길래.”
“아니…. 눈빛도 죽은 사람 같고…. 꼭 당장에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제가 말입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순간적으로 맥이 풀리기는 했지만, 몸에 별 이상은 없는데.
그러나 고연주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숫제 눈까지 그렁그렁해졌다. 비단 고연주뿐만이 아니라 한소영의 낯빛도 한 줄기 수심이 서렸고, 남다은과 마르도 근심하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망연한 기분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화정. 방금 내가 진짜로 그랬어?’
– …….
‘화정?’
– …조금 이상하기는 했어. 정신 차…! 아니, 아니야. 아무튼, 속 좀 추슬러봐.
조금이라. 마지못해서 말한 것처럼 느꼈다면 착각이려나.
아니, 화정의 말대로다. 일단 이곳에서 서둘러 나가는 게 좋겠다. 이렇게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니까. 목적은 달성했고, 갑자기 사라졌으니 밖에서 많은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고민은 돌아가고 난 후에 하자.
정신을 차리려는 요량으로 뺨을 세게 쳤다. 곧바로 제로 코드를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나갑시다. 돌아갑시다.”
그렇게 방을 나서기 직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봤다.
안은 여전했다. 오직 시퍼런 화롯불만이 쓸쓸히 장내를 밝히고 있었다.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애증이라고 해야 할까.
모르겠다.
단지 확실한 건 하나.
이제 여기로 돌아올 일은,
“…….”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
약속의 신전을 나온 후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면, 다름 아닌 네 지대의 행방이었다. 성스러운 지대로 돌아가자마자 빛무리들이 다가와 아까처럼 우리를 안내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못 궁금해졌다. 일 회차 때는 한 놈도 남김없이 처리했으니 비교할 수 없고.
해답은 화정이 알려줬다.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내가 제로 코드로 법역을 해제하는 즉시 사라진단다. 물론 약속의 신전은 물론, 최후의 관문이나 고대 유적은 계속 남겠지만, 수호자는 ‘제로 코드를 지킨다.’ 는 명분이 없어진 이상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고.
만약 가능하다면 아군으로 동원할 계획을 세웠던 나로서는 못내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니 깨끗이 포기하기는 수밖에.
그렇게 아까처럼 안내받으며 돌아가는 와중,
“으으. 정말 보면 볼수록 아쉽다. 마르야. 얘네 데려가고 싶지 않아? 키울 맛도 있을 것 같아.”
“네.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같이 지내보고 싶어요. 그런데 다은이 언니는 칼이니까,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네 여인은 기웃거리는 수호자와 놀거나,
“흠. GP를 삼억이나 받아본 건 처음이네요. 사실 아직도 얼떨떨해요.”
“저도 삼억은 처음이지만,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네요.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모르시겠지만, 저희 클랜에서는 이런 걸 보고 김수현 효과라고 부르죠.”
보상 메시지를 보고 감탄하는 등등 돌아가는 내내 수선을 떨었다. 심지어 한소영도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그러나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다.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참고 있다는 걸. 그리고 정말 즐거워서 떠드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일부러 저러고 있다는 사실을.
기실 스스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하여 가끔 맞장구도 치고 웃기도 했으나, 그럴수록 분위기는 외려 어색해졌다. 특히 한소영은 걱정하는 빛이 심히 짙어지기까지 했다. 아마 초감각으로 내 감정 상태를 알아차린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입 닫고 있기로 했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지대, 철혈의 지대, 칼의 지대를 거쳐 첫 번째 그림자 지대로. 우리는 진입할 때와 비슷한 시간을 들여 처음 들어왔던 지점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그래그래….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들어온 지 몇 시간이나 지났죠?”
그때 그림자 거인과 작별을 나누던 고연주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마 일고여덟 시간쯤 됐을 거예요. 생각보다 오래 있었죠.”
한소영이 어림잡아 말했지만, 거의 정확하다.
가는데 약 세 시간. 약속의 신전에서 한 시간 삼십 분. 돌아오는데 세 시간. 즉 대강 일곱 시간 삼십 분쯤 지났을 터. 확실히 짧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이다. (물론 일 회차와는 비교조차도 되지 않지만 말이다.) 워낙 신기한 현상을 겪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하튼 이제 남은 건 하나. 제로 코드로 법역을 해제하고, 나가자마자 워프 게이트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난다. 십오 년의 홀 플레인 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생각이지만…. 참 길기도 길었다.
나는 손을 더듬어 보이지 않는 막을 찾았고, 법역 앞에 선 후 품에서 작고 푸른 구슬을 꺼내 들었다.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머릿속은 이상하게 멍하다.
“그럼….”
잠시 후, 제로 코드를 쥔 손을 천천히 막과 맞붙였다.
그러나.
“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법역이 해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반응이 전혀 없다. 혹시 몰라 제로 코드를 이리저리 굴려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라? 설마 이대로 쭉 갇히는 게…?”
아직은 여유로운지 고연주가 너스레 떠는 소리가 들렸고, 남다은이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래도 좋을 것 같은데. 신전을 왕국으로 삼고 다섯이서 오순도순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외로워지면 오빠랑 애 낳으면 되고.”
“다은이 너. 입 조심해. 마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왜요? 어차피 형식상으로만 부녀지간이니까 근친은 아니잖아요.”
“네, 네에에에? 제, 제가 아빠랑요?”
마르야. 왜 그렇게 놀라는 거니. 저런 말은 신경 쓸 가치도…. 아니. 얼굴 붉히지 말라고. 누구를 짐승으로 만들려고.
“일단 좀 더 기다려보죠. 이 막의 크기가 있으니 해제에 시간이 걸리는 걸지도 몰라요.”
그나마 한소영이 가장 정상적이고 현실적인 말을 하는구나. 덕분에 곤란한 상황도 벗어났다.
눈빛으로라도 감사를 표하기 위해, 나는 막에 손을 댄 채로 한소영을 돌아봤다.
그 순간이었다.
“……?”
문득 매캐한 연기가 코를 훅 찔러오는 것과 동시에,
화르르르, 화르르르!
앞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물씬 흘러들었다.
============================ 작품 후기 ============================
이제 에피소드 2도 4, 5화 안으로 정리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