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35
00934 A Poisoned Chalice, Two. =========================================================================
그 무렵.
한창 전황을 조율하던 에르윈은 갑자기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황급히 눈을 돌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번쩍!
어마어마한 굉음이 귀를 찌름과 함께 초신성 폭발처럼 터져 나온 빛무리가 온 전장을 환하게 밝혔다.
“!”
먼발치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의 여파는 바람을 타고 번져서 에르윈이 있는 곳까지 와르르 들이닥쳤다. 머리카락이 뜨거운 바람에 펄펄 흩날리는 가운데, 에르윈은 약간 찡그린 눈으로 먼빛을 주시했다. 그리고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호오.”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는, 공중에서 막 하강한 김수현이 성난 사자처럼 무차별로 칼을 휘두르며 덮쳐들어 가는 중이었다.
“이제야 나온 건가?”
칼끝에서 터진 불꽃이 전방으로 시원스레 뻗어 나가자, 예닐곱 명이 한꺼번에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땅에 채 닿기도 전에 순백의 칼이 눈 부신 빛을 터뜨리더니, 검의 형상을 한 빛무리가 시끄러운 철성과 함께 나타나 사방을 난무한다. 그러자 다음 순간 아홉 명이 동시에 균형을 잃으며 핏물을 뿜는다.
멍하니 보고 있던 에르윈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가는 팔뚝을 몇 번이나 쓸었다.
오직 검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팔꿈치로 강하게 후리거나 발로 차버리는 등, 상대는 온몸으로 포위망을 종횡무진 휘젓는 중이다. 흡사 작은 연못에 휘몰아치는 강대한 폭풍을 보면 이럴까.
‘이래서야…. 어째서 셋이나 당했는지 알만하군.’
김수현의 무력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 아니 두 번째던가.
예전에 안배가 족족 어그러졌을 때는 의문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용의 잠든 산맥을 평정하고, 쿠샨 토르를 이겨냈으며, 또 게헨나와 고대 악신 그리고 아스트랄 차원에서 살아 돌아왔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헤~. 무지 화났나 보네.”
그때, 언제 왔는지 타나토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탄성을 흘렸고,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첫 기습 때만 해도 가장 앞장서서 신 나게 뛰놀더니 이제 싫증이 나버린 모양이다.
하기야 한낱 유희라면 모를까, 한때 죽음의 신이라고 추앙받았던 타나토스가 고작 이 정도 전장에 구미가 당기겠는가. 그나마 유일하게 흥미가 동하는 게 있다면, 저기 멀리서 날뛰고 있는 사내뿐.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같은 방향을 구경했다. 깨질 듯 말 듯 위태롭던 머셔너리 무리는, 김수현이 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가만히 보고 있던 타나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조금 무리하는 것 같기도?”
“무리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내내 전력으로 싸우는 중이죠. 뭐, 그게 그거이기는 하지만요.”
그러자 타나토스는 수긍하는 기색으로 끄덕거리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 빛냈다.
“저 상태가 영영 계속될 것 같지는 않은데…. 어때? 지금 들이치는 건?”
타나토스의 말은 구구절절 옳다. 상대 쪽에서 최고 전력이 나왔다면, 이쪽도 최고 전력으로 대응해야 응당 옳은 일일 터. 가만히 놔둔다면 피해는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아니요.”
하지만 뜻밖에도 에르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전쟁은 이겼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전장은 어느새 서서히 끝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으며, 아무리 개인이 강하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단지 에르윈에게 있어서 전쟁의 승패는 아무 의미도 없을 뿐.
중요한 건 오직 하나였으니까.
“법역은 해제됐고, 왕이 돌아왔으니….”
“아 귀찮아. 또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자고?”
“좀 더 기다려야 해요. 힘이 빠지는 것도 있지만, 더 구출하고 구출해서 스스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사탄!”
그때였다. 흰 수염이 휘날리도록 달려오는 멜리너스를 보며 에르윈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번 연속 말이 끊겨서라기보다는, 그동안 누누이 주의했던 호칭 문제가 전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끄러운 전장이라서 목소리가 묻혔지, 옆에 엘도라가 있었다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급보입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멜리너스가 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이자, 에르윈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찡그렸던 눈이 놀란 듯 치떠졌다가, 이내 기묘한 호선을 그렸다.
“북쪽으로, 이백 명에 달하는 무리? 뇌제를 포함한?”
얼마나 예상외의 소식이었으면 자기도 모르게 원래 말투로 돌아왔을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서 김수현이 가장 먼저 출현했다? 정확한가?”
“그렇습니다. 한두 명이 본 게 아닙니다.”
“호. 그럼 지금이 아니라, 아까 나왔다는 건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에르윈은 기이한 얼굴로 다시 먼 곳을 주시했다. 벌써 포위망이 박살 났는지, 마족 대부분이 죽어 나가거나 견디지 못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에르윈이 입을 열었다.
“운이 좋군. 혹시 몰라 추적을 지시했지만,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멜리너스! 현재 사브나크는 어디 있지?”
“그게…. 사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사제 여인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빠르게 돌아오는 중이라고….”
“좋아. 잘됐어. 사브나크에게 바로 전하도록. 그 무리가 도망쳤다는 방향으로 신속히 이동한 후, 서둘러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라고. 그리고 너는 책임지고 서 대륙 병력 전원을 그쪽으로 넘어가게 해라. 어서!”
“어렵지는 않지만…. 서 대륙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멜리너스는 자못 걱정하는 어조로 말했으나 에르윈은 싱겁게 웃었다.
“이미 전장은 기울었고, 어차피 이백 명에 불과한 인원이다. 그에 반해 서 대륙은 사오천 명은 족히 넘어. 그 정도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머리 숙인 멜리너스는 곧장 어딘가로 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용히 엿듣고 있던 타나토스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언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리라 직감한 걸까.
“뭐야 뭐야? 나 촉 되게 좋아!”
어서 말하라는 것처럼 두 발을 구르자, 에르윈은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입을 열었다.
“계획 변경입니다. 지금 바로 김수현에게 접근하겠어요.”
“오호. 그럼…!”
“물론, 아직은 몰라요. …반반이죠.”
“응? 반반?”
타나토스가 반문하자, 에르윈은 모호한 미소를 짓는다.
“네. 반반….”
이윽고 은연중 붉은 안광이 흐르는 눈동자가 김수현이 있는 곳을 주시한다. 그리고 에르윈은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과연 어느 쪽이 거미줄에 걸려든 나비가 될지….”
*
한편, 같은 시각.
“한창 축제 중에 혼자서 난입하는 건 여전하군. 흥이 깨졌어.”
포위망이 깨진 후,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허준영이 선혈이 뚝뚝 흐르는 장검을 땅에 치며 씩 웃었다.
“초대장 못 받았을까 봐 걱정한 건 아니고?”
칼을 핑그르르 돌리며 핏물을 털던 김수현도 구변 좋게 받아쳤다.
“형…! 형…!”
그리고 안현은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부르짖고 있었다. 얼굴은 활짝 웃고 있건만,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이상한 표정을 한 채로.
그때 어설프게 웃던 김수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등을 돌린 채 숨을 몰아쉬는 거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뭐야. 너도 있었어?”
그러자 거한, 아니 공찬호는 마치 이제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흘끗 눈을 돌렸다. 잠시 김수현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뭐.”
무심한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던졌다.
“설마 같이 싸워준 건가?”
“…흥. 미리 말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너를 위해서 여기 있었던 게 아니라, 그나마 같이 싸울만한 놈들이 이놈들밖에 없었으니까.”
공찬호가 살그머니 투덜거리자 김수현은 참지 못해 푸 웃음을 터뜨렸다. 흡사 미리 외운 대사를 말하는 모양새가 자못 웃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발끈한 공찬호가 낯을 붉히며 소리치려는 순간, 우정민이 다급히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클랜 로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 순간 사위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회포를 푸는 것보다, 한 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주변을 쭉 둘러본 김수현은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몇 명이 안 보이는군.”
“제단을 지키려다가 몇 명이 뿔뿔이 흩어져서….”
우정민은 담담히 말을 흐렸다가, 곧바로 물었다.
“어디 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구출할 건가?”
“물론이지.”
김수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흩어진 클랜원은 일단 나 혼자서 찾아보마.”
“뭐라고?”
“그리고 너희는 나 대신 따로 해줄 일이 있다.”
“그건 또 뭔…! 예?”
벌컥 고함치려던 안현은, 대신해줄 일이 있다는 소리에 순간 말을 멈췄다. 김수현은 어스레한 미소를 짓더니 북쪽을 가리켰다.
“상황은 대충 들었다. 아까 신재룡을 만났거든. 그리고 고연주, 남다은, 마르까지. 아마 이 넷이서 한창 퇴로를 확보하는 중일 거야.”
“퇴로를…. 확보하는 중이라고요?”
“그래. 아군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워낙 중과부적이니 지금쯤 한 명 한 명이 절실할 거다. 그러니까 너희가 빨리 쫓아가서 도와줘.”
“하, 하지만….”
안현은 아리송해 하는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전장에서 퇴로를 확보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같이 행동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성의 촉은 무섭다고 하던가. 무언가 이상한 감을 느꼈는지 차소림이 조심스레 건의했다. 그러나 김수현은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이 상황에서는 저 혼자서 행동하는 게 더 낫습니다. 날개가 있으니까요. 다른 분들은 현재 고군분투하고 있을 동료를 돕는 게 더 낫습니다. 그게 저를 돕는 길이기도 하고요.”
“비행이라면 저도….”
“그리고 저는 제 형도 찾아야 합니다. 찾는 대로 구출해서 쫓아갈 테니, 지금은 제 말을 따르세요.”
“…….”
이렇게까지 말하자 차소림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만약 혼자 남겠다고 했다면 생각지도 않고 싫다고 했겠지만, 김수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쪽도 급하기는 매 한 가지였으니까.
…그래. 김수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정 났으면 빨리 이동하자고! 또 우르르 몰려오기 전에!”
공찬호가 수라마창을 풍차처럼 돌리며 외쳤다. 김수현은 끄덕거리고 몸을 돌리려다가, 아차 하며 공찬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 공찬호. 실은 너한테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김수현이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창을 가리켰다.
“그것 좀 빌려주라.”
“뭐…. 뭐 임마?”
공찬호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수라마창을 올려다봤지만, 이내 낯을 와짝 일그러뜨렸다. 이어서 벌컥 화를 내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다가간 김수현이 공찬호의 귓속에 무어라 은근하게 속닥거렸다.
그 순간,
“어….”
덜컥 주춤한 공찬호의 얼굴빛이 느닷없이 멍해졌다.
“엉…?”
“그럼 부탁했다. 이건 나중에 꼭 돌려줄 테니까.”
싱긋 웃은 김수현은 큰소리로 돌려주겠다고 말하며 손을 뻗었다. 공찬호는 방금 들은 말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 손아귀에서 수라마창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이윽고 미련 없이 등을 돌린 김수현은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올랐다.
잠시 후.
“너무 아까워하지 말라고. 상황이 상황이지 않나. 분명히 돌려주러 올 거다. 자.”
그렇게 말한 우정민이 주변에 떨어진 무기 중 그나마 큰 창을 주워 건넸다. 하지만 공찬호는 받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망연한 얼굴로,
“…….”
순식간에 점이 돼 사라지는 김수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어제 집필 도중 까무룩 잠들어버렸습니다.
일어나보니까 새벽 두 시…. OTL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