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36
00935 A Poisoned Chalice, Two.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중천에 있을 때 곳곳에서 선혈이 튀길 정도로 격렬했던 전장은, 황혼이 지고 석음이 어스레하게 깔릴 즈음에야 차츰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늘로 솟구쳤던 핏물은 땅을 흠뻑 적셔 강물처럼 흐르고, 고함치며 싸웠던 이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초원에 누워 차갑게 식어간다.
전장이 시시각각 종국으로 치달림에 이제 남은 건 단 셋.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그리고 구하는 자.
한데, 이 무렵 김수현 말고도 구하는 자의 구실을 하는 이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김수현이 떠난 이후 무리와 같이 전장을 벗어난 게 아니라, 혼자서 살짝 이탈해 전장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김수현의 발목을 잡기 싫어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을 뿐, 애초 혼자서 팔자 좋게 빠져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면 한소영도 엄연히 한 클랜의 로드였으니까.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천운이 따랐는지도 모르겠지만, 한소영은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 일부나마 이스탄텔 로우 클랜을 발견, 여왕의 군대를 소환해 구출할 수 있었다.
그 후 곧바로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으나, 합류에 성공했다고 해서 무사하게 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길을 뚫는 도중 적에게서 달아나는 아군이 보이면 구해내고, 적이 우르르 몰려와 에워쌀라치면 신속히 도주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여기서 전면전은 무리라고 판단, 약식으로나마 게릴라식으로 부대를 운영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방향을 돌리고, 잇달아 치고 빠지기를 거듭한 후에야 한소영은 겨우 숨 고를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즈음 뒤따르는 사용자는 약 오륙백 명 남짓. 그나마도 절반 이상이 중간중간 구해낸 아군이 섞인 인원이다. 한때 단일 클랜으로 일천 명이 넘는 인원을 자랑하던 이스탄텔 로우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렬이지만, 현 상황상 이 정도로 아군을 결집했다는 것 자체가 한소영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리라.
그렇게 한껏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사방을 돌아보는 와중, 한소영의 얼굴에 문득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어딘가로 서둘러 달려가는 수백의 적 무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
아니. 눈을 돌리는 곳마다 똑같다. 전장 곳곳에 퍼져 있던 적군이 갑자기 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무리는 한소영이 이끄는 집단을 봤음에도 그냥 지나치기까지 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 불현듯 모종의 감이 엄습한다. 특히 초감각을 가지고 있는 한소영이라면 더더욱.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전장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한소영은 결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하물며 최악에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건만, 어찌어찌 이스탄텔 로우와 만났고, 또 적게나마 무리를 군집하기까지 했다.
한데 과연 단순히 행운이 따라서 이렇게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걸까?
‘아니, 아니야.’
한소영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 광휘라는 타이틀이 있는 엽기적인 사제라면 모를까, 이만큼이나 기운 전장에서 자신의 성과가 마냥 운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무엇보다 아까 자기를 흘깃거리며 그대로 지나친 적군도 있지 않은가.
무언가 잘못됐다.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그와 동시에 한소영의 뇌리로 김수현의 모습이 빛살처럼 스쳤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한소영은 사방을 확인한 후 무리더러 변장을 지시했다. 투구든 뭐든 머리카락을 최대한 숨기고, 온몸에 피를 묻히며 적의 장비를 찾아 걸쳤다. 주변에는 아군뿐만 아니라 적의 시체도 상당수 널려 있던 터라, 변장은 금세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얼기설기 위장을 마치고 은밀하게 뒤쫓아가자, 오래지 않아 워프 게이트를 넘어가는 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수만 해도 거의 수천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리고 포탈 옆에는 흰 수염의 노인이 손을 휘저으며 다급히 고함치는 중이었다.
한소영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추며 청력을 높였고, 동시에 조용히 번역 마법을 활성화했다.
– 빨리, 빨리 넘어가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돼!
– 젠장! 그림자는 또 무슨, 뭐? 처음 보는 정령이 출현했다고? 수백 마리나?
– 당장 사탄, 아니 에르윈에게 가서 지원군을 요청해라!
– 놈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다고 해! 이러다 놓치겠다고! 어서!
그 순간 한소영의 얼굴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이지러졌다. 영리한 머리는 단 네 마디를 듣고도 전후 사정을 알아차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적은 뇌제가 있는 무리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추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림자나 정령이라는 말이 나온 걸 보니 거의 확실하다. 아마 지금쯤 한창 격전을 치르고 있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소영의 낯에 심한 갈등의 빛이 서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이끄는 병력이래 봤자 겨우 오륙백 명 남짓. 그나마도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 상처 입은 부상자 집단에 불과하다.
탁 까놓고 말해서, 현재 적들의 주의는 다른 곳으로 돌려져 있다. 이 틈을 타 여기서 물러난다면 높은 확률로 이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없는 건 아니다. 저기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돌파해 넘어갈 수만 있다면, 단숨에 거리를 줄이는 건 물론, 기절한 뇌제를 보호하는 무리와 합류해 탈출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가 지독한 자기 합리화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지.
‘제발, 부탁한다. 나는 형을 내 목숨 이상으로 생각한단다.’
‘형이 또 한 번 죽는다면…. 그때는 나도 더는 견디지 못할 거다. 아마 미쳐서 따라 죽어버릴지도 몰라.’
아까 언뜻 들었던 진심이 절절한 두 마디가 발길을 붙잡고 있을 뿐.
그때였다.
– 거기 너희! 어서 안 오고 뭐 하고 있는 거지?
정면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린 순간, 한소영은 거의 본능적으로 마음을 굳혔다.
전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여인은 침착히 손을 들었다.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
꾹 닫혀 있던 입술이 조용히 떼어졌다.
다음 순간, 한소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차 워프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
한편, 같은 시각.
빠르게 공중을 비행하던 김수현은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십여 마리의 마족과 맞닥뜨렸다. 날개가 있는 걸 보니 최소한 중급 마족 이상일 터. 그러나 구출과 동시에 한창 근원을 찾고 있던 김수현은 귀찮다는 얼굴로 무검을 쭉 내밀었다.
상대도 무섭게 괴성을 지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지만, 이내 눈부신 검광이 번쩍이며 서로 스치듯 지나쳤다. 그러자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선두에서 날아오던 다섯 마리가 갑자기 고꾸라지며 땅으로 추락한다. 엇갈리기가 무섭게 절반이나 결딴나버린 것이다.
굳이 뒤돌아 남은 절반은 상대할 여유는 없는 터라, 김수현은 비행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돌연 아래로부터 무시무시한 돌풍을 동반한 살기가 솟구쳤고, 김수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무검을 휘둘렀다.
까앙!
찢어질 듯한 철성이 귀를 찔렀다.
이윽고 가볍게 쳐낸 대상의 정체를 확인한 김수현이 놀란 숨을 삼켰다.
“엘도라?”
엘도라는 허공으로 튕겨 날아가면서도 김수현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증오에 가득 찬 눈을 한 채로. 하지만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보다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이건…. 좀 놀랍네요.”
그러한 찰나, 어디선가 웅혼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들렸다. 급히 자세를 바로 한 김수현은 아래를 확인하자마자 입을 딱 벌렸다. 잠깐 기습을 받았을 뿐인데, 어느새 수백에 달하는 사용자가 땅에서 활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언제 도착했는지, 전후좌우로 가히 일만이 넘는 군대가 착실히 거리를 좁혀오는 중이었다. 사용자와 마족은 물론, 심지어 요정과 정령도 부지기수였다. 말인즉 하늘과 대지가 모조리 점거당한 것이다.
왜 요정이 여기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김수현은 사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검의 군주라고 해도 이 정도의 대규모 포위망을 뚫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왕 싸울 거면 공중전보다는 지상전이 더 자신 있기도 했고.
“타나토스의 조각으로 각성한 엘도라의 일격을 쉽게 받아넘기다니…. 역시 대단해요.”
결국에는 땅으로 사뿐 내려앉자, 한 요정이 느긋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그곳에는 타나토스도, 대 악마도, 악마 군주도 모조리 한 자리에 있었다. 서 대륙을 제외한 모든 전력이 김수현 하나를 에워싸는 데 집중한 것이다.
잠시 후.
“역시 살아 있었군.”
김수현은 요요히 웃고 있는 요정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제 3의 눈으로 상대의 정체를 금세 파악한 것이다.
“그나저나 말투는 또 왜 그렇지? 에르윈? 아니, 사탄.”
“응? 저를 알고 있나요?”
“뭐? 알고 있나요? 여인 몸에 들어가니 성향도 여성스럽게 변한 건가? 하하.”
“후후. 꼭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김수현은 위기 상황에서도 이죽거렸지만, 에르윈은 어깨를 으쓱이며 잔잔한 낯을 유지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곤충의 마지막 발악을 보는 것처럼. 김수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 참 영광이군. 고작 나 하나 잡으려고 이만큼이나 동원하다니 말이야.”
“이미 전쟁은 끝났으니, 떨거지보다는 왕을 잡는 데 집중해야죠.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에르윈은 또 한 번 구변 좋게 받아친 후,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김수현은 바로 칼끝으로 겨누었으나 걸음은 어느 정도 거리를 남기고 멈췄다.
“뭐, 상황이 상황이니 말싸움보다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라면, 더 이상 이 의미 없는 전쟁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아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간단해요. 그것만 넘겨준다면 우리는 여기서 전쟁을 멈추고 얌전하게 물러나겠어요.”
“……?”
그렇게 말한 에르윈은 가녀린 팔뚝을 불쑥 내밀었고, 어서 무언가를 넘기라는 듯 손을 활짝 펼쳤다. 김수현은 잠시 멍한 얼굴빛을 보였다. 하지만 곧 싱겁게 웃더니 손바닥을 향해 침을 뱉었다. 에르윈은 재빨리 손을 거두었지만 별로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다.
“방금 행동은….”
“미친놈. 나보고 너희를 믿으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텐데요? 설마 혼자서 이 전력을 감당하겠다는 건 아닐 거고.”
“그건 부딪쳐보면 알겠지. 어디 한 번 해봐. 아니, 뺏어봐.”
김수현은 담담히 말하며 왼손의 창을 꼬나 쥐었다. 그 모습은 마냥 허세라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기실 이 정도로 둘러싸였으면 조금이나마 주눅이 들 법도 한데, 김수현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천천히 관찰하던 에르윈이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아니면….”
그러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하게 말을 흘린다.
“지금 제로 코드가 수중에 없다거나?”
정곡을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은 간신히 반응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면 적들이 자신을 포위한 이유가 제로 코드 때문이라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에르윈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실은 아까 보고를 받았거든요. 뇌제를 포함한 한 무리가 북쪽으로 도망쳤다는.”
“…….”
“그런데, 혹시 그거 알아요? 우리 쪽에서 초반에 사라졌단 광휘의 사제를 수색하러 나간 인원이 있다는 걸.”
“…….”
“그 인원이 지금 어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여기까지 들었을 때만 해도 김수현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흡사 계속 짖으라는 듯이 한결같은 낯빛을 유지했다.
그러나.
“에르윈 님!”
어디선가 에르윈을 찾는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멜리너스 님의 전언입니다! 북쪽으로 향하던 도망자 무리 중 그림자와 새로운 정령 군단이 출현! 병력 지원을 요청한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김수현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떠보기라고 생각했던 상대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르윈은 그 찰나의 순간 일어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흘끗 옆을 쳐다봤다가, 팔짱을 풀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선택하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잠깐,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잠시 후, 김수현의 눈동자가 심히 흔들리더니, 종래에는 망연한 빛마저 감돌았다.
“…하.”
끝끝내 칼과 창을 느릿하게 내리며, 머리를 젖혀 하늘을 향해 긴 탄식을 터뜨렸다. 흡사 절망과 체념에서 우러나오기라도 한 듯 몹시 기나긴 한숨이었다.
마침내 포기했다고 지레짐작한 에르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933회 후기)
로유진 : 히히히힣! 무쌍 발싸아아!
(933회 코멘트)
천광혜운 : 완결 다 되가니까 작가님이 정신 줄 놓은 것 같다….
(그걸 본 로유진)
0ㅁ0….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제 완결도 나겠다,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의 마음으로 그동안 숨겨왔던 제 모습을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후하후하후하후하! 치키치키 차카차카 쵸코쵸코쵸!
날아라 슈퍼 보드! 아핳하핳하하핳하하하하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