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80
00979 Code Name, Zero. =========================================================================
끼익….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몹시 작은, 그냥 일상에서 흘려 듣는 정도에 불과한 소음이었다.
장내는 살짝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터라 문 여는 소리는 고요 속의 파문처럼 커다란 물결을 일으켰다.
수십 쌍의 시선이 돌아가는 곳에는 한 신관 복장의 거주민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우수수 집중된 눈초리를 보고 주춤하더니 당황하며 말했다.
“시, 식사 중에 실례하겠습니다. 전령입니다.”
“뭐? 버, 벌써?”
득달같이 일어나 외친 이유정이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한동안 두 눈을 깜빡거리던 신관은 한층 조심스러워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에, 혹시…. 머셔너리 로드님 계신지요?”
그 순간 신재룡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하연은 긴 한숨을 흘렸고, 김한별은 고개를 숙였다. 쉴 틈 없이 음식을 푸던 비비앙의 숟가락도 움직임이 멈췄다.
단지 신전에서 호출이 왔을 뿐이다. 여태껏 몇 번이고 있었던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한데 주변에서 보이는 각양각색의 반응은 여느 때와 같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굳이 묶어서 표현하라면 ‘올 게 왔구나.’ 라는 듯한 표정이랄까?
그 모습들을 김수현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 김수현이 손을 들었다.
“접니다.”
“예 예. 지금 바로 와달라고 하시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사내는 꾸벅 인사하고 허둥지둥 모습을 감췄다.
신관이 사라진 식당에 다시금 무거운 정적이 침전한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식당에 돌연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이어진다.
“또 가보셔야겠네요.”
담담한 음성의 주인공은 안현이었다.
“어차피…. 항상 바쁘셨잖아요.”
안현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레 말을 끝냈다. 말투에서 무언가 느낀 걸까. 김수현은 묵묵히 식사하는 안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라면 안 간다.”
이번에는 비비앙의 음성이었다. 목멘 소리로 말하더니 옆에 놓인 물잔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랑 약속도 있잖아. 기억나지? 그럼 가긴 어딜 가? 약속 이행하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못 가.”
방금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여전히 잠겨 있다.
“도대체….”
김수현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를 절레절레 젓더니 소리 없는 숨을 기다랗게 내쉬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으니 자못 갑갑한 것이다.
“오늘따라 왜들 이러는지….”
평소답지 않게 말을 흐리며 주변을 돌아본다. 그러나 대답은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이대로 기다려봤자 나오는 건 한숨뿐.
결국, 김수현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튼, 호출이 왔으니 응해야겠지요. 그리고 오늘 밤이 되든 내일 아침이 되든, 우선 다녀오고 듣겠습니다. 마침 저도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단 세 마디. 그 세 마디를 남긴 채 김수현은 휘적휘적 탁자를 가로질렀다. 중간중간 누군가의 손길이 그를 잡으려는 듯 뻗어졌으나, 끝내 옷깃도 스치지 못하고 허공을 의미 없이 휘젓는다. 김수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발 빠르게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뚜벅….
한 걸음.
뚜벅….
두 걸음.
뚜벅, 뚜벅….
세 걸음, 네 걸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발소리조차도 희미해졌다. 김수현의 민첩 능력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보통 사용자의 보행 속도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말인즉 정문을 나서는 건 금방이었다.
“이래서 마지막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던 거니? 고작 투덜거리려고?”
고연주의 음성이 조용한 식당을 울렸다.
“정말 괜찮아? 이대로 보내도? 이대로 헤어져도?”
시선은 안현을 향해 있으나 오직 한 명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최소한 웃으며 보내줄 수는 있는 거잖아.”
처음 힐난하는 것 같던 음색은 어느새 달래는 어조로 변해 있었다.
“잘 생각해.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몰라. 너희가 아는, 기억하는 그 사람을.”
하지만 안현은 여전히 느릿하게나마 숟가락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식사에 열중한다기보다는 기계적인 동작에 가까웠다. 이내 손을 더듬어 잡은 물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재차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한다.
들리기는 하는 걸까.
고연주의 낯에 안타까운 빛이 스쳤다.
결국에는.
“좋아. 멋대로 해.”
최후로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
“!”
후회.
후회라는 한 단어에 기계 같던 안현의 행동이 정지했다. 사시나무 떨 듯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삐걱 뒤를 돌아봤다.
그리하여 비로소 보게 된 김수현이 떠난 자리는….
“…아.”
까닭 모를 공허함과 허무함만이 남아 맴돌고 있었다.
안현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형….”
기껏 불렀으나 당연하게도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김수현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니 말을 들을 수 있을 리 없다. 그제야 현실을 인지했는지 텅 빈 의자를 멍하니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서서히 일렁거린다.
김수현은, 정말로 떠났다.
“보아하니 장비를 가지러 올라간 것 같은데….”
고연주는 느릿하게 눈을 돌렸다. 김수현이 나갔던 방향으로.
“아직 늦지 않았어.”
그 순간.
“혀, 형!”
쿵! 의자를 박차는 소리와 함께 급하게 일어난 안현이 미친 듯이 식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 무렵.
고연주의 말대로 김수현은 집무실에서 장비를 챙기고 내려와 이제 막 입구를 나서는 중이었다.
한데 느닷없이 우르르 밀려오는 인기척을 느낀 걸까. 성큼성큼 정원으로 향하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등 뒤로 안현을 선두로 한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무질서하게 달려 나오고 있었다.
“혀엉!”
가까스로 뒷모습을 붙잡은 안현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 먼빛의 김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순간 이를 악물었으나 곧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너무나 유쾌하게 소리쳤다.
“헤헤, 죄송해요! 서운해서 잠깐 투정 좀 부려봤어요!”
“뭐?”
“그래도 괜찮죠? 아니! 괜찮을 거죠?”
“으, 응?”
“에이, 괜찮잖아요. 괜찮을 거라고 말 좀 해봐요. 형은 최강이잖아요. 무엇이든 질 리가 없잖아요!”
“너…?”
안현의 말은 심하게 격양돼 끝에 가서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사실상 거의 횡설수설하는 것과 진배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김수현은 차마 아까부터 뭔 헛소리냐며 말할 수 없었다. 안현의 두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으니까.
“맞아요! 우리 오라버니가 얼마나 센데요!”
안솔도 소리 높여 외쳤다.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 분명히. 제 행운을 걸고 맹세해요!”
방실방실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렇죠? 오라버니. 내 오라버니!”
악을 쓰듯 소리 지르는 안솔의 얼굴 또한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좋아! 정 그렇다면 약속은 좀 미뤄주지 못할 것도 없지!”
비비앙도 질 수 없었는지 양손을 허리에 척 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가뿐히 끝내고 빨리 돌아와! 알겠지?”
그러나 애써 강한 척하는 몸짓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그러자 다른 사용자들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던 걸까. 이윽고 비비앙이 말이 끝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머셔너리 클랜원들도 이구동성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정말로 고마웠다는 말, 믿는다는 말, 지지 말라는 말, 꼭 돌아오라는 말…. 조금씩 다르기는 했으나 전부 격려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말들이었다. 그 광경은 떠나려는 사내를 당황하게 하기 충분하고도 남아서 김수현은 한동안 멍멍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무슨 사지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하나씩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문득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수현 스스로 느끼기에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정은 모르지만 왜인지 어리둥절했던 기분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하하…. 진짜.”
은근슬쩍 눈 둘 곳을 찾던 김수현은 살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을 보며 볼을 살짝 긁적거린다.
그러더니.
“뭐, 최대한 일찍 오겠습니다.”
부끄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 찰나의 순간.
“……!”
소란은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기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방금 웃음은 예의 광소(狂笑)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환하기 그지없는, 처음으로 보는 김수현의 미소였다.
잠시 후, 김수현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아, 아아….”
이유정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땅에 고개를 처박고 소리 죽여 오열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바보.”
사 층 집무실에는 수나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밖은 무어라 외치는 소리로 몹시 소란스럽다.
“나 참. 왜 저렇게 시끄러워? 고작 인간 한 놈 떠나는 건데. 하여간 유난 떨기는.”
수나는 듣기 싫다는 듯 귀까지 틀어막고 인상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수선한 느낌은 계속해서 전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해. 아, 진심으로 애잔하다. 그딴 놈이 부왕이라고? 놀고 있네. 난 그런 약골 절대로 인정 못 해. 마음대로 하라지. 나야 지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무언가를 떨치려는 듯 수나는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난 너그러우니까.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일말의 재고할 여지는…?”
그때였다. 속으로 생각나는 온갖 비난을 가하는 동안, 여아는 돌연 바깥 소란이 뚝 끊겼음을 인지했다.
“…….”
수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두 귀를 막은 양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살며시 떼어지고 있었다.
밖은 확실히 전보다 조용했다. 들리는 거라고는 여인의 오열하는 소리뿐. 수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부리나케 일어난 수나는 곧장 테라스로 나가 정원을 내려다봤다. 아래에는 머셔너리 클랜원들이 있었다. 수나의 시선이 재빠르게 사방을 훑는다.
“아….”
그러나.
“아….”
아무리 찾고 찾아도.
“아, 아빠…?”
김수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어디 있어?”
무의미한 자문이다. 한 손으로 죽음의 신을 갖고 놀았던 존재가 고작 사내 하나 찾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 어?”
한참을 정신없이 돌아보던 수나는 정말로 김수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갔어?”
아닐 거라고, 혹시나 싶었던 가슴 속 기대가 물거품으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진짜야? 정말로?”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는 걸까.
“뭐, 뭐야. 뭐 이렇게 매정해. 나 아직 여기 있는데….”
수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씨이, 너무하잖아. 그러고 보니 딱 하루밖에 안 놀아줬으면서….”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 심지어 아까처럼 날이 서 있기는커녕, 울음이 살짝 섞여 있기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 매몰차게 달려갔는데 한 번 와주지도 않고….”
깜빡깜빡 감았다가 뜰 때마다 눈동자는 서서히 젖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아래서부터 액체가 고인다.
“가….”
종래에는 큼직한 눈망울에 가득하게 차오르더니.
“가지 마….”
끝내 한 줄기 뜨거운 액체가 발그레한 뺨을 타고 애처롭게 흐르기 시작한다.
“아, 알았어! 아까 버릇없이 군 거 잘못했으니까….”
어느새 수나는 난간 아래로 양팔을 뻗어 내리고 있었다. 흡사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듯 고사리 같은 손을 끊임없이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한다.
“까짓거 앞으로 말도 잘 들어줄 테니까…! 윽.”
들을 리도 없고 들릴 리도 없다. 그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수나의 음색은 어느 순간 완연한 흐느낌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뜨문뜨문 말을 잇더니 고개를 떨궜다.
“어엉….”
결국에는 꾹 감긴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음을 삼키며 수나는 간신히 말을 뱉었다.
“가지 마요…. 제발…. 아빠아아….”
============================ 작품 후기 ============================
하나 힌트를 드리자면 아직 결말을 완전히 맞추신 독자분은 없습니다.
물론, 김수현의 기억을 ‘삭제’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보일 여지는 있겠지만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