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37
얼마 동안 침묵이 흘렀을까?
진산을 바라보던 청진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핫핫핫. 원, 사람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응?”
“담운천의 제자는 하기원 근처에 있는 나의 처소에 있지 않은가?”
“그렇지.”
“그럼 절대로 만날 리가 없어. 사숙은 분명 연화봉으로 곧장 오실 것이네. 바로 이 검 때문에.”
청진이 다시 한번 확신을 시켜 주듯 현천의 애병, 자오(慈烏)를 내밀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라도 하기원으로 가시면?”
“그럴 리 없대두? 연화봉과 조양봉이 가까워 보여도 거리가 얼마나 되는줄 아는가? 그리고 평생을 곁에서 보아 온 내가 스승님의 성격을 모르겠어? 그분께선 한번 점찍은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네.”
“그……렇겠지?”
“그럼! 당연하지.”
재차 확신하는 청진의 말에 진산이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휴우……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나이가 드니 자네도 잔걱 정이 많아진 모양일세. 나도 그렇다니까? 잔소리가 늘어도 너무 늘었어. 아이들 하는것을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한둘이 아니야. 뭘 해도 모자라 보이고, 뭘 해도 걱정스러워.”
“하긴, 우리도 많이 늙긴 했지.”
“그러게나 말일세. 요즘은 그 잔소리와 걱정을 줄이는 걸 수련으로 생각한다네. 내 등선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싶어.”
“허허, 설마하니 등선이 거기에 있으려구.”
청진의 말이 실없다 여기며 웃던 진산은 어느새 걱정 대신 지나온 과거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벌써 이리 늙었어. 한때는 우리도 혈기 넘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보다 윗대인 분들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니.”
“그건 그렇지. 어느새 그리되었군. 그저 눈 한 번 깜박인 것 같은데……”
“생각나는가? 속은 닦지 못하고 겉만 익혀 놓고는, 드디어 검을 완성했다며 담운천을 찾아갔던 날이?”
“그랬지. 정말 혈기만 넘쳤어. 그때 담운천이 봐주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게야.”
“그래도 많이 배웠지. 설마하니 마교인에게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원래 그런 인물이 아니던가? 스승님께선 어찌 생각하실지 몰라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지.”
“맞네. 마교의 허울을 쓰지 않았다면, 분명 누대로 칭송받을 영웅이 되었을텐데……”
“그랬겠지. 스승님도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시긴 하였어.”
“어떤?”
“담운천을 너무도 싫어하시면서도 간간이 칭찬을 하셨지. 찢어 죽일 마교만 아니라면, 평생을 함께할 지음(知音)으로 사귀어도 좋았을 사람이라고.”
“허허…… 결국은 마교와 정파라는 굴레가 만든 벽 때문이겠지.”
“그래…… 우리 윗세대만 해도 치열하지 않았는가?”
“지금의 평화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각해 보니, 지금의 평화도 담운천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럴 게야. 그가 힘으로써 마교를 억누르지 않았다면, 사달이 나도 벌써났을 테니까.”
청진과 진산은 서로가 가진 기억을 공유하며 담운천을 추억했다.
“참! 그 능운비라는 아이는 어떠하던가?”
“응?”
“어차피 스승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심심하게 보내기보단 그 이야기나 나누도록 하세. 운학이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내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어.”
“흠……”
청진의 재촉에 진산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능운비를 생각하면 늘 그랬다. 비록 마교의 제자이지만, 누구보다 정파에 어울릴 듯한 모습에 절로 마음이 흡족해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녀석이지. 강하고, 치밀하고……”
“호오? 그래? 그럼 효웅(梟雄)이란 말인가?”
“효웅? 허허,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효웅보다는 덕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놈이지.”
“마교의 제자가 말인가?”
“자네도 들었겠지? 그 아이가 중원에 나와 무엇을 했는지?”
“들었네. 천주문의 일도 그렇고, 가뭄 때문에 기근에 시달리던 이들을 도왔다는 일도……. 녹림왕이 제법 수모를 당했다지?”
“알아본 게지. 아마 자네도 만나 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네.”
“그래?”
“암! 그 녀석은 정말 물건 중의 물건이었어. 뭔가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진 녀석 같달까?”
“감화?”
“그래. 그런 사람이 있지 않던가? 그저 있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주도하고 기분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이.”
“자네치곤 꽤 높은 평가구만?”
“담운천 그분께서 제자를 제대로 키워 놓으셨어. 질투가 날 정도로……”
진산은 자신이 보았던 능운비에 대한 호감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청진은 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검선이 머무는 거처.
바위산의 평평한 곳에 마련된 작고 조그만 낡은 암자.
검선의 이름값에 비하면 무척이나 초라했지만, 한편으론 잘 어울렸다.
모름지기 정파의 고수이자 도사라면 이래야지. 검소하고, 청렴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청진은 아마도 성격이 여전한 모양이다.
문득 제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살행을 멈추라고 설득하던 그가 떠올라 웃음이 지어졌다.
“밥! 밥 줘! 밥 달라고! 대체 밥은 언제 주는 거냐고!”
“……”
추억에 잠겼던 능운비가 허기진 짐승의 발광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배고픈 짐승 향이…….
중원에 나와 음식 맛을 보고는 식충이로 변해 버린 녀석이, 화산에 올라온 뒤부터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넣지 못했으니 저리 발광할 만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을 찾아온 객이 저 난리를 피우다니.
그것도 명경지수처럼 마음을 닦는 도가의 성지에서…….
“밥! 술! 내놔! 어서!”
“……”
하아, 진짜 실력만 되면 머리라도 한대 쥐어박고 싶었다.
“향아, 조금만 참거라. 운학이 아까부터 열심히 준비하고 있잖아.”
“밥! 술! 내놓으라고! 배고파 죽겠다고!”
열심히 달래 보았지만, 아귀의 입에 뭐가 들어가야 조용해질 모양이었다.
“식충이.”
“뭐? 이런 돼지 새끼가!”
물론 그 와중에도 웅현과 티격태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 보면 웅현도 참 대단했다.
향이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 건가?
아니면 타고난 신력을 믿고 있는 건가?
저러다 진짜 한번 크게 당할텐데…….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미리 향이에 대한 언질을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시비님! 시비님!”
“……!”
능운비가 고심에 빠져 있던 그때, 때마침 밖에서 운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학!”
향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나갔다.
빠각!
“밥!”
상을 보자마자 달려드는 모습이 가히 섬전 같았다.
많이 기다리긴 했던 모양이다. 굳이 경공까지 쓸 필요는 없었는데…….
그나저나 문은 안 부서진 걸까? 무언가 소리가 심상찮지 않았던가?
향이가 열어젖힌 문을 살피던 그때, 갑자기 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능운비가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지금 장난해?”
“……켁, 케켁, 시, 시비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뭐지?
밥을 보고 미친 듯이 달려 나갔던 향이가 별안간 운학의 울대를 꽉 잡고 있었다.
와중에 저 무시무시한 살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려야 할것같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화산이다. 와중에 검선의 제자인 운학의 모가지를 마교인이 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도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하, 향아! 뭔진 모르겠다만 일단 그손 놓…… 으응?”
향이를 말리기 위해 식탁 쪽으로 다가간 능운비는 어째서 그녀가 이리 화가 난 것인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운학이 차려 놓은 밥상. 빈틈 하나없이 채워진 음식들.
채(菜), 그리고 채, 또 채, 채, 채, 나물이었다. 산과 들에서 나는 것 중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골라 삶거나 볶은 뒤 양념하여 무친 음식.
설명은 길었지만, 전부 풀떼기라는 소리였다.
이러니 화가 날 수밖에…….
적어도 고기 한 점은 있어야 군침이 도는 법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산에 오를 때 진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대와는 다르겠지만…….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긴, 화산은 도가의 문파가 아니던가?
육식을 금(禁)하진 않으나 즐기지도 않는다. 이른바 절제인 것이다.
하여 나물 찬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고, 자연히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이 되었을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운학은 정말 최선을 다해 손님을 대접한 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다만 향이의 성에 차지 않았을 뿐이다.
“정말 이게 다야?”
“케켁.”
“이게 다냐고!”
나물 하나에 서슬 퍼런 기세를 내뿜는 향이의 모습에 능운비는 잠시 고민했다.
이 식충이를 진정시키자면…….
“어? 맛있는데?”
“응?”
재빨리 나물을 집어 먹은 능운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맛있었다.
“어떻게 나물에서 이런 맛이 나지?”
“뭐?”
능운비의 감탄에 귀가 솔깃해진 향이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역시나 물만 먹는 문파답게 요리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그, 그래?”
귀가 쫑긋해진 향이에게 쐐기를 박아 넣듯, 웅현도 냉큼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찹, 차차차찹!
그러고는 순식간에 접시를 비워 내기 시작했다.
“어? 어어?”
못지않게 식탐이 넘치는 웅현의 손놀림에 음식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하자 향이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야! 동작 그만!”
차차차찹! 찹찹!
“이 돼지 새끼가!”
위기감을 느낀 향이가 곧장 운학을 놓아주고는 탁자에 앉아 나물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오오오오! 존맛!”
“……”
대체 그게 어떤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시름 놓았다.
“술!”
“아, 안 그래도 준비해 뒀습니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향이가 내민 손에 운학이 술병을 척 하니 안겼다.
다행이다. 겨우 잠잠해졌다.
망할 식충이 같으니……. 이러다가 어딜 가든 음식 맛부터 신경 써야 할판이었다.
“휴우.”
“어? 어디 가게요? 지금 안 먹으면 저 돼지가 공자님 것도 다 먹을 것 같은데?”
“……”
지가 다 먹을 거면서 핑계는.
“먹고 있어. 잠시 하기정에 들러서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러세요.”
멀리 보이는 하기정을 힐끗거린 향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아마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객으로 와 있는 상황에 무슨 위험이 있을까?
식사 중인 그들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선 능운비는 하기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능선을 따라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비좁은 길이 나 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발만 헛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행이니, 과연 화산에서 가장 험준한곳이라 말할 만했다.
하지만 아직 해가 쨍쨍했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공을 가진 능운비에게는 그리 문제 될 게 없었다.
또한 과거의 자신을 추억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가벼운 걸음으로 좁은 바위 능선길을 여유롭게 지난 능운비가 봉우리에 지어진 작은 정자에 도착했다.
하기정.
작은 봉우리 아래로 산하를 가득 채우며 흐르는 운해가 참으로 멋들어진다.
“예전엔 그냥 정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고 갔다는 전설이 있을…… 만……응?”
운해를 감상하던 능운비가 묘한 느낌에 한곳을 쳐다봤다.
노인이었다.
나이를 추측하기 힘들 정도의 외모를 가진 그가 청량감이 가득한 정광을 뿜어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산의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데…….
“서, 설마 신선!?”
흠칫 놀란 능운비가 눈을 끔벅거리자 노인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물었다.
“아이야, 넌……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