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1
여진강.
나이는 스물, 교주의 두 번째 제자.
마교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지략가, 마뇌(魔腦) 여충빈을 배출한 혜심정(慧心庭)의 후예.
내성에 위치한 신월각(新月閣)의 주인이며…….
능운비의 머릿속에 그에 대한 기억들이 다양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죄 똑똑하단 기억들 혹은 잘났다는 기억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잘나신 분께서 호위대까지 이끌고 나타나셨다.
“허허, 이 녀석. 몇 년 만에 본 사형에게 인사도 하지 않을 참이냐?”
“……셋째, 운비가 둘째 사형을 뵙습니다.”
엉거주춤 일어났던 능운비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원 녀석, 엎드려 절받기로구나. 그래, 잘지냈더냐?”
“예? 뭐 그럭저럭……”
객점 안으로 들어온 여진강이 능운비에게 다가가자, 왕천과 주승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공자를 뵙습니다.”
“오, 왕천 아닌가? 그간에 고생이 많았지? 듣기로, 이 녀석이 사고를 많이쳤다고 하던데?”
“그리 힘들진 않았습니다.”
“하하, 내 이미 가문에서 다 들었네. 얼마 전엔 도사 홍내를 내는 바람에 본성이 한바탕 들썩 거렸다면서?”
“그야 뭐……”
여진강이 짓궂게 웃으며 눈을 찡그리자 왕천이 싫지 않은 표정으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다.
주승까지 소개해 주고 아주 친목질이……. 난리 났네, 난리 났어.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여진강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능운비를 노리지 않았던 유일한 제자니까.
오히려 가끔씩 도움을 줬다.
대공자가 이런 생각을 하더라, 혹은 사공자 쪽에서 이런 짓을 할지 모르니 대비해라등 호의 어린 당부가 대부분 이었다.
하지만 이 새끼, 느낌이 영 꺼림칙하다.
능운비의 기억만 가지고 있다면야 모를까, 그 위에 덧씌워진 척월린의 기억이 경계심을 느끼게 했다.
왜냐고?
이런 부류를 너무도 잘 아니까.
신기제갈(神機諸葛) 그 개새끼들……. 그놈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한때 그들을 조사했던 적이 있었다.
가진 무력도 적진 않은 곳이나, 머리 하나로 중원 정세를 쥐락펴락했던 그들.
혹자는 말했다. 지혜가 하늘에 닿아 미래까지 예측하는 제갈이 인의와 정의로서 중원을 지킨다고.
하긴 뭐, 그 조상 놈이 남동풍을 불러왔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 똑똑한 놈들이 그런 불확실성에 기대?
염병하고 있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제갈은 세인들의 평가보다 훨씬 더 대단한 놈들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예측 같은 걸 하지 않는다. 모두가 계산된 행동이다.
만약 자신들의 계획과 빗나가는 일이 생기면?
만든다.
상황을 꾸미고, 계략을 세우고, 사람까지 선동해서 예측처럼 말한 것을 사실로 만들어 놓는다.
물론 그 과정의 이면에서 추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척월린은 그저 그 일면을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어느새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결국 죽었다.
신기제갈이 자신들의 비밀을 묻으려 천라지망까지 펼쳐 준 덕에…….
물론 그 죽음이 후회되진 않았다. 제 죽음으로 인해 ‘그분’께선 무사하셨을 테니까.
다만, 마지막으로 뵙지 못하고 죽은것이 아쉬울 뿐이다.
어쨌든!
여진강이라는 놈은 그들과 같은 부류다.
대공자와 아래 두 사제.
그들이 어떻게든 능운비를 없애려 갖은 수를 쓰는 와중에도 그는 항상 먼발치에 있었다.
지켜보는 것이겠지.
어쩌면 친절과 호의 속에 자신을 감추고, 뒤에서 선동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제 손으로 죽이는 것보단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훨씬 더 쉬울 테니까.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으나, 그 의심 하나가 때론 목숨을 구한다.
이미 죽어 봐서 안다. 놈은…… 분명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놈에 대한 기억은 전부 좋은 것이었으나, 제갈을 겹쳐보면 또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이놈이 과연 우연히 이곳에 들렀을까?
그 저의마저도 의심스러웠다.
결론은…… 이놈이 가장 위험하다.
저 웃는 눈으로 자신의 속을 파헤쳐 낼것이 틀림없다.
절대로 엮이지 말아야 한다. 괜히 나증에 도주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응? 어찌 그리 보느냐?”
“……예?”
“아니, 이 사형을 몹시 유심히 보기에……”
“그게…… 오랜만에 뵈어서인지, 그간에 더 잘생겨지신 듯해서요. 혹 가셨던 지역의 특산물이 미용에 좋은 거였나요?”
“뭐?”
“……”
능운비가 어색하게 웃자 여진강이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젠장!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하고말았다.
잘생겨지셨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빤히 쳐다보던 여진강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핫핫핫! 원, 녀석. 너답지 않은 넉살이구나? 왕천이 네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고 그리 자랑을 하고 다녔다더니……”
“……”
휴우, 다행이다.
왕천의 자랑질이 아니면 괜한 의심을 살 뻔했다.
“그, 죽다 살아났다 보니…….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핫핫핫, 언짢기는? 괜찮다. 이 사형은 오히려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좋아보이는구나.”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데, 사형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나?”
“……”
여진강이 힐끗 탁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의 방향은…….
“천산……설주요?”
“그래, 천산설주는 이 집이 최고거든.”
“아!”
능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 거렸다.
하긴, 이만한 맛집이 없긴 하지.
“어떠냐? 모처럼이니 같이 한잔하겠느냐?”
“저랑요?”
“그래.”
“……”
벌써 자리에 앉은 여진강을 보며 능운비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이놈이랑은 절대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가면을 써야지.
약하고, 약하며, 약한 놈으로.
이젠 야망마저 없는 그런 비루한 놈으로.
“아닙니다. 전 이미 많이 먹었습니다. 벌써 취기가 도는 것이…… 과음을 한 모양입니다.”
“과음?”
약한 척하는 능운비의 모습에 여진강이 탁자를 슬쩍 쳐다보며 웃었다.
“병 안의 술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 제가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반만 먹었는데도 머리가 핑핑 돕니다.”
“상태가 좋지 않다? 내 혜심정에 도착해 듣기로, 스승님의 삼 격을 받아냈을 만큼 회복되었다던데?”
“누가요? 제가요?”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평소 너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원로원주의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지?”
“……”
다 알면서 묻는 여진강의 모습에 억지웃음을 짓던 능운비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망할 왕천 놈, 괜히 소문을 부풀려서는…….
“말도 마십시오. 그건 순전 운이었습니다.”
“운이라?”
“……”
여진강이 능운비의 말꼬리를 잡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젠장, 눈빛이 묘한 게 필시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암요, 운이지요. 겨우 삼 격까지 피하고는 정말 죽을 만큼 맞았습니다.”
“호오? 그래? 내가 들은 얘기와는 다른 듯하지만…… 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그렇다니까요? 무려 이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지 뭡니까? 핫핫핫.”
일부러 크게 웃어 보았지만, 여진강의 눈에 서린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되레 짙어졌다.
“한데,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하구나. 제대로 회복도 되지 않은 너를 설산장이 지지하기로 했다?”
“……”
“소설옥수께서 그럴 분이 아니지 않느냐?”
“그, 그러니까요. 저도 그래서 고민입니다. 능력이 안 된다고, 저는 이제 끝났다고, 미래가 없다고 그리 간곡하게 말씀을 드렸건만……”
“그러하냐?”
“암만요.”
“……거참 별일이구나. 내 설산장이 너를 돕는다 하여 기쁘기 한량없다만, 아무런 시험도 없이 너를 지지했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러게요. 뭔가 판단 착오가 있으셨던 게 분명합니다. 아마 조만간 지지를 철회하실 게 틀림없다니까요?”
능운비는 최대한 미소를 유지한 채 답했다.
하지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이 망할 자식이 뭘 자꾸 캐내려고 한단 말인가?
무조건 감춰야 한다.
본시 무림은 아귀의 전장과도 같고,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기에 가진 삼 푼의 능력을 항시 감추라 한다.
그리고 이놈에겐 삼 푼이 아니라 구푼을 감춰도 모자라다.
“어이쿠, 어지러워라. 이거 술이 과했네. 칠장로께서 환후에 술은 극독이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내가 미쳤지.”
“……”
능운비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형, 술은 다음에 드시는 것으로 하지요.”
“저런, 내 아직 너와 회포를 풀지도 못했는데……”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습니까? 탄신연까지 아직 좀 남았으니, 술에서 깨면 제가 말짱한 정신으로 신월각을 찾아가 차를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능운비는 자신을 붙잡는 여진강의 말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중에? 어림도 없지.
절대로 안 찾아갈 거다.
술도, 차도 앞으론 배달시켜서 마실테다.
“그럼 이만……”
“……”
능운비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삼공자님.”
“……?”
능운비의 앞을 막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기도를 가진 그는 여진강의 호위장, 추성균이었다.
“주군께서 저리 부탁을 하시는데, 잠시나마 머물러 주시는 게 어떠하시겠습니까?”
“……”
“떠나 계신 내내 삼공자님 걱정에 밤을 지새우신 분입니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보아 온 제가 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니, 부디 거절치 마시길 감히 청해 보겠습니다.”
말이 곱다. 행동마저 어긋남 없이 정중하다.
하나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능운비로서는 그의 개입이 고깝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괜한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자칫 드러날 수 있으니까.
“내 자네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어찌하겠는가? 미안하네.”
“……”
능운비가 웃으며 추성균을 제치려 그의 어깨를 밀어 내는 순간.
휘릭.
“……?!”
추성균이 몸을 살짝 비틀었다.
술에 취해 비틀리는 척 연기를 하고 있었기에,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앞으로 쓰러질 것이 뻔한 상황.
“이런, 삼공자님! 조심하십시오.”
순간 능운비의 눈동자에 이채가 홀렸다.
언뜻 부축하려는 듯 움직이는 추성균의 손.
한데 그 손이 교묘하게 자신의 맥문을 잡아채려 하고 있었다.
이새끼가…….
능운비는 당황한 듯 허우적거리며 교묘하게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 결과는 당연히.
풀썩.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주군!”
놀란 주승이 급히 달려와 능운비를 부축했다.
“추성균, 너 이……”
와중에 왕천도 본 것일까?
발끈하는 표정으로 나서는 그를 능운비가 소매를 잡아채 붙들었다.
“술에 취해서 그래. 많이 취해서.”
“……주군.”
“괜찮아. 많이 취하면 엎어질 수도 있는거지. 그치?”
“……”
능운비의 미소에 왕천이 입을 꽉 다물었다.
……역시 봤나 보다.
조금 전 추성균의 행동.
자신을 부축하는 듯 보였으나 그 손의 움직임은 금나수(擒拿手)였고, 은밀하게 맥문을 잡으려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허우적거리는 척 피하지 않았다면 내력을 읽어 몸 상태를 확인했을 것이다.
왕천은 그 숨겨진 과정을 본 것이다.
웃기는 일이다. 일개 호위장 따위가 교주의 셋째 제자에게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여진강의 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막아선 것도, 맥문을 잡아 확인해 보려던 것도 충성스러운 호위장에게 전음 한마디 보내면 충분했을 것이다.
혹시나 문제가 된다면 제 놈은 뒤로 물러난 채 호위장만 추궁하면 그만일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
하지만 지금은 참아 주마.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형.”
“어쩔 수 없구나.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여진강은 배웅 없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어떠하더냐?”
“……교묘하더군요.”
“의도적으로 피했다?”
“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여진강이 이내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은밀히 따라가 보고 오너라.”
“예?”
“정말로 취한 것인지, 아니면 취한척을 하는 건지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알겠습니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추성균이 호위 몇몇과 함께 곧바로 객점을 빠져나갔다.
“감춘다라…… 녀석, 제법이구나. 분기만 가득하던 놈이 심계도 깊어졌단 말이겠지?”
여진강은 미소를 머금은 채 빈 잔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