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41
탁, 자박자박.
구부정한 허리, 뒷짐을 진 한손.
노인의 발소리는 셋이다. 다른 한 손에 들린 지팡이가 길잡이라도 되는 양 노인의 걸음을 인도한다.
하여 느리다. 같은 거리를 보통 사람의 두 배나 되는 시간을 할애하여 걷는다.
“히유우, 히유.”
와중에 숨은 어찌나 거친지.
얼마 걷지도 않았음에도 노인은 몇번이나 멈춰 섰고, 그때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지켜보는 마음 착한 이가 있다면 안쓰러움을 참지 못하고, 당장에 업어 주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저, 저…… 잘 걷지도 못하는군요.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음, 그러게요.”
옆에서 따르는 주승과 왕천처럼.
사람 목숨 우습게 아는 놈들이 노인에겐 친절할 줄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눈운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마공을 익힌 터라 마음이 차가워져서?
그럴 리가?
아무리 공부를 등한시했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살업을 저질러 왔다고는 해도 사람이 가져야 할 심성이나 측은지심 정도는 아는 그였다.
그런 그가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노인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주승과 왕천도 곧 알게 되겠지.
“저쪽 골목으로 들어갈 모양인데요?”
“뛰자.”
“예?”
“빨리, 늦으면 놓친다. 기척 죽이는거 잊지 말고. 항마주도.”
“……?!”
노인이 골목을 돌아 모습을 감추는 순간 능운비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놓쳐?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을?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명이었으나 충성이 골수까지 스민 주승은 군말 없이 뛰었고, 주승에게 뒤질 수 없었던 왕천도 경쟁하듯 능운비의 뒤를 쫓았다.
“헛!”
골목 안이 휑했다. 조금 전까지 힘겹게 걷고 있던 노인이 별안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꺼졌다고 하기엔 땅에 흔적이 없고, 솟구쳤다고 하기엔 담벼락이 너무 높지 않은가?
“저, 저쪽입니다, 호위장!”
“……!”
주승의 외침에 왕천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노인이 아닌 담벼락 위를 스치듯 밟고 달리는 능운비의 모습이었다.
“갑시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능운비는 애초에 알았던 것 같았다. 노인의 걸음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대체…….
토도독!
“……”
다시 의심이 시작되려는 찰나, 주승이 담벼락 위를 달렸다. 발소리는 경쾌했지만, 그 속도엔 진심이 가득했다.
“이런 씨…….누가 뒤질 줄 알아?”
왕천의 머릿속에 피어나던 의심의 싹이 주승으로 인해 뿌리째 뽑혀 나갔다.
주군이 노인을 알든 말든 이젠 상관없다. 그 옆에 찰싹 들러붙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때아닌 추격전.
앞선 노인에게 걸리지 않을 정도로 멀찍하게 거리를 벌리고 뒤쫓던 능운비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노인의 거 리만큼이나 떨어진 채 뒤쫓아 오는 둘.
그러게 뛰라니까…….
하긴, 명을 받았다곤 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 죽어 가는 연기는 정말 예나 지금이나 일품이라 할 만했다. 모르는 사이였다면 깜빡 속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처럼 삼무보를 익히고 있었다.
중원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경공, 오직 자신들에게만 전승된 무공이었다.
그들이 애초에 한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실력은 능운비에 비하면 그리 대단치 못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그 격차가 더욱 크다.
능운비의 몸 안에 마령신단의 내공이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체를 숨기려 항마주를 외는 것을 멈춘다면, 꽤 먼 거리라고는 해도 몇 호흡 정도면 충분히 따라잡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
이 추적의 목적은노인이 아니라, 노인이 만날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홍(慈紅), 능운비가 중원행을 통해 찾아가려는 ‘그분’만큼이나 그리운 이름.
하지만 능운비는 자홍의 거처를 알지 못했다.
그는 기다리는 이였고, 자홍은 찾아오는 이였기 때문이다.
서화점의 조층도.
모란과 나비가 그려진 그 그림은 그들 간에 정해 둔 암어였다.
조충도를 바라보며 자홍을 찾으면, 노인이 그에게로 안내해 주는 식이었다.
자신이 죽은 뒤 삼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서화점에 조충도를 걸어둔 것을 보면, 그들은 여전한 모양이다. 노인이 장사도 안 되는 서화점을 이유도 없이 유지할 리는 없지 않은가?
분명 누군가를 기다린 것이다.
자신의 뒤를 이어 ‘그분’을 돕고 있는 누군가를…….
“큭, 생각해 보니 노인네가 거짓말한 이유가 있었네.”
노인의 뒤를 쫓으며 기억을 떠올리던 능운비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 보니 웃기지 않은가?
지금의 그는 척월린이 아니라 능운비였다.
그런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암어를 웬 젊은 놈이 찾아와서 씨부렁거렸으니……. 크게 티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화들짝 놀랐을 것이 틀림 없다.
“하마터면 오랜 지음을 심장 마비로 죽일 뻔했어.”
그래도 저리 잘 달리는 것을 보면 심장 건강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러나 노인은 얼마 못 가 멈출 것이다. 삼무보에는 치명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몸을 가볍게 만든 뒤 내력을 폭발적으로 방출해 한순간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는 경공인 만큼 내력소모가 어마어마하다다.
그럼에도 삼무보를 사용한 것은 혹여 쫓는 자들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약이 분명하지만, 골목어귀를 도는 순간 사라진 듯 보일 테니 웬만한 놈들은 절대 뒤를 쫓지 못할 터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꽤 지났다.
과거 노인의 경지를 떠올려 보았을 때, 한 번에 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대략…… 푸른 지붕이 있는 근처?
과연 그 예측대로 노인의 신형이 한 순간 푹 하고 꺼지듯 사라졌다.
둘에게 다급히 전음을 보낸 능운비가 푸른 지붕 인근에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안본? 도심을 벗어난 외곽 뒷골목.
노인이 처음 서화점을 나설 때처럼 힘겹게 걸으며 수차례 골목을 맴돌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추적자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내 작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자님, 이게 대체……”
가까이 다가온 왕천이 작은 목소리로 이유를 묻고자 했지만, 능운비는 고개만가로저었다.
“왕천, 주승.”
“예?”
“지금부터 절대로 나서지 마. 따라들어오지도 말고.”
“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호위가 어찌 주군의 곁을 떠나요?”
“말대로 해. 무조건.”
“아니……”
“예! 외곽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
왕천이 반박하려던 순간 주승이 치고나왔다.
망할 놈이 또…….
너 지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아? 안에 들어갔다가 누가 습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외곽이나 지킨다는거냐!
주승과 달리 왕천은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충성도 좋지만 호위의 임무를 저버려선 안 된다. 혹여 주군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쩐단 말인가?
왕천은 설사 능운비에게 이 일로 미움을 받아 나중에 내쳐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군”
“알아, 무슨 마음인지.”
“……”
왕천이 강하게 반박하려는데 능운비가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타일렀다.
“내겐 무척 중요한 일이야.”
“하지만……”
“걱정 마.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소리를 쳐서라도 알릴게. 그럼 되잖아?”
“끄응.”
왕천은 더 반대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주군이 이리 진심 어린 표정으로 부탁하는데, 자신이 어찌 안 된다 하겠는가?
필경 무슨 이유가 있을 터다. 왠지 물어서는 안 될 듯한 그런 이유가.
“꼭입니다.”
“……”
“작은 위협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알려주셔야 합니다. 예?!”
“알았어. 꼭 그렇게 할게.”
“후우, 들어가 보십시오. 주승과 함께 밖을 지킬 테니.”
“이해해 줘서 고마워. 묻지 않아 준것도.”
“쳇, 어차피 대답도 안 해 주실 거면서.”
왕천의 투덜거림에 능운비는 그저 옅게 웃으며 그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끼이익.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능운비.
“역시 호위장이십니다. 주군을 걱정하시는 마음이 보기 좋습니다. 주군 또한 그 눈에 호위장을 아끼는 진심이 가득하시네요. 헛헛.”
“……”
환하게 웃으며 칭찬하는 주승을 왕천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째려보았다.
“삭월대주.”
“예.”
“닥치고 경계나 합시다.”
“……?”
왠지 그 속에 날이 잔뜩 선 듯한 말에 주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화를 내시지?
……과연 호위장인가. 주군을 홀로 보내는 것이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분명해. 많이 배워야겠어.
왕천의 짜증에도 발끈하기는커녕 홀로 반성하며 다짐하는 주승이었다.
* * *
벌컥!
갑자기 문이 열리자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이가 홈칫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속히 거처를옮기셔야겠습니다.”
“예?”
“조충도의 암어를 아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조, 조충도의 암어를요?”
“예.”
“하면 설마? 드디어 연락이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 보이진 않았습니다. 찾아온 것은 새파랗게 젊은 놈이었습니다.”
“예? 젊은이라니요?”
“심지어 호위로 보이는 놈을 둘이나 대동하고 왔었습니다.”
“하면……?”
“아무래도 발각된 것 같습니다.”
“그, 그런……! 아무리 폐문의 명을 받은 지 오래되었고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말라 했다지만, 근 십 년 동안 아무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압니다. 혹여 그와 연락이 닿을까 내내 조충도를 걸어 두라 하셨던 것도요.”
“……”
“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그림에 관심이 생긴 자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감이 좋지 않습니다. 일단은 거처를 옮긴 뒤에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그리하죠.”
“중요한 물품만 챙기십시오. 나오시는 대로 곧바로 거처를 불태워 흔적을 지울 것입니다.”
“예!? 그렇게까지……”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열린문으로 능운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어진 노인의 행동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놀란 표정과 눈동자에 비친 사람의 인영을 발견하는 순간 몸을 틀어 손을 크게 휘두른다.
슈아악!
뻗어 나온 빛줄기.
노인이 들고 있던 지팡이였다.
능운비는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상체를 뒤로 젖히며 제비를 넘었다.
탁!
바닥을 차 내는 소리.
공격과 동시에 노인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지팡이를 가로로 그었다.
휘이익!
“……!?”
하지만 소리에 허전함이 가득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었던 움직임이 허공만 가르고 만 것이다.
대체 어떻게?
노인의 눈동자에 놀람이 가득했다.
어찌 그리 쉽게 피했단 말인가? 마치 순간적으로 눈앞에서 사라진 듯했다.
“네, 네놈은?”
그제야 능운비를 알아본 노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서화점을 찾아왔던 자.
“에이, 진짜. 의심하기 딱 좋긴 한데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너무하네.”
뒤로 물러난 능운비가 가슴을 툭툭털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와중에 능운비가 더는 다가설 수 없도록 막고 선다.
이미 능운비의 움직임을 보았다. 승부를 자신할 수 없는 자다. 하여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고 안에 있는 자가 방안에 숨겨진 비밀 통로로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 주려는 것이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나? 글쎄…… 지금은 뭐라 설명하기가 힘드네.”
다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누가 믿어 주겠는가.
삼십 년 전에 죽은 자신이 되살아난 것을, 와중에 이리 젊어지기까지 했는데.
게다가 모든 것을 이해시키자면 자신이 마교임을 밝힐 수밖에 없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마교란 걸 알면 잘도 아, 그러시냐며 반갑게 맞아 주겠다.
이유 불문 당장에 결사 항전이다. 마교에 대한 그들의 편견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 자신이 가졌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테니까.
“그대들의 벗이었던 척월린을 아는 사람이라고만 해 두지.”
“뭐, 뭣?”
“나이와 성별은 달라도 누구보다 깊은 의로써 맺어진 친구였었잖나, 그리 자주 본 사이는 아니 었지만 말이야.”
“네놈이 어찌 그 이름을?”
“그 이름만일까? 김산(金山)이라는 이름도 알지.”
“……!”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 자홍…… 아니, 신예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
노인이 지키던 그 뒤의 인물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내 참, 거짓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모친도 아니고 부친이 죽었다니……”
“……”
당연한 소리다. 노인의 뒤에 있는 것은 중년 미부니까.
“어떻게? 술이라도 한잔하는 게 좋겠지? 따로 사 둔 게 없으면 내가 사오고.”
능운비가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지만, 노인 김산과 중년 미부 신예랑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이름이 생전 처음 보는 청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척월린, 김산, 신예랑.
당사자인 그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모르는 은밀한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