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66
싸움이 한창인 공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
울창한 나뭇가지가 뒤섞여 이룬 그늘 속에서, 검은 방립을 깊이 눌러쓰고 얼굴을 가린 흑의인이 가지 사이 틈을 통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둠이 서린 곳곳에 자리 잡은 이들은 모두 열.
신혈가의 명을 받고 능운비를 추격해온 검은 모래, 흑사였다.
악와지에서 흔적을 발견한 뒤, 그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능운비를 뒤쫓아왔다.
특급 살수 사일화는 갑자기 나타난 옥청표국을 의심해 주천의 천주문을 살폈고, 천보는 대설산 인근에 자리한 안본에서 그 흔적을 겨우 찾았다.
완전히 다른 신분. 심지어 마교가 준비했다는 위장 신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용모와 정보가 둘 다 삼공자 능운비와 삭월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들이 위장한 신분은 너무도 교묘하여, 처음부터 의심을 품고 조사하지 않았다면 놓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치밀했다.
중원행이 처음이라는 삼공자가 어찌 그리 용의주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와중에 정파의 영역에 숨어들 줄이야.
살수들을 이끄는 사일화는 능운비를 뒤쫓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누가 봐도 도움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설산장, 혹은 교주.
조장 천보의 전음에 사일화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대단했다.
하긴, 자신들의 주인이 될 대공자를 쓰러뜨렸다 했으니까.
하지만 직접 보니 듣던 것 이상이다. 아마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사실 능운비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뒷배가 없는 제자였고, 주화입마로 경쟁에서 멀어져 있던 자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가 사용하는 월식은 교주님의 제자들이 독문 무공으로 사용하는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알던 것과 달랐다. 아니, 어떤 제자도 월식을 저리 자유자재로 펼칠 수는 없었다.
대공자조차도.
어쩌면, 가전 무공을 익히고 있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오직 그것뿐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한 우물만 팠기에 훨씬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는 금단의 마공을 익혔던 전적까지 있지 않은가?
교주 외에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그것.
비록 그 때문에 주화입마에 들었지만, 무사히 회복한 이상 도리어 고급의 무리를 엿봤다고 할 수 있다.
지켜보고 있을수록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칫 실패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검은 죽립 아래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드러나자, 천보가 담담히 답하고 물러났다.
그래, 그럼 된다.
명을 받았으니 행한다.
죽여야 할 자가 지목되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죽음을 선사하는 것.
그것이 흑사가 해야 할 일이다.
다만, 확실한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범처럼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기다리다가 틈을 노려야한다.
천주문과의 싸움이 끝나는 그 순간.
지쳐 버린 상황에서 한순간의 방심으로 틈을 보이는 순간, 죽음이 찾아갈 것이다.
꽈악.
사일화가 힘주어 잡은 검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달빛조차 스미지 않는 칙칙한 검신, 예기가드러나지 않게 죽인 날.
장인의 가문 신혈가가 흑사들의 살행을 위해 제작한 최고의 암살 무기, 절명 (絶命)이다.
보도 같은 예리함은 없으나, 이름 그대로 단박에 목숨을 끊는다.
“넣어라. 흉하다.”
“……!”
순간 사일화는 검을 다 뽑지도 못한 채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귓가를 파고드는 나른한 목소리.
여, 여인?
성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고 있음에도 자신이 감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체 어떻게…….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의 본능이 뽑아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뽑는 순간 죽음이 찾아올 것만 같은 섬뜩함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누굴까?
흑사의 특급 살수인 자신을 이리도 긴장시킬 만큼 대단한 자라니.
분명 공터 주위는 전부 확인을 마쳤는데.
데루룩.
눈알이 한계까지 굴렀다.
그럼에도 모습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이는 무척이나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이 궁금했다.
트득, 트드득.
뻣뻣해진 고개를 억지로 돌리니 목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턱!
“……!?”
순간 상대가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꽉 움켜쥐었다.
트드득!
그리고 홱 하니 돌려 자신에게 향하게 한다.
“모가지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얌생이처럼 몰래 쳐다봐?”
“……”
사일화의 얼굴을 틀어쥔 채 시선을 맞춰 오는 이는 활짝 웃고 있는 여인이었다.
대략 십육 세쯤으로 보이는…… 애새끼?
“자, 봐. 보니까 좋아?”
“……”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웃는 그 모습에 사일화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농락당했다. 그녀의 입가에 머물고 있는 것이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거, 새끼. 예쁜 얼굴 보고 부끄러워하긴. 얼굴이 아주 새빨개졌네.”
“……”
히죽거리며 웃는 그 모습에 사일화가 침을 울컥 삼켰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의는커녕 적의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딱히 기운을 내쁨어 억제하지도 않았는데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자신의 수하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지?
설마 이 여인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눈깔이 참…… 고민이 많다, 그치?”
“으음.”
“귀엽게 노려보고 그러지 마라. 모가지를 살포시 따 버리고 싶으니까.”
“……”
“그런데 내가 지금 입장이 좀 그래. 너희 열 놈 전부 죽여 버리고 싶은데,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 괜히 니들 목 따려다가 우려하는 일이 생기면 곤란하거든?”
“……”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가라. 오늘은 살려 줄 테니, 나중에 다시 와서 뒈져. 알겠지? 살고 싶으면 아예 다신 안와도 되고.”
싱긋 웃으며 한 말이지만, 그 내용은 죽음을 경고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그들의 추격에는 관심도 없었다.
자신이 능운비를 지키는 것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된다.
또한 주위에 은신자가 느껴진다고해서 무턱대고 공격하며 일일이 누구냐고 물을수는 없지 않은가?
하물며 자신도 숨어 다니는 판에.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싸움의 현장을 숨어서 지켜보는 것도 모자라, 습격할 준비까지 하고 있는 은신자.
명백한 적이니 당연히 죽인다.
다만, 그들에게 말했듯 지금은 아니다.
혹여 자신이 그들에게 집중하는 사이에 천주문주가 도망쳐 버리면 곤란하니까.
“가라니까? 왜? 너무 놀라서 몸이 굳었어?”
“……”
그 명백한 무시에 사일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놓고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애새끼가, 수없이 오랜 시간 살행을 성공시켜 흑사의 특급 살수에 오른 자신을……
빠득!
어금니를 악무는 순간, 사일화의 눈동자에 감정이 사라지고 칙칙한 어둠만이 남았다.
슈아악!
동시에 절명검이 뽑혀 나오며 날렵한 반원의 궤적을 그렸다.
파각!
검날이 여인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하지만 사일화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살이 썰리는 느낌도, 튀어 오르는 피도 없었다.
벤 것은 나무.
사일화는 재빨리 나무를 차고 도약해 뒤로 물러나며, 품속에 집어넣었던 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쐐애애액!
그의 손에 쥐어졌던 커다란 비침 네개가 섬광으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신혈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암살 신기, 잔멸침(殘滅針)이다.
뒤는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잔멸침의 무서움은 상대에게 꽂힌 다음 폭발하는 데 있으니까.
쾅! 콰쾅!
던진 것은 넷이나 소리는 셋이다.
하지만 일일이 세서 무엇하겠는가?
아무리 신혈가라고 해도 불량품이 하나도 없으리란 법은 없다.
그저 그 불량품 중 하나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을 뿐이다.
“퇴진(退陣)!”
사일화는 다급히 외치며 공터의 숲을 벗어나려 달렸다.
지금의 살행은 취소다.
능운비의 곁에 저런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면 계획을 다시 세워야만 한다.
사일화가 달려 나가자, 살행을 준비하던 수하들이 일언반구도 없이 그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의아함? 질문?
그딴 게 중요할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상관의 명이다. 명이 떨어지면 그저 따르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리고 잔멸침이 폭발한 곳.
흉하게 터트려진 나무의 잔해가 사방에 흩어진 그곳에 여인, 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 퉤퉤.”
부서진 나뭇조각과 먼지를 뱉어 낸 향이가 자신의 손에 들린 대침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신혈가에서 보낸 새끼들이었네.”
비침을 보고 알았다. 마교에서 그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오직 그곳뿐이니까.
“……그나저나, 조용히 가라고 경고를 했는데.”
예상치 못한 폭발에 휘말려 버린 터라 옷이 성치 못했다.
일부는 불에 그을렸고, 군데군데가 흉하게 찢어져 버렸다.
“하아, 아끼던 옷인데……”
그녀의 입이 꽉 다물어지고, 눈동자에는 마기가 회오리 치듯 감돌았다.
으득!
이를 꽉 깨물며 코끝을 찡그린 향이가 도주하는 흑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러면…… 막가자는 거지?”
천주문주가 도주해 일이 커질까 봐 좋게 좋게 해결해 보고자 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마기란 누구에게나 위험한 것이다. 뒷일 따윈 걱정하지 않게 만드니까.
파아앙!
구른 발에 땅이 파헤쳐짐과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한 줄기 빛처럼 쏘아져나갔다.
“대주님! 어찌 된 것입니까? 갑자기 퇴진이라니요?”
“고수다! 우리가 감히 견주어 보지도 못할 만큼 강하다! 일단 자리를 피하고, 다음을 준비한다!”
“예? 고수라구요?”
“묻지 마라! 지금은 도주에 전력을다해…… 어?”
“……”
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천보를 향해 고개를 돌렸던 사일화가 눈을 부릅떴다.
천보의 옆.
별안간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처, 천.”
쫘까아짝!
“……”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도 못했다.
그는 이미 찢어져 버렸으니까.
스산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손길에.
“너, 내가분명히 경고했지? 그냥 조용히 꺼지라고.”
“……”
“무시한 건 네놈이야!”
순간 어둠이 허공 중에 던져진 투망처럼 눈앞을 확 뒤덮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천보도, 다른 수하들도.
그리고 그 순간, 사일화는 문득 그와 비슷한 무공 하나가 생각났다.
천산(天山).
마교가 터를 잡기 전에 그곳에 살았던 괴물들이 있었다.
마교는 오랜 시간 그들과 반목했고, 당대의 교주에 이르러 그들을 천산의 북쪽 멀리까지 쫓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들 사이에서 살수들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한 인물이 사용했던 무공.
암천우(暗天雨), 검은 밤에 내리는 비.
어둠 속에서 내리는 비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검이 닿는 모든 곳을 피로적신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서, 설마…… 천산마녀?”
“호오? 아직도 그 이름을 아는 새끼가 있네?”
“……!”
웃음과 함께 찾아온 인정.
하면 지금 이 여인이……?
“우리 할머니야.”
“……”
“하지만 걱정 마. 할머니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강하니까. 기대해도 좋을거야.”
향이는 잔인할 만큼 활짝 웃었고, 사일화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이런…… 빌어먹을…….
쏴아아아!
비가 쏟아졌다.
부슬비가 아니라 소낙비였다.
그리고 사일화의 전신에 수없이 많은 예기가 파고들었다.
그게 끝이다.
너덜너덜해진 사일화는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퍽, 퍼퍼퍼퍽!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바닥에 처박히는 시신들을 바라보던 향이가 마기를 가라앉히며 공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젠장…… 망할 자식들을 뒤쫓느라 너무 멀리 와 버렸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삼공자가 혹시나 천주문주를 놓치 거나 하진 않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다.
만약 여기서 천주문주를 놓치면, 다음엔 오십여 명 정도가 아니라 천주문 전체와 싸워야 할 테니까.
“젠장, 그러니까 경고할 때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우둑, 파아앙!
머리를 긁적거린 향이가 왔던 길로 쏜살같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