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99
“총타주님!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조금 전의 침입자 놈이다.
운학에게 입은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가 거한의 앞을 막아섰다.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
침입자와 비슷한 복장을 한 이들도 동조하며 나섰다.
그때,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거한의 뒤에서 또 다른 인물이 걸어 나왔다.
짜아악!
“화산의 젊은 도사 하나도 못 당해낸 놈이 뭐가 어째? 네놈이 그러고도 호객이란 말이냐!”
“……”
“썩 물러나라!”
냅다 따귀를 얻어맞은 터라 화가 날만도 하지만, 호객이라 불린 자는 굳은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호객(豪客)?
호걸, 혹은 호탕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딜 봐서?
다짜고짜 객점 문을 부수고 칼을 휘둘러 대는 놈이 호걸은 무슨?
한데 조금 전, 침입자 놈이 분명 거한을 총타주라 칭했다.
무림에서 그런 직함을 쓰는 이는 딱 두 명뿐이다.
장강을 주름잡는 수적 패의 대장과…….
“노, 녹림?”
“그렇소. 저자가 녹림왕이오. 그 뒤의 무인들은 녹림의 최정예인 호객이고.”
“……”
혼잣말에 가까웠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운학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해 주었다.
녹림왕 종리강.
변변한 땅문서 한 장도 없이 이 산도 내 산, 저 산도 내 산이라 천명한 산적들의 우상.
사파의 맹주 중 한 사람이자, 모래알처럼 많은 무림인 사이에서 강기를 깨달은 몇 안 되는 절대고수가 바로 그였다.
하아, 젠장…….
왜 찾아와서 다짜고짜 행패를 부린 것인지 감이 왔다.
자신이 털어 먹은 청화산 패거리 때문일 것이다.
그가 녹림왕의 형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제 의제가 처맞아서 병석에 누웠으니, 열이 잔뜩 받은 것이 분명했다.
“삼공자, 일단 물러나 계시오. 이 일은 내가 처리토록 하리다.”
“……”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낸 운학이 능운비의 앞으로 나섰다.
그 역시 녹림왕이 찾아온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능운비가 청화산 패거리를 습격했을 때 이미 지금의 상황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맡기는 수밖에.
사고는 자신이 쳤으나, 입장이 난처한 것은 정무맹의 명을 받은 그일 테니까.
“화산의 도사, 운학이 녹림왕 종리강 대협을 뵙습니다.”
“……”
능운비를 막아선 운학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척이나 공손한 인사였다.
“누가 지금 니 이름이 궁금하대? 개소리 말고 비켜!”
“……”
운학의 공손함이 무색한 반응이었다.
종리강이 당장에라도 살수를 쓸 듯한 기세를 뿜어 대자, 호객이라던 무인의 따귀를 후려친 이가 앞으로 나섰다.
“형님.”
“뭐!”
“오면서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게 맡기신다구요.”
“이런 썅!”
“형님!”
“끄응, 젠장……”
“감사합니다.”
종리강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려 버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내가 운학의 앞으로 나섰다.
“녹림 총채의 대총관 탁추요.”
“아, 눈매가 부리부리하신 것이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금전표(金錢?)셨군요?”
“오, 화산의 검룡께서 나 같은 잡졸까지 알아주시니 영광이외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녹림 열여덟 호걸 중에 문무를 겸비하셨다는 탁 협(俠)의 이름이 사해를 떨어 울리는 것을요. 당가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전표술은 가히 일절이라 들어 평소에도 흠모하던 참입니다.”
“헛헛, 칭찬이 듣기 좋소.”
금싸라기를 가득 덧붙인 듯한 운학의 추켜세움에 탁추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운학은 녹림이 능운비와 부딪히는 것을 막아야 했고, 탁추는 종리강이 직접 나서서 사고를 치는 것을 막아야 했으니까.
마교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정파와 척을 질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들은 두 세력의 대변가이자 유능한 협상가가 되어야 했다.
이 사태를 무마할 합리적인 방안을 찾기 위해서.
“그나저나, 녹림왕께서 이 누추한 섬서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탁 협도 모자라 녹림의 최정예인 호객 스물까지 대동하시고요.”
운학이 모르는 채로 일관하며 종리강의 뒤편에 시립해 있는 흉흉한 기세의 무인들을 힐끗거렸다.
“무슨 일은? 그야 귀하와 함께하고 있는 이가 일으킨 소란 때문이지요.”
“음, 청화산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그렇소. 검룡께서 아실진 모르겠으나, 청화산의 전일석이가 내 막냇동생이라오.”
“저런, 제가 견식이 일천하여 미처 그걸 몰랐군요.
영문 모를 표정까지 동반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알고 그랬다고 하면 어떤 놈이 좋아하겠는가?
당장에 칼부림 시작이다.
하지만 이미 그러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탁추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요. 이름 높은 검룡께서 심산유곡에 숨어 사는 이들을 어찌 다 기억하시겠소?”
“……”
뼈가 잔뜩 담긴 말에 운학이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그분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대충 ‘모르고 한 일이니 양해 부탁한다.’라는 말뜻이었다.
“그거 고마운 말이오. 한데, 기억은 기억이고……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
“검룡께서는 부디 능운비라는 자를 내어 주길 바라오.”
탁추가 더는 돌리지 않고 본론을 꺼내자, 운학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탁 협께서 어떤 마음이실지는 압니다. 하나, 그것은 아니 될 말입니다.”
“아니 된다?”
“그렇습니다. 녹림에 적잖은 폐를 끼치게 되었으나, 능 공자는 정파의 손님이십니다.”
“그래서요?”
“어찌 주인 된 자가 손님을 함부로 내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헛헛, 그리 말씀하시면 곤란한데요?”
탁추가 종리강을 힐끗 쳐다보곤 다시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듯, 전 채주는 녹림왕의 의제입니다. 의리 하나로 살아오신 녹림왕께서 어찌 나오실지 모르시는 것은 아니지요?”
“유감스러운 일이나, 설마하니 정파와 척을 질 생각은 아니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
“필요한 보상을 말씀하시면 제가 맹에 건의토록 할 테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그만 돌아가 주시길…….”
운학이 다시 한번 양해를 청하자 탁추가 미간을 찌푸렸다.
운학의 입장을 어찌 모를까?
그들로서도 마교와 마찰이 생기는걸 원치 않는 것이다.
더하여, 사실 그 정도가 좋다.
다친 녀석은 어쩔 수 없으나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고 하였으니, 산채에서 털어 간 재물에다 부상자들에 대한 위로금과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요구하면 된다.
문제는…… 자신의 의형인 녹림왕이 들어줄지 말지다.
“하! 듣자 듣자 하니 뭐라고 씨부렁 거리는 거지?”
역시나…….
자신에게 협상을 맡기고 듣기만 하던 종리강이 눈을 부릅뜨며 참견해 왔다.
“혀, 형님. 아직 이야기가……”
“탁추!”
“형님……”
“내가 지금 보상이나 받자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아?”
“하지만 잘못하다간……”
“잘못하다가 뭐? 정파와 싸워야 할까 봐? 아니면 마교랑 싸우게 될까봐?”
“……”
“내가 지금 그딴 걸 신경 쓰게 생겼냐? 막내의 사지가 박살이 나고, 산채가 털렸는데?”
종리강의 말에 탁추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탁추. 네 능력도 알고 네 마음도 알겠다만, 협상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
“웬 애새끼가 나타나 이 녹림왕의 영역에서 깽판을 쳤는데, 돈 몇 푼 받고 물러나면 남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냐?”
“……”
“물러나 있거라, 탁추. 때론 말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란 것도 있는 법이다.”
탁추는 더 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자신에게 초반 협상을 맡긴 것까지가 종리강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인내심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어 달라 했고, 운학은 거절했다.
협상 결렬이다. 더는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싸울수밖에…….
“이봐, 화산의 애새끼.”
“대협.”
“큭, 산적 떼를 발밑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는 도사가 그 두목 된 자에게 대협이라니?”
“……”
“내 화산검선의 이름을 봐서, 너는 봐주마. 하지만 더는 안돼.”
종리강의 서늘한 눈길에 운학이 마른 침을 삼켰다.
말투는 시정잡배나 다름없고 행동은 가볍기 짝이 없으나, 그 강함을 어찌 모를까?
무림 삼재(三災).
수재, 화재, 풍재라는 대삼재도 아니요, 전란, 기근, 질병이라는 소삼재도 아니다.
그저 존재만으로 무림에 크나큰 재앙이라 불리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종리강이었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자.
그 이름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운학이었기에, 어떻게든 이 사태를 무마하고 싶었다.
“대협, 원하시는 만큼의 보상을 위해 제가 어떻게든……”
“아니야, 아니야. 보상? 그딴 거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
“능운비, 그 개자식만 내놔.”
“아니 될 말입니다!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어찌 될지, 녹림왕께서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
운학의 거듭된 항변에, 종리강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겨울이 서둘러 찾아온 듯 주위가 서늘해졌다. 사위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한 종리강의 기운 때문이었다.
“마교가 생난리를 피우겠지. 아마 정파에서도 나에게 책임을 돌리려 할테고.”
“……”
“그런데 내가 그딴 걸 무서워할 것 같아? 내가 지금까지 참고 있는 건 단지 내 의제 탁추의 간곡한 청이 있어서였다. 그러니 그만 물러나라. 화산의 이름에 베푸는 호의는 여기까지다.”
까드득, 퍽, 퍼퍽!
종리강이 걸음을 내딛자, 부분이나마 남아 있던 객점의 마룻바닥이 산산이 부서져 튀어 올랐다.
걸음과 함께 밀려드는 그의 기세에, 운학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막아야 하는데……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이리되면 결국…….
어떻게든 종리강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고 여긴 운학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스승 화산검선이 가르친 화산의 정수, 자하(紫霞).
완성을 이루지 못했기에 함부로 사용했다간 자칫 스스로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나, 지금 녹림왕을 멈출 방법은 그뿐이었다.
비록 아직은 의기의 경지에 불과하나, 자하를 사용한다면 아무리 강기의 무인이라 할지라도…….
휘이이이.
일전을 각오한 운학이 몸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힘을 깨우기 시작했다.
턱.
“……?”
그런데 그 순간, 능운비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 물러나지?”
“……느, 능 공자?”
“나만 있으면 된다잖아.”
“아니 될 말이오!”
“됐어. 그만큼 노력했으면.”
“하지만 저자는……”
“알아. 딱 봐도 강해 보이는걸? 기세만 닿았을 뿐인데도 몸이 저릿저릿해.”
“……”
능운비가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운학을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이 상황에 웃음이라니?
그가 종리강이 뿜어내고 있는 힘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삼공자님.”
“주군!”
능운비가 운학을 지나치자 향이가 그 앞을 막았고, 주승과 왕천이 고개를 저었다.
종리강의 무위를 직접 보았으니 당연하다.
막으려는 것이다.
왕천과 주승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려는 것이고, 향이는 대신하여 싸우려는 것이다.
그녀가 교주에게서 받은 임무가 무엇이던가?
능운비를 지키는 것.
아직 정확한 실력은 모르지만, 상대가 녹림왕이라도 그녀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숨을 순 없었다.
자신이 친 사고였고, 애초에 녹림왕의 의제라는 사실을 알고 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산적이니까.
상대가 강하다고?
그런 건 뜻을 굽힐 이유 따위가 못된다.
그것이 자신의 ‘대의’다.
언젠가 ‘그분’ 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날,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교주께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하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다 여기는 그가 제자의 못난 짓을 두고 보겠는가?
그 성격에 분명 복날 개 패듯 패고도 남는다.
처음에 운학을 막지 않았던 것은 종리강이 제 의제에게 그랬듯, 그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삼공자, 상대가 너무 강합니다.”
향이가 한사코 자신을 말리자, 능운비가 종리강을 쳐다보며 말했다.
“향아. 왕천, 그리고 주승.”
“……”
“내가 수하들을 방패 삼는 못난 놈이길 바라는 거야?”
“……”
“알아. 저자가 강한 거. 하지만 때론 알고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지금은 내가 그대들의 수장이니까,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해.”
능운비는 주승과 왕천을 흘끗 보고는 향이의 어깨를 두들기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종리강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능운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