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79
#1078.
찾아내다 (3)
이현수가 가만히 김명찬을 바라보았다.
‘이 영감님, 장난 아니시네.’
근육이 절로 조여진다.
딱히 위협을 가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할 말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천하의 이현수를 긴장하게 만든다.
‘예전에 황 회장님을 뵈었을 때의 느낌 같군.’
물론 그때만큼의 패기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사람을 절로 압도하는 힘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석동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에게도 정치인으로서의 힘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김명찬을 만나보니 석동수는 애송이였다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물론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저희는 그럴 의사가 없습니다.”
이현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개입은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현수 씨라고 했던가요?”
“예, 총리님.”
“정치인이 입에 가장 잘 담는 거짓말이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김명찬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입니다.”
“…….”
말문이 막힌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다른 방법은 언제나 있습니다. 다만, 조금 귀찮고, 시간이 더 걸릴 뿐이죠.”
“……예.”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그만한 수고를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석동수의 일도 해결하려고 했다면, 결국에는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진호가 나서면 어떻게 될지 이현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그 방법이 가장 간단하고 효율적이기에 선택했을 뿐이다.
“세상을 뒤흔든 수많은 일들은 그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나라가 너무 혼란스러우니 어쩔 수 없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군의 진격이 불가하니 어쩔 수 없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야 한다.”
“아…….”
김명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 그럴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그 어쩔 수 없음이 거기에서 끝나느냐입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정리했다 하더라도 민주적으로 해결한다면 영웅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하더라도 고려를 지켰다면 충신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보통은 ‘어쩔 수 없다’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게 문젭니다.”
김명찬의 눈빛이 날카롭게 이현수를 훑었다.
“어떻습니까, 총회는? 당신들의 ‘어쩔 수 없다’는 여기에서 끝난 겁니까?”
이현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면도날로 썰어 대는 느낌이군.’
이제야 왜 정계에 괴물이 산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명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현수를 난도질한다. 반박의 여지조차 남는 게 없다.
이현수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총리님, 사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대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번 석동수 장관에 대한 일은 깊은 사유 끝에 나온 게 아닙니다.”
“그 말은?”
김명찬이 가만히 이현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총회라는 곳의 체계는 합리적이라기보다는 회주의 의도에 따라 급변할 수 있는 체계다, 이런 의미입니까?”
“아, 그건…….”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아, 이 병신.’
할 수만 있다면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갈겨 버리고 싶다. 지금까지 누구와도 대화를 하면서 일방적으로 말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김명찬은 이현수를 말 그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대화를 시작한 지 5분도 안 됐는데 밑천까지 다 털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까지는 아닙니다.”
“다시 말해…….”
김명찬이 가라앉은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든, 회로 돌아가 회주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모든 이야기가 다 엎어질 수 있다는 뜻이군요.”
이현수의 근육이 좀 더 오그라들었다.
“그런 얼굴 할 것 없어요. 생각보다 흔한 이야기니까요. 국내 대기업이 얼마나 총수 독재인지를 아신다면, 그리 민망한 얼굴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거긴 정말 마굴이죠.”
쥐었다 풀었다, 그야말로 능수능란하다.
잔뜩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면 저 말에 헤헤, 웃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현수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이런 모습도 보이면 안 되겠지만, 땀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예.”
“총회의 회주님과 따로 만나뵐 수 있을까요?”
“……회주님과요?”
“예.”
이현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아, 직접 만나는 게 어렵다면 전화라도 상관없습니다.”
“저, 전화요?”
“예. 이왕이면 총회의 회주에게 확답을 듣고 싶어서 말이죠. 총회라는 곳이 회주에게 크게 좌우되는 곳이라면, 그분의 대답을 직접 듣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이현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총리가 뭘 원하는지는 이해했다.
“그럼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회주님과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세요.”
이현수가 고개를 꾸벅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김명찬이 식어버린 커피를 들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차 한 잔 내주지 않았군.’
여유로운 척을 했지만, 긴장하고 있던 건 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상대하는 사람은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국 무도 총회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그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뒤흔들릴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이야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이 작은 씨앗이 발아한다면 수십 년 뒤에는 어떤 모양으로 자라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이현수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회주님께서 지금 통화가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만나야 한다면 따로 약속을 잡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
“굳이 약속까지 잡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중요한 건 얼굴을 맞대는 게 아니니까요.”
“예. 그럼 지금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예.”
이현수가 몸을 돌려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강진호인가.’
김명찬이 마른침을 삼켰다.
강진호라는 이름이 그에게 주는 울림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단순히 석동수의 일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석동수의 일 이전에 문제는 이미 벌어졌다.
‘따로 연락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강진호라는 이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그 이중걸에 비해 딱히 큰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김명찬 총리가 생각을 바꾼 것은 영국에서 온 연락을 받은 이후였다.
‘우호 관계라니…….’
딱히 별일도 없는데 수상 관저에서 연락이 와 양국의 우호를 증진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그동안 영국과의 관계가 딱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영국에서 ‘강진호’라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만한 거물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인계에 휘둘리는 다른 나라들을 비웃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의 배 속에서 시커먼 것이 자라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김명환은 그 어둠의 실체와 대면해야 한다.
“연결됐습니다.”
이현수가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슬쩍 이현수와 시선을 교환한 김명찬이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총리 김명찬입니다.”
평소 김명찬은 자신의 직급을 내세우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직급이 먼저 나간 것은 상대에게 밀리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생각 때문일 것이다.
[강진호입니다.]“……예.”
하지만 상대는 담백하게 나온다.
김명찬은 이 순간 자신이 밀렸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자신은 직급을 내세우는데, 상대는 담담하게 이름만을 내민다. 누가 누구를 더 의식하고 있는지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대화는 이제 시작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연락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바쁘신 분 오래 잡고 있을 생각 없으니,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김명찬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스타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현수와는 다르게 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강진호라는 존재 자체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석동수 장관의 일 때문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예.]끌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직설로 찌른다면, 이쪽도 직설로 간다.
“이번에 석동수 장관의 일로 폐를 끼친 것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석동수 장관은 한 나라의 장관입니다. 그가 옳지 않은 선택을 했다고는 하나, 법이 아닌 무력으로 그를 억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한 나라의 총리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계속하세요.]“이번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에 대한 회주님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토하듯 내뱉은 말에 잘못된 것은 없는지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조금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오해?”
[얽히지 않기를 원하는 건 그쪽만이 아닙니다. 이쪽도 정계와는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일만 해결된다면, 다시는 정계 쪽과 엮일 일이 없을 겁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확실합니까?”
[세상에 확실한 건 없습니다.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뿐입니다.]“으음…….”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이쪽에서 뭔가를 하려 드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약속드립니다.]‘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이라…….
그 기준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여기에서 더 나가는 것은 무리수였다. 일단 저 말을 이끌어낸 이상,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 괜히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다가는 풀 속의 뱀이 머리를 치켜들 수도 있으니까.
완전한 분리는 이뤄내지 못했지만, 시간을 벌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회주님의 말을 믿겠습니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 이쪽에서 도와드릴 일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서 해야 할 일도 있겠죠.]“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이현수가 전화기를 회수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명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 다행이군.’
이미지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젠틀하다. 물론 짧은 전화 통화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우리 쪽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이현수가 서류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든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보고서를 김명찬 쪽으로 가볍게 밀어놓았다.
“저희 쪽에서 파악한 친중파 명단입니다.”
“…….”
“회주님께서는 이들에 대한 처리를 원하십니다.”
김명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마귀 같은 놈들.’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을 구실로 원치 않는 이들을 밀어내겠다는 소리다. 문제는 김명찬으로서는 이 제안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 밀어낼 수는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밀어낼 수 없는 이들은 저희 쪽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이보시오, 이현수 씨.”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 불법적인 방법은 아닐 테니까요.”
어느새 여유를 되찾고 싱긋 웃는 이현수를 보며 김명찬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하는 짓인지.’
물러서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김명찬이 눈을 딱 감고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