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0
#109.
고민하다 (4)
“이 시간에 웬일이니?”
강진호는 원장 수녀님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렇구나.”
무슨 일인지는 전혀 모르는 눈치지만, 원장 수녀님은 그저 강진호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좋다는 듯 웃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려무나.”
“예.”
“냉장고에 마실 것이 있는데, 좀 마시겠니?”
“괜찮습니다.”
“날도 더운데.”
“그보다 원장님.”
강진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원장 수녀님이 입을 닫고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병원을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 없으십니까?”
“병원을?”
“예.”
원장님이 미소를 지었다.
“진호야, 이 병은…….”
“네. 알고 있습니다. 병을 고쳐 보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보육원에서 좀 더 가까운 병원이 있습니다. 시설도 여기보다 괜찮습니다. 개인실이니 애들이 찾아오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구요.”
하지만 원장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욕심이란다.”
“원장님.”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있단다. 평생을 내 욕심을 채우고 살았는데, 마지막까지 내 욕심을 채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니?”
“욕심을 부리신 적이나 있으십니까?”
“그럼.”
원장님은 조금은 아련한 얼굴로 뭔가 회상하는 듯했다. 그런 원장님의 분위기를 깰 수 없어 강진호는 숨을 죽였다.
“아이들은 천사 같았단다. 나는 그 천사들을 내 품에 품고 싶었지. 그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반대했지.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것만이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게 욕심입니까?”
“욕심이란 건 별다른 게 아니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욕심이지. 나는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혔으니, 지독한 욕심쟁이지.”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피해를 입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장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준 피해보다 아이들이 원장님에게 받은 은혜가 훨씬 많을 겁니다.”
아무 말 없이 강진호의 말을 듣던 원장님이 조금은 따뜻한 눈으로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예.”
“고맙구나.”
강진호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하지만 나는 병원을 옮길 생각이 없단다. 마지막까지 그분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단다.”
“원장님.”
강진호의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원장님이 마지막에 생각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이들입니다.”
“…….”
“본인과 아이들만 생각하세요. 다른 것들은 짊어질 필요 없습니다.”
원장님은 조금은 놀란 듯했다.
그가 아는 강진호는 언제나 한 발 뒤에 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묵묵히 해내는 이미지였지, 이렇게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박유민이 말하는 것만 보아도 뭐든 주어진 것은 척척 해내는 사람이지만 스스로 뭔가를 하겠다고 일을 벌이지는 않는 타입 같았는데,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게 되니 그동안 사람을 잘못 보아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을 것 같니?”
“꼭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호야.”
원장님이 가만히 손을 내밀자 강진호는 그 손을 맞잡았다.
“세상에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단다.”
“…….”
“진호가 내 생각을 해주는 것은 참 고맙구나. 하지만 세상에는 인력으로 안 되는 일들이 있단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힘들어질 거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래. 노력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 있지.”
원장님은 강진호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예.”
원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편히…….”
그 순간, 원장 수녀님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럭!”
입에 손을 대고 몇 번이나 기침을 한 원장님의 입가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객혈?’
아니, 토혈이다.
위장에서 올라온 피가 입으로 나오고 있었다.
“간호사!”
벌떡 일어나 간호사를 부르는 강진호를 원장님이 만류했다.
“괜찮다.”
“일단…….”
“괜찮단다, 진호야.”
살짝 상기된 얼굴로 강진호를 말린 원장님이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았다.
“바쁜 사람들 괜히 부르지 말거라.”
이런 상황에서까지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 미련스럽게 느껴지는 강진호였다. 하지만 그것이 원장님이 살아온 삶이라는 것을 알기에 입술을 꾹 눌러 튀어나오려는 말을 잡았다.
“그래. 병원을 옮겨야 한다면 옮기면 되는 거겠지. 진호가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지?”
“예.”
“그래, 그럼 그러려무나.”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원장님을 바라보다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속이 끝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괜히 나 때문에 휴가 나와서도 쉬지도 못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강진호는 미소를 짓는 원장 수녀님께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왜 저분에게 집착하는 걸까?’
이제 와서 착한 척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중원에서 수없이 많은 피를 손에 묻힌 강진호다.
이제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나 그가 쌓은 업보가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낱 꿈으로 치부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짊어져야 할 것은 제대로 짊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그녀만은 이보다 나은 마지막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 강진호가 본 진정한 선인(善人)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이곳에서도, 중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강진호의 지론이었다.
물론 현실은 언제나 쓰디쓴 법이다. 선한 사람일수록 더 비참한 끝을 맞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눈에 닿는 사람만이라도 조금 더 나은 보상을 해주고 싶은 것이다.
‘할 수 있는 것까지는 해본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으니까.
“오빠아아아아!”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강은영이 집으로 들어왔다.
“왔니?”
폴짝 뛰어 그에게 안기는 강은영을 보고 있자니 철없는 애를 밖으로 돌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제 오려고 했는데,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못 왔어.”
“그래?”
강진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집에 들어오지도 못할 정도로 바쁘게 스케줄이 잡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오, 오빠, 그런 거 아냐.”
강은영이 강진호의 표정을 알아채고는 사태를 수습했다.
“내가 바쁘게 굴려 달라고 한 거야.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지.”
“흐음…….”
그러나 강진호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너, 앉아봐.”
“……넵.”
강은영은 즉시 자리에 앉았다.
강진호가 말을 하자마자 강은영에 관련된 모든 컨셉과 스케줄이 변경되는 것을 눈으로 본 뒤, 강진호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실감한 것이다.
막말로 강진호가 한마디만 한다면 그녀의 연예계 활동이 금지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강은영은 납작 업드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은 갈 거지?”
“……꼭 가야 합니까?”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야 한다에 한 표.”
“나도 가야 한다에 한 표.”
“가라.”
부모님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는 강진호였다.
“그런데 사실 연예 활동 하면서 대학을 가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는데요.”
강은영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자 백현정이 딴지를 걸었다.
“요즘은 연예인 특례 입학인가 뭔가로 다들 대학 잘도 가더구나.”
“그래서 그 전공 살리는 애들은 하나도 없잖아. 솔직히 나는 그거 시간 낭비 같아. 그냥 간판 하나 거는 거지. 연예인 활동하는 애들이 대학을 나가면 얼마나 나가겠어. 차라리 그 시간에 활동에 전념하는 게 더 건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진호는 강은영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대비한다고는 하나 이미 현장에서 활동하는 아이돌이 연극영화과 같은 곳에 들어가서 연예인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해외의 연예인이라면 연예인 활동하는 도중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해서 배우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간판과 대학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래도 대학은 가는 게 좋지 않겠니?”
아버지의 말에 강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확실하게 아니라고 봐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연습생 생활 한다고 공부를 제대로 못 한 제가 대학을 간다고 뭐 그렇게 크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구요. 제가 기초가 없잖아요.”
“음…….”
강진호는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양쪽 말에 다 일리가 있다.
“그건 조금 천천히 생각해 보자.”
아무래도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정보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다만…….”
강진호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너는 가수지?”
“응?”
“내가 알기로 너는 작사도, 작곡도 못하고, 그냥 남이 주는 노래를 남이 주는 안무에 맞춰서 부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와, 이런 사람이 오빠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가차 없는 말이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냐. 하지만 그건 네 인기를 네가 스스로 만들어갈 수 없다는 것과도 같다. 그렇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오래 활동하는 선배님들도 많아. 자기 개발을 해서 작곡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나는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럼 다른 방향도 염두에 넣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내 생각에 네가 원하는 건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그냥 스포트라이트일 뿐이니까.”
강은영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확실히 뜰 수만 있다면 연기든 아이돌이든 가수든 뭐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깊이 있는 가수가 되라는 말은 안 한다. 그렇지만 하나는 기억해 둬. 지금부터 10년 뒤에도 지금처럼 젊음을 무기로 아이돌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거야. 아이돌 출신으로 10년 뒤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다. 오빠는 네가 그때도 생각하며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알았어, 오빠.”
강은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달 만에 보는 동생에게 처음 하는 말이 잔소리라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인 줄로 아뢰오.”
“잔소리가 아냐.”
“네이, 네이.”
강은영이 피곤해 죽겠다는 듯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이고, 미래는 미래고, 지금 당장 배고파요.”
“밥 먹자.”
“헤헤, 엄마 밥이 그리웠어.”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가 돈다. 강진호는 묵묵히 밥을 먹고 후식으로 아버지가 내린 커피가 나왔을 때쯤 입을 열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응?”
아버지가 강진호의 진지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우리 아들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중요한 이야깁니다.”
“그래, 말해보거라.”
강진호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확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단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으으응?”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뜬금없는 소리에 강유환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