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19
#1218.
변화하다 (3)
배 위에는 이사진들만이 남았다.
방진훈은 거리를 둔 채 그들을 경계하는 일본인들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다 쓸어버리면 안 됩니까?”
“번거로운 건 사실이지.”
바토르도 동의한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조금 다른 의미를 품었다.
“하지만 주인이 하는 일이다. 주인이 하는 일에 이리저리 불평을 늘어놓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야.”
“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투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도 회주님이 명령만 하면 바다에 뛰어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다만…….”
방진훈이 살짝 노기가 담긴 눈으로 일본인들을 바라보았다.
“기세 좋게 남의 나라를 침공하러 들어온 놈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준다니, 이것도 짜증 나는 일 아닙니까?”
“한심하긴.”
바토르가 혀를 찼다.
“전쟁은 의욕이나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그 전쟁에서 최대한의 것을 얻어내야 한다. 지금 주인이 하는 것처럼.”
“알죠, 압니다만.”
위긴스가 거들었다.
“저도 방 이사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바토르의 눈이 꿈틀했다.
“공감한다고?”
“예. 프랑스 놈들이 영국에 쳐들어와 사람을 죽여 대고 난동을 피웠는데, 항복한다고 해서 살려둘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바토르가 허허, 웃고 말았다.
위긴스도 총회에 오더니 많이 과격해졌다. 처음에는 뱃속에 구렁이를 키우고 있는, 속이 검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속이 검은 건 마찬가지겠지.’
이제는 겉도 검어진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협상을 해야 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바토르 님의 말대로 전쟁에서 저들을 죽이고 약화시킨다고 해도 얻어내는 전리품이 없다면 기분만 좋고 말 테니까요. 게다가…….”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저들을 살려 보내는 것이 꼭 저들에게 좋은 일도 아닐 겁니다.”
“아니, 뭐, 물론 그렇겠지만,”
방진훈이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지금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감정이 그렇지 않은 걸 어쩌겠는가.
“쪽발이 새끼들.”
방진훈이 살짝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는 바닥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다.
“회주님이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그래도.”
그때였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놈들.”
세 사람의 시선이 슬쩍 뒤를 향했다. 장민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감히 마존께서 하시는 일에 건방지게 입을 놀리다니. 그 주둥아리를 찢어놓아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구나.”
“…….”
“…….”
“…….”
세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키노리의 표정은 더없이 기이했다.
넋을 놓은 것도 같고, 분노에 찬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지금 무척이나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시선과 도무지 진정하지 못하는 손가락이 그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회주님.”
그럼에도 아키노리는 신니치카이의 이인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동요는 동요.
협의는 협의.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강진호의 눈썹이 꿈틀댄다.
예전의 강진호였다면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아키노리의 목을 쳐 날려 버리고 저 배를 바다에 수장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강진호는 그 이유를 들어줄 정도의 인내심은 갖고 있었다.
“이유는?”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강진호가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살짝 불편한 얼굴로 다리를 두드린 이현수가 물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설사 제가 대표로 휴전 협정을 맺고 돌아간다고 해도 일본 본토에 배가 떨어지는 순간, 제 목이 잘려 나가고 협정은 무효화될 것입니다.”
“…….”
아키노리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신니치카이는 회주님의 손에 무너졌습니다. 그 말은 저 역시 힘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신니치카이의 지원 없이 저들을 지배하고 할당된 상납금을 준비하는 건 제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겠죠.”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현실적인…….”
“다만, 우리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국장님께도 매우 좋은 제안입니다.”
“……날 놀리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이현수가 가볍게 웃는다.
“너무 급작스레 상황을 받아들이다 보니 아직 이해가 덜된 모양입니다만, 왜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니치카이의 힘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국장님 위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아키노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고 보면 맞는 말이다.
수령이 죽었다. 그리고 수령의 수족들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1진에 합류한 지도부들도 모두 죽었다. 다시 말하면, 신니치카이의 상층부라고 할 만한 이는 아키노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마시로구미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으음…….”
“다시 말해 지금의 일본은 무주공산. 힘을 가진 자가 가볍게 지배할 수 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아키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나만 빼고.
“하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힘을 잃은 제가 저들을 지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국장님께는 힘이 있습니다.”
“……예?”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힘이. 세상 그 무엇보다 잔혹하고 강대한 힘이. 일본의 모든 구미를 짓밟고 억누를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이 말입니다.”
이현수가 더없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총회가 당신을 돕습니다. 총회가 당신을 지원할 겁니다. 그럼 당신은 신니치카이의 수령조차 오르지 못한 일본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습니다.”
“…….”
“물론 총회에 충성을 바치는 대가이기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일본에서만이라도 최고가 될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대가는 치를 만하지 않습니까?”
아키노리의 눈이 흔들린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이현수가 조용히 가다가 아키노리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잘 생각하십시오, 국장님.”
“…….”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수도 없이 죽어간 이들 중 하나가 될 뿐이고,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뿐입니다. 남 좋은 일만 시킬 뿐이죠. 자존심을 지킨 이는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금 누가 그들을 기억합니까?”
악마가 속삭이는 것 같다.
아니, 유혹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악마의 속삭임이 다 그렇듯, 이 말은 너무도 무시무시하면서도 달콤하다.
“여기서 물러서는 건 용기가 아닙니다. 그건 도피죠.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짐을 내팽개치고 도피하겠습니까?”
“나는…….”
“자.”
이현수가 미소 지었다.
“선택하십시오. 그저 반항한 이들 중 하나가 되어 죽어간 이천의 수에 하나의 수를 더할지, 아니면 일본의 지배자가 되어 새로운 미래를 꿈꿀지.”
아키노리가 입술을 깨문다.
그 모습을 보며 이현수가 나직하게 웃었다.
화술?
설득?
그런 게 아니다.
이미 아키노리의 마음은 예전에 정해졌다. 배 위로 올라온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그는 선택한 것이다.
좋은 말로는 공존.
적당한 말로는 항복.
그리고 적나라한 말로는 굴종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아키노리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 중 최적의 선택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굳건히 만들기 위해 강진호와의 대화를 요청했다.
이현수가 한 것은 그저 등을 조금 떠밀어 준 것에 불과하다.
아키노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런 후,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는 강진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총회에…… 그리고 회주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강진호가 담배꽁초를 튕겨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키노리를 향해 다가갔다.
“아…….”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아키노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고개를 들려 했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힘이 그의 목을 짓눌렀다.
쿠웅!
아키노리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상상할 수도 없는 압력이 머리를 짓누른다.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다.
“끄으으으…….”
감히 발악하지 못하고 신음하는 아키노리의 귀에 강진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높아.”
으르렁대는 듯한 강진호의 목소리.
그리고 그 말을 담담히 통역해 주는 이현수의 목소리.
그제야 아키노리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해가 부족하군.”
강진호가 아키노리의 머리에서 발을 뗐다.
그러고는 가만히 아키노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머리 굴리지 마. 너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제 생각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아키노리의 눈이 의문으로 물드는 순간!
덥썩.
강진호의 손이 아키노리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그러더니 그를 자신의 얼굴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강진호의 손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와 아키노리의 얼굴로 밀려 들어갔다.
“……!”
아키노리의 몸이 발작적으로 뒤틀린다.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불타는 듯한 고통.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고, 몸부림치려 했지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아키노리는 그저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봐라.”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나를 봐라.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
전신을 뒤덮는 격렬한 고통 속에서 아키노리가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붉음.
세상이 붉게 물든다.
그가 붉게 물든다.
모든 것이 붉게 물든다.
굳건한 정신은 무너지지 않는다. 혹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아키노리의 마음은 무너졌다. 아주 작은 균열, 미세한 틈새.
그 틈을 강진호가 파고들었다.
배 위에 올랐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모든 과정은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강진호의 힘에 흔들리고, 이현수의 말에 흔들리고,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던 욕망에 흔들린 이는 더 이상은 굳건하지도, 단호하지도 못하니까.
그 마음의 틈새가 붉게 물든다.
이윽고 아키노리의 전부가 붉게 물들어 버렸다.
“대답해 봐.”
강진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누구지?”
아키노리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강진호의 손이 떼어졌다. 순간, 바닥으로 엎어진 아키노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강진호.”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아키노리가 대답했다.
풀린 눈.
벌어진 입.
하지만 금세 그의 눈은 빛을 되찾았고, 입은 단호하게 닫혔다.
본래의 신색을 완전히 회복한 아키노리가 더 이상은 없을 극도의 공경을 담아 고개를 숙인다.
“나의 주인이십니다.”
강진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기억해라.”
선언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 내가 네 주인이다.”
요사스러운 밤의 바람이 그들의 품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