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31
#1230.
격동하다 (5)
“유민이는?”
“요즘 바빠요.”
“시즌 끝났잖아?”
“그래서 더 바쁘데요.”
“……그런데 왜 너 자꾸 존댓말하냐?”
한진성이 성적표를 살짝 움켜잡았다.
“지은 죄가 있어서 반말이 안 나옵니다, 형님.”
“그럼 계속 존대하도록.”
“……눼.”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시즌 끝났는데 더 바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이번에 우승했잖아. 형도 TV 나오더만.”
“음…….”
조미혜가 슬쩍 눈을 흘겼다.
“연하 누나랑 같이 갔더라? 이제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하던데? 그래도 괜찮아?”
“음.”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딱히 최연하와의 관계를 숨길 생각은 없다. 연예인에게는 스캔들이 치명적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기에 조심하자고 생각했을 뿐이다.
강진호야 아무래도 관계없지만, 최연하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강진호가 아니라 최연하가 나선 일이다.
거기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생각이 있겠지.”
“흐응…….”
조미혜가 콧소리를 냈다.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 말이다.
“여하튼 그래서 우승했는데, 우승하고 나니까 행사라든가 인터뷰 같은 게 쏟아지는 모양이야.”
“그래?”
“응. 안 그래도 요즘 그쪽이 좀 침체기였는데, 좋은 스토리 뽑였다고, 포장 잘해서 화제로 만들어볼 생각인가 봐.”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한 번 다른 분야에서 톱이 된 과거의 게이머가 지금의 대세 게임에서도 우승한다는 건 확실히 굉장한 일이었다.
“애들도 좋아하겠네.”
“말도 마, 형. 지금 애들 잠 안 자고 게임한다고 해서 난리가 났어. 자기도 프로 게이머 되고 싶대. 공부나 할 것이지.”
“유민이도 프로 게이머가 돼서 잘 먹고 잘사는데, 왜 막아?”
“걔들이 프로 게이머 되는 것보다 내가 의사 되는 게 빨라.”
“……못하게 해.”
“그러려고.”
듣자마자 이해가 가는 설명이다. 재능이 없으면 그 업계에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다.
“여하튼 그래서 정신없이 바쁜 모양이더라고.”
“시즌 끝났으면 좀 쉬는 게 좋을 텐데.”
“다 그렇지, 뭐. 상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쉴 시간 없잖아. 조금 쉬고 조금 마음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
경쟁하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그게 다 돈이야, 형. 프로 게이머 전성기가 얼마나 된다고. 일단 죽어라고 달려서 돈 쭉쭉 뽑아놓고 나중에 쉬면 돼.”
강진호가 흠칫한 눈으로 한진성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 아이가 이런 자본주의의 괴물이 되어버렸는가.
“그럼 유민이도 잘 못 오겠네?”
“응. 그렇지.”
“그래?”
강진호가 살짝 고민에 빠졌다.
한진성은 강진호와 꽤 친한 편이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가운데 가장 편한 아이 중에 하나였다.
그런 한진성이니 강진호에게 편하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이런 고민을 털어놓기도 쉽지 않을 게 빤하다.
‘대책이 필요하겠군.’
총회도, 보육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완벽한 시스템과 완벽한 운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는 완벽하다 생각한 것도 시대가 흐르면서 구식이 되고 낡기 마련이다.
강진호가 예전처럼 보육원에 자주 들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를 제때 캐치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보육원의 문제를 알아채고 이야기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일단 그러면…….”
그때였다.
벌컥!
문이 과격하게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응?”
“어?”
“여기 있었어요?”
“아…….”
문을 열고 들어온 최연하를 보며 강진호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최연하가 보육원에 자주 들른다는 건 이제 알고 있지만, 저 제집 같은 당당함은 뭐란 말인가.
“웬일로?”
“스케줄 끝나서 들러봤어요.”
최연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오셨어요?”
“누나, 오셨…….”
아이들이 반갑게 최연하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최연하의 반응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야!”
최연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얼굴이 조금 찌푸러진 것뿐인데 아이들이 부동자세를 취한다.
‘쩐다!’
강진호가 그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예전에 자신이 아이를 다루는 걸 본 다른 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뭔 냄새야?”
“……냄새요? 언니, 무슨 냄새요?”
“얘들이 냄새에 쩔었나! 보육원에 쩐내 나잖아! 창문 다 열어!”
“얼어 죽어요!”
“잘 생각해 봐. 얼어 죽는 게 나을지, 나한테 죽는 게 나을지.”
“……지금 당장 열게요. 얘들아, 빨리 창문 열어!”
순식간에 보육원이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아이들이 부리나케 달리며 창문을 열어 젖혔다.
“여기 공기가 왜 이래? 아무리 날이 추워도 그렇지, 환기 안 해?”
“……환기 많이 하면 보일러비 많이 나와요.”
“니들이 왜 돈 걱정을 해! 내가…… 아니, 저 양반이 있는데!”
최연하가 강진호를 가리키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무슨 반응이지?
“아니, 아무리 환기를 안 해도 그렇지, 무슨 냄새가 이렇…… 조미혜!”
“네, 언니!”
그 조미혜마저 바짝 얼어서 즉각 대답을 했다.
‘대단하다.’
강진호가 감탄한 눈으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마치 사나운 사자를 강아지처럼 다루는 동물 조련사를 보는 느낌이다.
“너, 왜 어제랑 같은 옷 입고 있어?”
“…….”
강진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제도 왔다 갔나?
조미혜가 당황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살짝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갈아입을게요, 언니.”
“아닌데? 니가 같은 옷 입은 거 처음 보는데? 네가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건 다른 애들은…….”
최연하가 가늘게 뜬 눈으로 한진성을 바라보았다.
“왜, 왜 저를 보세요?”
“아니다. 말을 말자.”
최연하가 다시 조미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명해 봐.”
“아, 아뇨. 오늘만 그런 거예요. 옷이 좀 덜 말라서.”
“덜 말라?”
“네. 그러니까…….”
최연하가 턱짓으로 조미혜를 가리켰다.
“안내해.”
“네?”
“세탁실로 안내해.”
“…….”
그러고는 강진호에게도 손짓을 했다.
“따라붙어요.”
“네.”
포스에서 완전히 밀린 강진호가 얌전히 최연하의 뒤를 따랐다.
“뭐야, 이거?”
세탁실을 가로지른 줄들에 널려 있는 옷을 본 최연하가 눈을 찌푸렸다.
여름에는 참 좋은 세탁실이다. 환기도 잘되고, 바람도 잘 들어서 빨래가 빨리 마른다. 하지만 겨울이 되니 바람이 잘 들어 빨래가 언다.
“이거, 이래서 빨래 어떻게 말려? 그동안은 어떻게 했어?”
“적당히 마른 다음 방에 옮기면 돼요. 그럼 풀리거든요.”
“습기가 있잖아.”
“그 정도야…….”
“젖은 옷 입으면 냄새나잖아!”
“조, 조심할게요.”
최연하가 눈을 희번덕댔다. 저리 눈을 흘기는데도 이쁜 걸 보면, 미모는 정말 타고났다.
“왜 미리 말을 안 해! 이런 건 언니한테 이야기를 바로 해야지!”
“죄, 죄송…….”
뭐가 죄송한지 모르겠지만, 조미혜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확실한 건 최연하와 같이 다니면 어디서 갑질당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진호 씨, 차 가지고 왔죠?”
“네? 아, 네.”
“가요.”
“어, 어딜요?”
“백화점, 아니면 가전제품 매장.”
“……거긴 왜?”
최연하가 슬쩍 세탁실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세탁실 좀 리뉴얼해야겠네. 사진 찍어요.”
강진호는 두말없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대체 무슨 용도로 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낫다.
“미혜도 따라와.”
“네.”
파워 워킹으로 앞장서는 최연하의 뒤를 힘없는 남자와 기죽은 여자가 뒤따랐다.
“아, 이인승인데?”
강진호가 당황하자 한진성이 강진호를 도와주었다.
“보육원 승합차가 밖에 있을 거야. 키 받아 가.”
“그래?”
“내가 받아다 줄게.”
한진성이 재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강진호가 한숨을 쉬고는 터덜터덜 최연하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 * *
‘손님이 영 없네.’
이규하는 하품을 하며 입구를 바라보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이 영 들어오지 않는다. 하기야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최근 들어 손님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다들 힘드니까.’
이해는 하지만, 이렇게 매출이 떨어지면 이규하도 힘들다. 영업 사원인 그는 최대한 많은 가전을 팔아 매출을 올려야 한다. 그래야 인센티브라도 좀 받아서 행복한 연말을 보낼 수 있다.
그때였다.
부우우우우웅.
주차장으로 차가 한 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응?’
오래된 승합차.
‘사러 온 건 맞는 것 같은데, 크게는 바라면 안 되겠네.’
차로 사람을 구분하는 건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업계에 몸을 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구분하게 된다.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은 그 분위기부터 다르니까.
차에서 내린 세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입구로 들어왔다.
‘응?’
이규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차와 사람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 영업용 승합차에서 내린 것치고는 사람이 과도하게 멀쑥하다.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이규하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 있으십니까?”
“건조기.”
“네! 건조기 이층…….”
“공기청정기.”
“네. 공기청정기도 이층…….”
“드럼 세탁기.”
“…….”
“대형 식기 세척기랑 로봇 청소기도.”
이규하의 눈이 살짝 떨렸다.
이규하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앞서서 들어온 여자가 뒤에 있는 남자의 휴대폰을 빼앗아 들더니, 사진을 열어 이규하에게 들이밀었다.
‘어? 이 사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선글라스와 모자로도 가려지지 않는 미모가 눈을 의심케 하는…….
“드럼 세탁기랑 건조기는 앵크로 올려서 여기 꽉 채울 거예요. 적당한 모델 있어요?”
……VIP 고객님이시다.
누군지가 뭐가 중요한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물론 있습니다! 없으면 제가 찾아서라도 오겠습니다! 2층으로 가시죠! 선일 씨, 여기 커피! 커피 뽑아와요! 당장!”
“예!”
“이, 이쪽으로 가시지요, 고객님. 안내하겠습니다.”
“네.”
“아, 세탁기를 사신다는 건…… 지금 있는 세탁기 옆에 놓으신다는 거죠?”
“아뇨.”
여자.
그러니까 최연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에 있던 세탁기들 모두 중고로 처분하고, 새 걸로 채울 거예요.”
“꽉?”
“꽉.”
이규하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저만한 공간이면, 여덟…… 아니, 열 대? 세탁기랑 건조기를 열 대씩?
이규하의 눈이 돌아갔다.
‘진짜?’
슬쩍 고개를 돌려 따라오는 여자를 스캔한다. 핸드백과 옷의 가격대를 대충 짐작해 본 이규하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어, 업체에서 쓰실 거라면 가성비 좋은 모델들이 있습니다. 대용량으로 가장 가성비가…….”
“저기.”
“예, 고객님!”
“성능 최우선으로.”
“…….”
최연하가 턱을 살짝 들며 말했다.
“가성비 같은 건 됐으니까, 제일 좋은 걸로 추천해 줘요.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데 갈 테니까.”
“…….”
이규하 34세.
인생에 다시없을 브리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