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8
#137.
징치하다 (2)
강진호는 꺼낸 책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흔히 볼 수 있는 연습장이었다.
하지만 선뜻 열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가를 보는 것이 어쩐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휴우.”
강진호는 연습장을 손에 들고 일단 포상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내려앉아 보일 리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 자리에 앉은 강진호는 연습장을 내려놓고는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침착해야 할 시간이다.
이 안에 무슨 내용이 있더라도 흥분해서는 안 된다. 흥분은 때로 스며드는 독과 같아서 모든 일을 망쳐 놓기도 하니까.
강진호는 가만히 연습장을 펼쳐 들었다.
첫 부분에는 딱히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부대의 각종 제원과 외워야 할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수첩이나 연습장에 써서 외우니까.
진짜 내용은 연습장이 반쯤 지났을 때 나왔다.
노수광 상병과 김학철 일병이 나를 좋게 보지 않는 눈치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내 동작이 느리다는 이유로 자꾸 화를 낸다. 사회에서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부터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일지는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다. 어떤 것은 삼 일 간격으로 쓰여 있고, 어떤 것은 일주일이나 보름이 지나서 이어지기도 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선임의 갈굼에 묵묵히 당하고 있는 놈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나이 가오가 있지, 제껴 버리고 깔끔하게 영창이나 다녀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진짜 시작은 영창을 다녀오고 나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옆 부대에 선임을 팼던 놈이 영창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투명 인간처럼 취급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며 선임들이 웃고 떠들어 댔다.
나는 그런 취급을 참아낼 수 있을까? 대화할 상대라고는 이들밖에 없는데, 이들에게 완전히 무시를 당하면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남아 있는 군 생활이 너무 길다. 참다 보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막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 후임들이 오면 잘해줘야겠다.
오늘 처음으로 귀싸대기를 맞았다. 항상 먼저 치기만 하면 박살을 내놓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막상 얻어맞은 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하고 멍해졌다. 지금 내가 맞은 건지 아닌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윽박지름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위병 근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생활관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총 안에 총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생활관 안으로 뛰어들어 그 망할 새끼들의 머리에 총을 갈겨 버리는 상상을 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던데, 지금 내가 정상인 걸까?
자신감이 사라져 간다. 사회에서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나는 굼뜨고 어리바리한 쓰레기일 뿐이다. 신교대에서 수류탄으로 사람을 죽일 뻔했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민기가 보고 싶다.
포상에서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얻어맞았을 때,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해머를 선임들에게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시작이었다.
잠을 자지 못한 지가 삼 일째다. 그들은 그 이후로 내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삼 일간 교대로 일어나서 나를 계속 깨워 댔다. 삼 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하니 미쳐 가는 기분이 든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항복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처할 수 없는 이들을 상대로 저항을 계속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항복을 그들은 저항의 포기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심심하면 손이 올라온다. 군홧발로 걷어차이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초기에는 내가 분명 잘못을 해서 욕을 먹는다는 자각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이제는 숨만 쉬어도 내가 잘못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잘못을 해서 욕을 먹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잘못이 없는데 욕을 먹는 것인지.
아프다. 몸이 너무 아프다. 아침부터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쉴 수가 없다. 아프다는 말을 한 순간 보일러실로 끌려 내려가서 얻어맞았다. 네가 아파서 쉬면 나보고 일을 해라는 뜻이냐고 말하는 김학철의 말에 변명도 하지 못했다.
한계가 왔다.
지금까지는 참다 보면 어떻게든 계급이 올라가고, 저들은 전역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 보면 그들이 전역하기 전에 내가 미칠 것이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다음에는 내가 저들을 죽일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참아온 것이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저 병신이 될 뿐이다. 이미 병신이지만.
집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께서 아프시단다. 그럼 민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신 나간 애비 새끼가 민기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할머니마저 앓아누우시면 어떻게 되는 건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
할머니께서 입원을 하셨다.
포대장님께 사정을 설명드렸지만, 아버지가 있으니 전역은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 아버지, 아버지라……. 알코올에 쩔어 심심하면 애들을 패고 집 안을 때려 부수는 사람이 아버지라니.
차라리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내가 지금 갈 수 있을 텐데, 그 인간 때문에 이곳에서 나갈 수도 없다. 그럼 민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 학교도 졸업 못했는데 민기는 누가 돌보지? 할머니는?
강진호는 연습장을 덮고 다시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더는 읽을 수가 없다.
더 읽었다가는 지금 당장이라도 생활관으로 뛰어들 것 같았다.
자신은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읽어야 해.’
읽는다는 것이 괴롭기는 하지만, 알아야 한다. 주영기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야 했다. 그것이 손을 뻗지 않은 자신이 주영기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참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버티고 버텨서 하루라도 빨리 전역을 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이 났다.
선임을 때려서 영창을 가거나 구속이 된다면? 민기, 하나뿐인 내 동생은 방치되고 말 것이다.
참아야 한다.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형으로서 내가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 지금쯤 민기는 할머니를 간호하고 애비 새끼의 폭력을 홀로 감당하고 있을 것이다.
두렵다. 무섭다. 남아 있는 기간이 너무 길다. 하루하루 미쳐 가는 기분이 든다. 눈만 감으면 환청이 들리는 것 같고, 자꾸 악몽을 꾸는 기분이다.
휴가를 다녀오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몸에 힘이 없다. 모든 일에 무기력해지는 기분이다. 폭력의 강도가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내 몸이 약해져서 갈수록 더 아픈 것인지를 모르겠다.
무섭다.
선임들이 악마같이 보인다.
왜 저들은 내가 아픈 것을 알아주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힘든데. 내 허벅지를 내려치며 웃고 있던 그놈들의 얼굴이 악마처럼 보였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저랬을까?
샤워를 하던 중에 샴푸 통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샤워장에서 얻어맞았다. 맞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곳을 밟혔을 때는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것을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죽으면 편해지는 건데.
아니다.
민기를 생각해야지.
약해지면 안 된다. 버티다 보면 저들은 전역을 할 것이고, 나는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웃으라는 말을 들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웃으라는 건지를 모르겠다. 그놈들은 내가 웃지 못하자 웃게 해준다며 입안에 칫솔을 쑤셔 넣었다.
잠을 자는 내내 부러진 칫솔을 입안에 물고 있어야 했다.
차라리 맞는 게 낫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고통도 겪다 보면 익숙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그냥 착각인 것 같다. 구타가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포심이 더 커진다. 맞았을 때 어떤 느낌인지를 너무 잘 알게 되니까. 맞기도 전에 공포부터 몰려온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너무 무섭다.
잠을 잘 때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사회로 돌아간다고 해서 민기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나는 쓰레긴데.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이런 일을 당해온 것은 다 내가 병신 같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김학철과 노수봉뿐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나를 병신 취급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병신이라 한다면 내가 병신인 게 맞는 말 아닐까?
내가 살 가치가 있을까?
오 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새벽에 불침번이 비추는 플래시 랜턴에 기겁을 하여 비명을 질렀다가 다시 보일러실로 끌려갔다.
맞지 않았다. 이제 나는 맞지 않는다. 그저 날이 샐 때까지 보일러실에 서 있을 뿐이었다.
자고 싶다.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노수봉의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던데 괜찮냐는 말을 들었다. 무섭다. 어떻게 우리 가족들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전역을 한다고 해도 나는 이놈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밥을 먹는 도중에 구토를 했다. 그러자 노수봉이 괜찮냐며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 가식적인 모습보다 그 모습에 단 한순간이라도 고맙다는 생각에 울컥하여 울어버린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나는 주면 주는 대로 받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 개나 다름없다.
지쳤다.
어디에도 말을 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보급관님께 은근히 말을 흘려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눈초리뿐이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잘못된 것은 나다. 그들이 아니라…….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무서워……. 무섭다.
일지는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턱.
강진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상으로 가 위장막 안에 책을 다시 쑤셔 박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천천히 걸어 생활관으로 향했다.
결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생활관으로 향하는 강진호의 등 위로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