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49
#1848.
다그치다 (3)
이현수가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총회의 전경이 조금은 낯설게 틀어박혔다.
“…….”
평소라면 금세 시선을 떼고 일에 집중했을 이현수지만, 오늘따라 그의 시선은 총회의 전경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흠.”
이현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느새 그의 책상 앞에 강진호가 다가와 서 있었다.
“어,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괜찮아.”
강진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앞쪽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이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호의 맞은편으로 갔다.
“말씀을 하시지.”
“생각이 깊어 보여서.”
이현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깊은 게 아니라 생각이 안 나서 그렇습니다.”
“응?”
이현수가 말없이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강진호가 담배를 받아 들고 입에 물자, 이현수가 그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일단…….”
이현수가 조금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크게 부상을 당한 놈들은 없습니다. 백연홍, 그 미친놈이 회원들에게는 살수를 쓰지 않았습니다.”
“음.”
“그리고 그…….”
이현수가 머리를 긁었다.
“목숨을 잃은 마교도들에 대한 수습은 모두 끝냈습니다. 대부분은 딱히 가족이랄 게 없는 사람들이라 후속 조치가 필요하지 않고, 가족이 있는 이들에게는 보상금을 크게 지급할 예정입니다.”
“시신은?”
“중국으로 보내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건 장민과 상의해.”
“예.”
될 수 있으면 그들이 태어난 땅으로 보내 고향에 묻어주고 싶지만, 그들이 그곳을 고향으로 여길지, 아니면 이곳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길지는 모를 일이다.
이건 장민이나 다른 마교도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할 일이었다.
“그 외에 다른 문제는 딱히 없습니다. 놈이 난장을 피우기는 했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아서……. 뭐, 적당히 무너진 담장이나 박살 난 건물만 다시 세우면 될 일이죠.”
“그래.”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현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예?”
“생각이 없다는 말은 무슨 소리야?”
“…….”
강진호가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이현수가 체념한 얼굴을 했다.
“조금 현타가 와서 말입니다.”
“현타?”
“현자 타임이라고……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허탈감이랄까요.”
이현수가 고개를 슬쩍 돌려 창밖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지만, 강진호에게는 그러고 싶지가 않다.
“아시다시피 제가 총회를 강하게 만든답시고 인생을 바쳐 왔잖습니까?”
“……뭘 몇 년이나 했다고.”
“거, 기간이 중요합니까? 열정이 중요하지.”
“그렇다 치고.”
떨떠름한 얼굴을 한 이현수가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백연홍인가 뭔가 하는 놈이 총회에 혼자 쳐들어와서 날뛰고 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
“그냥 제가 그동안 한 건 다 뭔가 싶고……. 네, 그냥 그런 겁니다.”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 하지.’
무학을 익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순간이 온다. 나는 하루하루를 죽어라 수련하고, 뼈가 부러져라 구르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 머리 위를 훌훌 날아 지나가 버리는 것 같을 때.
도무지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고수를 보았을 때, 사람의 좌절감을 넘어 박탈감마저 느끼게 된다.
사람이 노력을 하는 이유는 더 나은 성과를 위해서다. 그 누구도 노력 자체를 즐기지 않는다. 그 노력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성과를 기대할 뿐.
그러니 자신의 노력에 어떠한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는 노력, 그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 법이다.
“백연홍을 본 게 충격이었던 모양이로군.”
“사실 저도 이해가 잘 안 가는 게…….”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이미 홍왕을 겪어보았고, 또한 창왕을 겪어보았다. 그들의 능력이 저 백연홍에 비해 떨어질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이현수는 그 백연홍에게서 홍왕과 창왕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아득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게 참 이상합니다. 그…….”
이현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백연홍의 뒤에 흑왕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암담함은 아닌 것 같은데, 저도 제 상태를 정확하게 뭐라 판단을 못하겠네요.”
하지만 이현수와는 달리 강진호는 지금 이현수가 느끼는 암담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알던 세상이 깨어진 거지.”
“…….”
“세상의 법칙이 말이야.”
이현수의 고개를 끄덕여졌다.
저 말이 그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온다. 그 스스로도 ‘아!’ 하고 탄성을 내뱉을 만큼 말이다.
“그런가 봅니다.”
한숨을 내쉰 이현수가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이현수가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인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낸 이현수가 고개를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회주님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
“그리고 홍왕이나 창왕도 특별한 사람이죠. 세상에 그런 사람들은 여럿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 있잖습니까. 범재가 천재를 보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천재라는 이름으로 내가 올라가야 할 자리를 빼앗을 사람이 극히 소수이기 때문이죠.”
“그렇지.”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삼왕은 특별하고, 그들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니 다른 무인들도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무학을 익힐 수 있다.”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이 꼴이네요.”
“…….”
“삼왕급의 무인이 열둘이나 더 있는 세상에서 총회가 대체 무슨 가치를 가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징징대는 게 아니라 정말 의문이 들어서 그럽니다.”
삼왕이 서로 반목하기에 무인계의 균형이 지켜져 왔다.
하지만 알고 보니 무인계의 균형은 이미 예전에 무너져 있었다.
십이비도.
‘열둘이라…….’
그 백연홍과 대등한 이가 열하나나 더 있다.
거기에 흑왕을 더한다면 초극의 고수가 무려 열셋이나 있다는 의미였다.
이건 황당하다 못해 아연해질 만한 전력이다.
‘총회가 그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무리다.
강진호와 흑왕을 공평하게 제외한다면, 삼왕급 고수 열둘을 총회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게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당장 이사들이 모두 나서고도 백연홍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상황을 최대한 좋게 봐 네 명의 이사가 어찌어찌 둘 정도는 막아준다고 해도, 삼왕급이 열이 남는다는 의미다.
‘총회의 남은 전력을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두 명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이현수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곳인지를 새삼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솔직히 저는 총회가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부분의 공은 회주님께 있겠지만, 저도 나름 공헌해 왔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그 자부심을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총회를 끝끝내 키워내고, 그가 원하는 순간에 저들을 상대할 수 있다면, 어떤 수를 쓰든 반드시 저들을 능가해 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총회에 그만한 시간을 줄 리가 없다.
가만히 이현수의 말을 듣고 있던 강진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낮게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듣다 보니 웃겨서. 직접 싸우지도 않는 놈이 싸운 놈들보다 더 의기소침해 있는 꼴이.”
“……싸우지 않아서 의기소침한 게 아니라, 싸우지 못하니까 의기소침한 겁니다. 남들은 근성으로 들이받아 본다는 선택지가 남아 있지만, 저는 그게 아니잖습니까.”
“그것도 변명이지.”
강진호의 시큰둥한 대답에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에, 네에. 변명입니다. 회주님께야 이게 별 고민도 아니겠죠.”
“그렇지도 않아.”
“……예?”
“상황이 암담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특히나 나는 더 암담하지. 저놈이 원하는 대로 고개를 조금 숙인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걸 고민하시는 겁니까?”
“아니.”
“뭐야, 이 인간?”
울컥한 마음에 막말을 내뱉어 버린 이현수지만, 강진호는 웃음으로 그 막말을 받았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지. 그런데 이제는 확신이 섰어.”
“……갑자기 왜요?”
“그놈이 벌이는 일이 세상을 뒤흔들지 않을 리가 없지.”
“…….”
이현수가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전력을 모은 채 기다리고 또 기다린 일이라면, 분명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거다.
“생각해 보니 그렇더군. 내가 하는 일은 그런 거야. 방공호를 파고, 식량을 보충하고,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을 쓰지 않으면 수십 년이고 수백 년이고 내가 같이 살고 싶은 이들과 숨은 붙어 있을 수 있는.”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는 게 아냐. 그저 숨이 붙어 있다고 사는 게 아니지.”
“……그렇죠.”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고는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뭘 어쩌시려고요? 솔직히 우리 전력으로는 저놈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현수.”
“예?”
강진호가 씨익 웃었다.
이상하지.
이런 상황인데도, 저 웃는 얼굴을 보면 뭐라도 될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잖아.”
“…….”
“답은 보이지 않고, 암담하기 짝이 없지. 아무리 악을 쓴다고 해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밖에 안 될지도 모르지.”
“……잘 아시네요.”
“하지만 나는 손을 놓고 지느니, 악을 쓰다 피를 토하다 죽겠다.”
이현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단도 하다, 진짜.’
강진호는 언제나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의 끝도 없는 저돌성과 끈기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에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그 자신감과 확신을 잃은 강진호는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그런데…….
‘달라지는 게 없네.’
허탈하고 우습다.
결국 세상은 그런 법. 멈추지 않고 달리는 이는 언젠가는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다. 이제 강진호는 확신을 잃어도, 자신감을 잃어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회주님.”
“응?”
“저 이번만은 솔직히 진짜 자신 없거든요?”
“…….”
“그러니까 제가 말아먹었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괜찮아.”
“진짜로요.”
“괜찮아.”
강진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네가 없으면 망할 테니까.”
“…….”
구구절절한 말보다 저 한마디가 이현수의 배에 힘을 불어넣는다.
“이래서 내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으며 웃어버렸다.
“진짜 답도 없으시네요.”
“항상 그랬지.”
강진호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언제고 내가 답을 내린 적은 없었어. 내 안에는 그런 게 없었지. 답을 만들어준 건 항상 너희야.”
“…….”
“그러니 이번에도 다를 게 없어.”
강진호가 이현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시행한다.”
“…….”
“그거면 돼.”
이현수가 강진호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 지옥까지 가봅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우리쯤 되면 발악은 하고 죽어야죠.”
“딱 듣기 좋은 소리로군.”
담배를 비며 끈 강진호가 손을 앞으로 내민다.
이현수가 강진호가 내민 손을 더없이 강하게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