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94
#1993.
결심하다 (3)
“잠깐만요.”
최연하가 손을 들어 강진호의 말을 막았다.
“…….”
영문을 몰라 하는 강진호를 보며 최연하가 슬쩍 턱짓했다.
“자리 옮겨요. 사람들 와요.”
“……네.”
어느새 최연하를 알아본 이들이 하나둘 힐끔대며 카페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그럼 차로…….”
“타요.”
“네?”
“타라고.”
“……네.”
강진호가 카페 앞쪽에 대어져 있던 최연하의 차 조수석에 올랐다. 최연하가 태연하게 운전석에 앉아 액셀을 밟았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 붕붕이를 내버려 두고 두 사람을 실은 차가 과격하게 해안 도로를 타고 달렸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차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흐트러지는 포말을 말없이 응시하던 최연하가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린다.
참 예쁘다.
이럴 때면 새삼스레 최연하가 얼마나 미인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 처음부터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강진호에게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는 그저…….
‘왜였을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다가 그가 최연하와 이런 사이가 되었을까?
그와 최연하가 딱히 성격이 맞는 것도 아니다.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고, 좋을 때보다 티격태격댈 때가 더 많다.
그런데도…….
‘의문도 들지 않았지.’
어느 순간, 이 사람을 두 눈에 담고 있는 게 너무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래. 그래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가 그녀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거짓말로 남는 것만은 참을 수 없으니까.
“진호 씨.”
“네.”
“좋지 않아요?”
“…….”
불어오는 바람이 강진호의 얼굴을 간질인다.
“나는 진호 씨랑 이렇게 서서 바다 보는 게 좋아요.”
“네.”
강진호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다.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게 즐겁다. 이건 최연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그럼 된 거잖아요.”
“…….”
“세상은 항상 바뀌어요. 때로는 과격해지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리기도 하죠. 불합리하고, 한숨 나오고…….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생각만큼 바뀌지도 않아요.”
최연하가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어린 작은 서글픔이 강진호의 눈에 틀어박혔다.
“그럼 된 거잖아요.”
“…….”
“진호 씨가 무리하지 않아도. 꼭 그렇게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고, 이 일을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굴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 두면 되잖아요.”
“…….”
“세상이 바뀐다고 해서 진호 씨와 내가 여기 와서 바다 바라볼 여유도 없겠어요? 그것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그 말을 어찌 거절해야 할까 난감해서가 아니다.
저 말이 너무도 옳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되죠.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할 테니까. 평소에는 해야 할 일도 못해서 허덕대는 사람이,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강진호가 말없이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그냥 그러면 안 돼요? 네, 진호 씨?”
“연하 씨…….”
“그냥 조금만 내려놔요. 그럼 되잖아요. 그럼 다들 그냥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요.”
최연하는 이해하지 못했다.
강진호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하지만 거꾸로 이해하고 있었다.
강진호의 태도가 지금까지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껏 강진호가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간다고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처음에는 몰라서 말리지 못했고, 뒤에는 알고도 말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분명 다르다.
강진호의 눈빛 하나, 손짓 하나, 그리고 표정 하나에서도 알 수 있다.
이번 일은 명백히 그 격이 다르다.
마주할 때만 해도 적당히 투정을 부리고, 결국은 강진호가 원하는 대로 보내줄 생각이 있던 최연하이지만, 지금의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그러면 안 돼요?”
강진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나온다.
이래서. 그래, 이래서.
이래서 그는 최연하를 만나지 않았다. 아니, 만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채 눈앞에서 이런 말을 들어버리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고 싶어요.”
“…….”
“한때 내 꿈은 평범하게 사는 거였어요.”
그 말에 최연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은…… 조금 황당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정말 한때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소소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게 꿈이었어요.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누가 더 강한지를 이 악물고 증명할 필요 없이.”
강진호가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가 그를 향해 끊임없이 몰아쳐 온다.
강진호에게 세상은 바다 같았다.
드넓고 광활해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지만, 사실은 쉴 새 없이 밀려와 한시도 고요하지 않은…… 그런 바다.
휩쓸리고 휩쓸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가 원하던 삶과는 한참 동떨어진 이곳으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진호 씨…….”
“내가 찾은 답이 뭔지 아세요?”
“…….”
“이게 정말 내가 원한 삶이었다는 거예요.”
최연하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걸 원했다고요?”
“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은 온화했지만, 눈빛에는 힘이 있었다.
“나는 내가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용히,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고 그저 평안하게.”
강진호의 고개가 천천히 내저어진다.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그럼요?”
“평범하게 살고 싶던 게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거예요.”
강진호가 담담히 말하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는 평범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평범하고자 했어요. 하지만…… 그냥 평범하게만 살았다면 지금 같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지금은 어떤데요?”
“박유민을 만났죠.”
“…….”
강진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황 회장님을 만났고, 조 실장님을 만났고, 영기를 만났고, 이현수를 만났고…… 장민도, 바토르도…… 위긴스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도.”
작은 세상에서 평범하게만 살았다면, 그들을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
평범하게 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처럼 회사에 취직을 하고.
조금 괴짜라는 말은 듣겠지만, 쉬는 시간에 피우는 담배 한 대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 치킨 한 마리에 즐거움을 느끼는…… 그런 평범한 삶도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저 평범하게 살았다면…… 제가 당신을 만날 일도 없었겠죠.”
최연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모두를 다시 한번 만나고,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술도 마시고, 웃고 떠들기도 하면서 확실하게 알았어요.”
“……뭘요?”
“전 지금 행복해요.”
강진호가 빙그레 웃었다.
최연하는 차마 강진호의 그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지금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울어버릴 것 같다.
“그래서 알게 됐죠. 행복이라는 건 숨죽이고 있는다고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내 발로 찾아내야 하고, 내가 내 손으로 움켜쥐어야 한다는 걸.”
다음 말이 뭔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래서 가는 거예요.”
“……진호 씨.”
“연하 씨 말대로예요. 이대로 살 수도 있겠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다른 이들이 해결해 주기를 바랄 수도 있겠죠. 아니,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나 하나 어떻게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저, 그놈이랑 나름 친하거든요.”
“…….”
“그런데…….”
강진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 행복을 잃어야 해요.”
“…….”
“최연하 씨 말대로예요. 세상이 바뀐다고 삶이 크게 뒤틀리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 작은 불편함은 쌓일 거예요. 그리고 그 작은 불편함이 언젠가는 더 큰 파도가 되어 돌아오겠죠. 언제나 그랬으니까. 막아야 할 때 막지 못하면 언젠가는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돌이키지 못할 지경으로 흘러가 버릴 수도 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해서 세상이 무너진다면, 강진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여파에 고통받을 것이다.
강진호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지키려고?”
“아뇨.”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대단한 대의를 내걸고 싶지도 않아요. 실제로도 아니니까. 그저…….”
강진호가 환희 웃는다.
“내가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
“사실 이기적인 거예요. 내가 행복해지고 싶으면, 내가 함께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죠. 그들이 힘들어 하는 걸 지켜보며 행복할 수는 없어요. 나는 그렇게 속 편한 사람이 아니니까.”
지키고 싶다.
지금 이 행복을.
지금 이 삶을.
강진호도 안다. 이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다.
적어도 무인계의 존속과 미래를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건곤일척의 도박을 벌이는 청마의 대의에 비한다면, 이건 너무나도 이기적인 한 인간의 욕심에 불과하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렇기에 싸울 수 있었다.
작으니까. 거창한 대의가 아니라 작은 욕심이니까.
그마저도 손에서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최연하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간다고요?”
“…….”
“나쁜 새끼야.”
“…….”
최연하가 주먹을 움켜쥔다. 꽉 쥔 그 주먹이 최연하의 속내를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다 죽으면? 진호 씨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은 하하호호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당신 주변 사람들이 있어야 당신이 행복한 것처럼, 당신이 있어야지 당신 주변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해요! 다 아는 척 굴지만, 하나도 모르잖아!”
“…….”
“진호 씨, 나는요…….”
최연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얼굴을 더는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살아만 있으면…… 살아만 있으면 행복은 찾을 수 있잖아요. 지금은 조금 불행해지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찾을 수 있잖아.”
“저는…….”
최연하가 강진호에게 걸어와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이 나쁜 새끼야! 사람이…….”
그 순간, 강진호가 최연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사람이…….”
최연하가 강진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머리를 쓸어내린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살아 돌아올 거예요.”
“…….”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야.”
최연하의 흐느낌 소리가 아프게 귀를 파고든다. 손끝에서 그녀의 떨림이 느껴진다.
다시 이 손에…….
이 행복을 움켜잡기 위해.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다.
두 사람이 선 해안에, 그 해안에 닿은 짙은 바다 위로…….
새하얀 눈이 내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리게만 가는 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