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54
#2053.
버텨내다 (3)
공령의 전신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새삼스럽다. 아마 그도 이 분위기에 꽤 취했던 모양이다.
내심 어쩌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다시없을 승부를 조금 더 가치 있는 자와 벌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볼에서 전해지는 욱신한 통증이 말해주고 있다.
저자가 누구든, 어떤 이든 싸워 승리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까득.
공령이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편다. 습관적으로 손목을 한 번 돌린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차라리 잘됐어.’
모든 것을 걸어 승리를 따내야 하는 순간에 평생 눈길도 주지 않은 인정에 마음을 빼앗겨 승리를 내준 머저리들이 있지 않은가.
공령 역시 같은 꼴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의 마음은 더없이 단단하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그건 다른 십이비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러니 차라리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 싸우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적어도 저의 사정을 이쪽이서 헤아릴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저 전력으로 죽이기만 하면 된다.’
고통과 함께 잡념이 쓸려 나간다. 머릿속이 되레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촤라라락.
공령의 소매에서 수백 가닥의 와이어들이 흘러나온다.
그 와이어를 두 눈에 담은 장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은사(銀絲)라…….”
“왜? 잡기(雜技)라 무시라도 할 셈인가?”
“방법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 산을 오름에 있어서 길이란 그저 방편에 불과한 법. 어디에 올랐는가가 중요할 뿐.”
“큭큭큭.”
마음에 드는 소리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적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들은 기분을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좋은 말을 해준 대가로 그 목을 예쁘게 잘라 드리지.”
공령의 두 눈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이현수의 입에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물론 그는 조금 전에 벌어진 교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언가 희끗했다 느낀 순간, 장민은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고, 공령은 얼굴이 찢겨 나갔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분위기.
숨을 쉬지 못할 만큼 짓눌러 오는 압박감만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장로님이 이기시겠죠?”
“글쎄.”
강진호가 담담한 얼굴로 장민을 바라보았다.
“냉정하게 보자면…… 장민이 불리하지.”
“예? 장로님이요?”
“장민은 이제 갓 벽을 넘은 자일 뿐이야. 그 영역 너머에서 당연하게 싸워온 놈에 비한다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지.”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다들 너무도 잘 싸워줘서 그 사실을 잠시 잊었다. 이들은 초인과 제대로 싸워본 것이 처음이다.
당장 얼마 전에도 저 백연홍을 상대로 넷이 달려들었다가 처참하게 패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벽을 뛰어넘어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달라졌다고 한들 이기는 게 요행이지 않을까?
“그, 그럼 지는 겁니까?”
“그건 또 아니라서.”
“……아니, 회주님.”
이현수가 ‘이 양반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라는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거면 이거다, 저거면 저거다. 뭐 좀 확실하게 말씀을 해주십시오. 뭐 그렇게 우왕좌왕하십니까?”
“…….”
강진호가 묘한 얼굴로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뭐라 해야 할까, 그 표정을.
“무학이 뭔지도 모르는 놈한테 이걸 설명하려니 속 터지고 귀찮아 죽겠네?”
“……독심술 익혔어?”
“…….”
강진호가 어색하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벽을 넘는다는 건 막혀 있던 길을 계속 갈 수 있다는 거겠지만…….”
“예.”
“실제로 체감은 좀 달라.”
“예?”
강진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벽을 넘는 순간, 대부분은 탈태환골을 경험하게 되지. 그건 낡은 육체를 벗고 새로운 육체를 얻는 것과 같아.”
“그야 뭐…….”
“그런데 그건 실제로는 의미가 조금 달라. 그저 낡아서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이제 더는 버틸 수 없는 육체를 바꾸는 것에 가깝거든.”
“예?”
“음, 보통 사람이 알아듣게 말을 하자면…….”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F3 레이싱을 하던 이가 갑자기 F1 머신을 타고 레이스에 나서는 거라고 할 수 있지.”
“……기체 자체가 순간적으로 바뀐다는 겁니까?”
“그래.”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만이 아니야. 시야와 이해도 바뀐다. 항상 바닥에 붙어서 세상을 파악하던 이가 단 한 번이라도 하늘 위에서 자신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시야와 이해도 자체가 바뀌는 법이니까.”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그러니까 공령은 이미 F1 머신에 익숙해 능숙한 레이서고, 장민은 오늘 처음으로 F1에 승격해 레이스에 나서는 풋내기 드라이버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건 이미 승부가 정해졌다는 말이잖아요. 신입이 시작하자마자 우승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물론 다른 부분도 있지. 실제 레이스와 다르게 장민은 실력이 없어서 레이스에 참가하지 못한 게 아니거든.”
“아…….”
강진호가 굳은 눈으로 장민을 바라보았다.
“벽이란 건 실력이 쌓인다고 넘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계기가 필요하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고, 실패할 시에는 목숨마저 걸 각오도 필요하고. 그렇기에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넘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평생 노력해도 넘지 못하지.”
그렇기에 벽은 불공정하고 가혹하다.
마치 인생처럼.
“하지만 재밌는 건 벽을 넘는 순간, 같은 머신을 탈 수 있게 된 순간, 모두가 같은 실력에서 출발하는 건 아니라는 거야. 누군가는 그 머신을 탄 순간부터 다른 숙련된 레이서들과 동등한 실력을 손에 넣기도 하지.”
장민의 무기는 다름 아닌, 그가 쌓아온 수많은 시간이다.
그 누구도 장민보다 많은 무인을 봐오지 못했고, 그 누구도 장민만큼 싸워오지 못했고, 그 누구도 장민처럼 오랫동안 수련을 해오지 않았다.
강진호조차 미스터리하다고 느낄 정도로 긴 삶을 살아온 장민의 모든 경험은 벽을 넘어섬과 동시에 분명 확연히 개화했을 것이다.
그가 쌓아온 삶이 우월할지, 아니면 먼저 앞서 나간 공령이 벌려낸 거리가 더 멀지.
이 승부는 그걸 증명하는 승부가 될 것이다.
“그래도 유불리는 있을 것 아닙니까?”
“의미가 없어.”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예측한 승부는 거의 틀렸거든.”
“……예?”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과 실제로 이기는 건 다른 이야기지. 내 계산대로라면 우린 이미 졌어야 해.”
“……아니, 뭔 그런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십니까?”
“이 승부는 이미 예측의 영역을 넘었다는 뜻이야. 저놈의 표정을 보면 알잖아.”
“예?”
강진호의 말에 이현수의 시선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강진호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 흑왕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예측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강진호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이래서 삶이란 재미있는 것이다. 또 한 번의 삶을 살면서도 삶이 지루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같은 일을 겪는다 해도 매번 달라지니까.
‘사람의 일이란 이래서 재미있지. 그렇지 않나, 청마?’
아마 청마는 지금 왜 자신이 세운 계획이 이렇게까지 뒤틀렸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계획은 언제나 완벽했으니까.
하지만 과거에도, 지금에도 청마의 계획은 마지막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유?
청마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강진호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짐작한 이유를 바로 저 장민이 증명해 줄 것이다.
촤라라라락.
적에 대해 경의를 느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나 장민처럼 상대의 실력에, 그가 이룬 경지에 무관심한 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장민은 마치 물속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흐느적대는 은사의 물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저 한 올, 한 올의 얇은 와이어에 일일이 내력을 밀어 넣고 조종한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에 가까운 일이다.
교의 수많은 무학에 통달한 장민조차 흉내 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기. 물론 이건 무공의 고하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갈래의 문제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 한들 상대에게 느끼는 이 경의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게 전부지.’
바토르였다면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위긴스였다면 그 무학의 방식에 흥미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방진훈이라면 상대하기 무섭다고 엄살을 떨어 댔겠지만, 분명 저 무학이 가진 장점을 자신의 무학에 녹여내려 열심히 관찰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구나.’
장민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 가장 설 자격이 없는 이가 바로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유?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장민은 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민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인을 무학을 익힌 자로 정의한다면, 장민은 당연히 그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외부의 시선이 어쨌든 마공은 훌륭한 무학이니까.
하지만 무인을 자신을 갈고닦아 더욱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이라고 정의한다면, 장민은 결코 그 무인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없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에게 무학은 그저 방편일 뿐, 결코 목적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였겠지.’
그 오랜 시간 무학을 익혔음에도, 그 오랜 시간 동안 피를 토하는 고련을 해왔음에도 벽을 넘지 못한 이유.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촤라라라라락!
그러나 상대는 길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공령이 양손을 떨쳐 내는 순간, 그의 주위에 머무르던 와이어들이 일제히 뻗어 나오며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뒤덮어간다.
등을 타고 소름이 돋아 오른다.
마치 수천 마리의 실뱀이 각각 맹렬한 적의를 가지고 장민을 물어오는 것 같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강철보다 단단하고, 그 어떤 치명적인 맹독보다 더 지독한 이빨을 가진 뱀이!
그리고 혼돈!
날아들던 와이어들이 순간적으로 뒤얽히고 뒤틀린다. 일사불란한 공격 속에 군데군데 틈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장민의 얼굴을 확연하게 더 굳어졌다.
누군가는 이 광경에서 저 와이어들을 완벽하게 조종하지 못한 공령의 한계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민이 본 것은 완전히 반대였다.
만약 정말 살아 있는 뱀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날아든다면 당연히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각기 생각이 다른 이들이 이 좁은 공간에서 전력을 다해 움직인다면, 당연히 저들끼리 부딪치고 얽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 섬뜩하다.
마치 저 하나하나의 은사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 같으니까.
기이이이이이이이잉!
장민의 두 눈이 핏빛의 혈광을 뿜어내고,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조강이 울부짖는다.
전신의 마기를 모조리 끌어 올린 장민의 입에서도 짐승 같은 괴성이 흘러나온다. 머리로 치솟은 혈기가 그의 잡념을 날려 버리고 오직 하나의 외침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응징하라.
감히 마존의 앞에서 날을 드러낸 저 배교자의 개를 찢어발겨라.
“흐하아아아아앗!”
장민이 줄줄이 혈광을 내뿜으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와이어의 바다,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