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76
#2075.
도달하다 (5)
“…….”
흑왕이 말없이 백연홍을 바라보았다.
실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뭐가 좋아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듯 한 번 머뭇거린 흑왕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쪼개고 있어?”
“하핫!”
백연홍이 낄낄대며 웃었다.
“보셨습니까?”
“…….”
“끝내줬죠?”
흑왕이 노골적인 황당함을 담아 백연홍을 바라보았다.
“……미친놈이.”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백연홍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아는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연홍의 태도는 그 정도를 넘어섰다.
완전히 타버려서 더는 팔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검은 숯을 한 쪽 어깨에 달고 실실 웃어 대는 그를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화조차 나지 않았다.
“이기겠다고 잘도 지껄이고 나가더니.”
“뭐, 지지는 않았잖습니까.”
“…….”
“그리고 저나 되니까 저 괴물을 상대로 비기기라도 한 겁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상대나 되었을 것 같습니까?”
그 말에는 흑왕조차 반박할 수 없었다.
위긴스가 순간적으로 손에 넣은 파괴력은 가공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했다. 흑왕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 ‘출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
아무리 무학이라는 게 파괴력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지만, 웬만한 초인이라면 제대로 된 기술을 써보기도 전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찌부러질 만큼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 힘에 맞서 살아 돌아온 것을 칭찬해야 하는 게 맞는데…….
‘살아 돌아왔다면 말이야.’
흑왕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거나…….”
백연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한 팔은 애초에 없고, 남은 한 팔마저 잃어버린 그가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은 아무리 애를 써도 좋게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우스꽝스러웠지만, 그 모습을 보는 누구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의 생명이 빠른 속도로 꺼지고 있다는 것을 보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승부를 이어가게 해드리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습니까.”
“……잘도 지켰군.”
흑왕이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백연홍이 다시금 낄낄대며 웃었다.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나.
저 천하의 흑왕이, 이 세상을 저 혼자 쥐고 흔들어 대는 자가 자신을 보며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저 사람을 이토록 동요하게 만든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백연홍에게 있어서 이건 무학의 극의를 경험한 것 이상의 업적인지도 몰랐다.
괴이하다면 괴이한 만족감 속에서 백연홍이 흑왕을 직시했다.
“흑왕.”
“…….”
“보셨습니까?”
“……눈이 있으니 당연히 봤지. 그래, 대단했다.”
“아니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뭔 소리야?”
“저자가 이룬 것을 보셨냐는 말입니다.”
“…….”
흑왕이 입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백연홍을 넘어 총회의 진영 쪽으로 향했다. 서서히 흩어지고 있는 위긴스의 모습이 그의 두 눈에 들어왔다.
“어땠습니까?”
“…….”
흑왕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 질문에 그가 해야 할 온당한 대답은 당연히 ‘굉장했다’였다.
그건 무학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이해도를 가진 흑왕에게 있어서도 대경할 광경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그 영역에 이를 수 없는 이가, 흑왕이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인간을 초월하는 모습.
경이롭다.
하지만 지금 흑왕이 순순히 그 대답을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뒤에 이어질 백연홍의 말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역시…….”
백연홍이 고개를 돌려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저자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여겼죠.”
“…….”
“하지만 막상 제가 직면한 결과가 이겁니다, 흑왕.”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무인은 정말 나약합니까?”
“…….”
흑왕이 입을 닫았다.
그러자 백연홍이 고소를 머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들은 한심하고 나약하죠. 그리 커다란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우리들도 이 정도의 경지에 올랐는데, 저들은 스스로가 가진 것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흑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들에 대한 불신.
그게 흑왕이 이 계획을 시작한 이유였다.
“우리에게는 세 번의 삶이 주어졌기에 틀린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겨우 한 번의 삶밖에는 주어지지 않았죠. 그렇기에 못 미덥고 불안합니다.”
“……그래.”
“하지만 흑왕이여.”
백연홍이 평소의 그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까?”
“…….”
흑왕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백연홍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기나긴 승부.
이제야 종착의 영역에 이른 이 승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간 것이 없다. 처음 승부를 시작할 때, 이렇게까지 몰릴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전력으로 본다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어야 옳다. 하지만 지금 그는 백연홍의 선전 덕분에 겨우 벼랑 끝에서 기어올라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은 입장에 불과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자신들이 방심했기 때문에?
줄줄이 동료들이 패배하는 것을 지켜본 이들이 정말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승부에 나섰을까?
아니면?
전략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일대일의 승부에 전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상성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그 모든 것은 실력으로 극복이 가능한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 승부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가.
“흑왕께서도 이제는 아시겠지요. 우리는 저들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저들의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결코 우리가 이른 영역에는 오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흑왕이 눈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흑왕.”
백연홍이 빙그레 웃었다.
“저들은 강합니다.”
“…….”
“굳이 당신이 이끌어주지 않아도, 굳이 마존이라는 존재가 이끌어가지 않아도 저들은 그 자체로 강합니다. 당신과 마존은 저들을 조금 더 빨리 끌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백연홍의 미소가 점점 조소로 바뀌어갔다.
“저들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
백연홍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저 사람을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흑왕께서는 저자를 얕보지 말라고 했지만, 제게 있어서 마존은 멍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흑왕보다 먼저, 흑왕보다 확실하게 무인계를 제 손안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요.”
한참 동안 강진호를 바라보던 백연홍이 다시 고개를 돌려 흑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사람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결단력이 없어서는 아닌 모양입니다. 아마 그는 알고 있던 거겠죠.”
“……뭘 알고 있었다는 거지?”
“다른 무인들이 자신보다 못할 게 없음을.”
“…….”
“자신은 그저 조금 앞서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죠.”
흑왕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래서?”
“흑왕.”
백연홍이 진정 어린 눈으로 흑왕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너무 완벽합니다.”
“…….”
“당신은 누구보다 뛰어나고, 누구보다 강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치밀하고, 누구보다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기회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죠. 이건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흑왕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담담한 백연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렇기에 당신은 타인을 믿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 당신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합니다. 모든 면에서는 부족하더라도 한 부분만은 당신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런 이들이 여럿 존재한다면 당신 혼자 만들어내는 결과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가능하겠지.”
흑왕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네 말대로야.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게 언제지?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아이에게 강도를 이길 만한 힘을 기르라고 말할 수 있나?”
“…….”
“나는 오만한 게 아니야. 현실적인 거지. 가능성이라는 불확실한 것에 도박을 걸 수는 없어.”
“압니다, 흑왕. 하지만…….”
백연홍의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어정쩡한 동작이지만, 백연홍이 누굴 가리키는지 흑왕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그 불확실한 도박에 모든 걸 걸었습니다.”
“…….”
“차이는 하나뿐입니다. 믿는가, 믿지 않는가.”
팔짱을 낀 흑왕의 손이 자신의 팔을 움켜잡았다.
“믿음의 대가가 뭔지 아나?”
“흑왕, 믿음에 배신당한 것은 저 사람 역시 마찬가집니다.”
“…….”
그 말이 비수가 되어 흑왕을 찔러 댄다.
“하지만 저 사람은 다시 한번 인간을 믿었습니다. 자신보다 나약한 이를 믿고, 자신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의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흑왕은 모든 것을 밀어냈죠.”
“…….”
“그렇기에 흑왕은 강합니다. 어쩌면 저 마존보다 더 강할 겁니다. 하지만…….”
백연홍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게 또 한 번의 생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흑왕이 아니라 저 사람과 함께 싸워보고 싶습니다.”
“이…….”
흑왕이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백연홍을 노려보았다.
“마지막까지 짜증 나는 말만 늘어놓는군…….”
“하하하핫! 그게 저인데 뭘 어쩌겠습니까?”
흑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알던 백연홍이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백연홍이기도 했다.
그가 이룩한 경지는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준 모양이었다. 저 장난스러운 말투 속에 현기가 묻어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지? 이제 와 물러나기라도 하라는 건가?”
“설마요.”
백연홍이 흑왕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자신의 방식을 관철하십시오, 흑왕.”
“…….”
“하지만 나만이 옳다고 믿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이 승부에 쓸데없는 불순물을 섞지 마십시오.”
“……무슨 소리지?”
“마존과 마지막 승부를 나눈다.”
딱딱하게 굳은 흑왕의 얼굴을 보며 백연홍이 빙그레 웃었다.
“싸울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흑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납득을 하든 하지 않든. 지금 그가 백연홍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니까.
“이제는 한계군요.”
백연홍이 미소를 지은 채 모두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살짝 붉어진 눈으로 바라볼 때, 백연홍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멍청한 새끼들이. 한 놈만 더 이겼으면 내가 이 개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마지막까지 쓸모없는 것들.”
“저 망할 새끼가?”
“그럼 그렇지. 저!”
십이비도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다. 그 소리를 들으며 백연홍이 낄낄 웃었다.
“인사는 필요하지 않겠지. 그럼 다들…….”
꼿꼿이 선 그의 고개가 스르륵 아래로 내려간다.
“지옥에서 다시 보…….”
그의 몸이 그대로 멈춰 섰다.
“…….”
가만히 백연홍을 바라보던 흑왕이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수고 많았다.”
나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