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31
#230.
개업하다 (5)
조규민의 영화와 바꾼 쇼핑은 다행히도 무사히 끝났다. 관계없는 부서는 퇴근시키는 대신 전자제품 코너와 의류 코너에만 연장을 요청했다.
일을 추가로 해주는 대신 섭섭지 않을 만한 일당을 챙겨 주니 다들 웃는 낯으로 아이들을 맞아주었다. 덕분에 강진호 일행은 아무도 없는 백화점에서 편하게 쇼핑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고 집으로 차를 몰아가며 강진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간 게 다행이었어.’
몸이 불편한 애들도 꽤 많다 보니 다른 손님들이 가득 있는 백화점에서는 제대로 된 쇼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백화점 마감 시간을 몰라서 늦게 간 것이지만, 나름 전화위복이 되었다. 좋아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나니 마음도 좀 편해진 것 같았다.
‘자주 들러야겠어.’
오늘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단순히 강진호가 그 아이들을 도와준 것이 아니다. 그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강진호도 위안을 받고 있던 것이다.
‘어쩌면…….’
강진호는 가라앉은 눈으로 도로를 바라보았다.
원장 수녀님은 강진호에게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했다.
지금까지 강진호는 그게 강진호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며 희생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다른 생각도 든다.
그분은 자신이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다른 이에게 희생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어쩌면 약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한 이유는 강진호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너무 나갔어.”
강진호는 웃고 말았다.
하나의 화두를 놓고 참선을 하거나 고민을 하는 것은 소림의 고승들에게나 어울리는 짓이지, 강진호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방향은 확고하게,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흐름에 몸을 맡기면 자연히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강진호는 간만에 편한 표정을 지으며 엑셀을 밟았다.
“오라비!”
집에 돌아오자마자 강은영이 쪼르르 뛰어나와 그를 맞았다.
“안 바쁘냐? 요즘 집에 자주 온다?”
“내가 들어오기 싫어서 안 들어왔나. 너무 바쁘다 보니까 숙소에서 자주 잔 거지.”
“그래?”
강진호가 가만히 강은영의 표정을 살폈다.
강은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살짝 배어난다.
“흐음…….”
“일찍 일찍 집에 들어오겠습니다.”
“그래.”
강진호가 강은영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강진호가 오늘 기분이 좋다는 것을 파악한 강은영이 팔을 잡고 늘어졌다.
“오라비! 오라비!”
“왜?”
“나 하나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좀 진지한 이야기니까, 씻고 나서 나랑 이야기 좀 해줘. 응?”
“……알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은 강진호는 피식 웃으면서 욕실로 향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오니 강은영이 커피를 타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왜? 말해봐.”
강은영이 슬쩍 강진호의 눈치를 살폈다. 강진호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최근 들어 이렇게 강진호가 기분이 좋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강진호의 미세한 표정만으로도 오라비의 기분을 측정하는 스킬을 보유한 뒤였다.
‘이럴 때 치고 들어가야 해.’
강은영은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오빠, 최연하 씨 한 번 만나주면 안 돼?”
“……응?”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강진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보나마나 어디 놀러 가고 싶다든가, 통금 시간을 늦춰 달라고 하든가, 그게 아니면 비싼 뭔가를 가지고 싶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 * *
“으아아아아아아악!”
쩅그랑!
집어 던진 휴대폰이 창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이성휘는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고함을 질렀다.
“강진호, 이 개새끼이이이이!”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문밖의 간호사가 차마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개인실이기에 다른 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 개새끼! 내가 찢어 죽일 거야! 내가 씨발! 으아아아아아아!”
이성휘는 반쯤 이성이 날아가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강진호가 꺾어버린 오른팔에 장애가 남는다는 소견이 나왔다. 의사를 반 죽여 버릴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달리 생각을 해보려고 했다.
그의 몸은 일반인과는 다르니까.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무인의 몸은 일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회복력을 자랑한다. 그러니 일반인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도 회복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오른팔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무인이기에 오른팔을 쓸 수 없다고 해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무인이기에 성장하는 데 있어서 오른팔은 반드시 필요했다.
이제 아무리 수련을 한다고 해도 두 팔이 멀쩡한 이들을 상대하기는 버거워질 테니까.
“하…… 씨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 지친 이성휘가 침대에 몸을 기대고 얼굴을 훔쳤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는 그저 이현주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인데.
“……그 씨발 년.”
강진호도 강진호지만, 이현주에게도 증오가 들끓어 오른다. 그가 쓰러진 후 이현주는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 이후로 단 한 번 얼굴을 들이밀었을 뿐이다.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씨발!”
죽여 버린다.
강진호도, 이현주도 다 죽여 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성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할 수 있을까?
아직도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부러뜨리고 어깨를 짓밟던 강진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으…….”
아무리 이성휘가 수련을 해서 강해진다고 해도 강진호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성휘가 강해지는 동안 강진호도 놀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아무리 이성휘가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강진호의 수준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건 악마였어…….’
인간은 보통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을 수도 없이 패온 이성휘도 인간의 뼈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으스러뜨리지는 못한다.
‘얼마나 많은 수라장을 건너온 거지?’
귀환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귀환자라고 다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몇 번의 삶을 더 살았다는 것이 인간의 강함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강진호는 어설픈 귀환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정한 강자였다.
“……어떻게 하란 거야, 씨발.”
복수하고 싶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멀쩡한 이성휘도 강진호를 상대하지 못했는데 한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 이성휘가 강진호를 상대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으아아아아아아아!”
답답함을 참지 못한 이성휘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낯선…… 아니, 낯익은 이가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성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저 사람이 지금 이 안으로 들어온단 말인가.
이성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누워 있어. 어차피 내가 마음먹는다면 지금 너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
“…….”
이성휘는 몸에 힘을 풀었다.
저 사람의 말 그대로다. 저 사람이 마음먹는다면 지금의 이성휘는 반항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시죠?”
“꼴이 워낙 비참하게 된 것 같아서 비웃어주러 왔다고 하면?”
“……마음껏 비웃다 가시죠.”
“쯧쯧.”
사내가 혀를 찼다.
“총회 회주의 제자라는 놈이 이리 나약해서야. 그러니 그쪽 방식으로는 제대로 인재를 키울 수 없다니까. 예전에 내가 한 번 이쪽으로 오라고 했을 텐데?”
“흐흐…….”
이성휘가 낮게 웃었다.
“제가 왜 회주의 제자라는 지위를 버리고 그쪽 말단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물론 그럴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생각이 다를 것 같은데?”
“…….”
이성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저를 조롱하는 겁니까?”
“조롱? 착각하지 마, 이성휘. 네가 나름 인재라고 자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굳이 상대해 줘야 할 정도로 거물은 아니잖아?”
이성휘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반박은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앞에 있는 사람에게 그는 정말 보잘것없는 이에 불과할 테니까.
총회를 뛰어넘어 한국제일의 세력을 자랑하고 있는 영남회의 회주라는 신분을 가진 사내에게 이성휘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
영남회주 김석일은 이성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
“…….”
“복수는 하고 싶은데 힘이 없겠지. 안 그래?”
이성휘가 이를 갈았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이쪽도 소중한 수족을 잃었는데, 마땅히 반격할 방법이 없어. 서울은 우리의 구역이 아니라 대놓고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거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손을 잡는 게 어떤가?”
“제정신입니까? 나는 총회 회장의 제자라구요!”
“지금도?”
이성휘가 입을 다물었다.
“잘 생각해 봐. 팔을 잃은 너는 이제 회장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거야. 제자는 너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이현주도 원래 너를 싫어했잖아.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받는 게 네 운명이지.”
뿌드득.
이성휘의 이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내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손을 잡는다는 겁니까?”
“있지. 가치는 충분하지. 일단 이 동네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고, 충분히 강하잖아.”
“병신이 됐는데도?”
“그거야 고치면 그만이지.”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하고, 무인의 자연 치유력으로도 고치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몸을 고친다는 말인가.
“나는 네게 힘을 주고, 너는 내가 시키는 일을 해준다. 이건 정말 좋은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이성휘의 눈이 흔들렸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자신을 고치고 강하게 만들어줄 방법이 있다는 건데…….
‘안 믿을 이유도 없지.’
사실 이성휘는 이미 이용 가치가 사라진 사람이다. 김석일쯤 되는 사람이 굳이 찾아와서 속여 먹을 이유가 없다.
“어떻게 나를 고치겠다는 겁니까?”
“간단하지.”
툭.
이성휘의 침대 위로 한 권의 책이 떨어졌다.
표지가 없는 책. 오래된 고서의 향이 코 안으로 훅 들어온다. 그리고 그 향에 미약한 피 냄새, 그것도 오래되어 말라붙은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설마?”
김석일이 빙긋 웃었다.
“좋은 거래이지 않은가?”
“……이런 씨발, 지금 나보고 마공을 익히라는 거요?”
“그것 말고 몸을 회복할 방법이 있나?”
“날 뭘로 보고!”
김석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재미있다는 듯 가만히 이성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침묵을 참아내지 못한 쪽은 이성휘였다.
“마, 마공은 못 익혀!”
김석일이 입을 열었다.
“강요는 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 상태로 너는 평생 강진호를 이기지 못하고 복수도 할 수 없어.”
이성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더는 강요하지 않아. 하지만 너는 결국 그걸 익히게 될 거야. 그 이유는 너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
이성휘가 살짝 질린 얼굴로 김석일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럼 난 이만 가보지. 그 책의 뒷부분은 내게 있으니, 생각 있으면 전화하라고. 자, 여기 내 명함일세.”
이성휘에게 명함을 던져 준 김석일이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그가 문을 닫기 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날 카페에서 연락을 받고 도착하기까지 채 삼십 분이 걸리지 않았더군. 이상하지. 네가 왜 이곳을 배회하고 있었을까? 응? 후후후.”
탁.
문이 닫혔다.
이성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문을 바라보다가 결연한 얼굴로 비급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제 도망 못 친다.’
김석일이 모든 것을 눈치챈 이상, 그는 결코 김석일의 손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성휘가 손을 뻗어 비급을 움켜잡았다.
“강진호…….”
이성휘의 입에서 억눌린 증오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