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16
#315.
습격받다 (5)
“제비?”
“…….”
“삐끼?”
“…….”
강진호는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강은영의 포스에 은근히 밀리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가 누구인가.
강진호다.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은 적천마존이자, 현재 한국 무인계의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풍운아가 아닌가. 이미 무인계에서는 그의 이름 석 자가 마치 주문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뭐지, 이 한기는?’
도끼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는 강은영의 눈빛에서 강진호는 총탄이 비처럼 쏟아질 때도 느끼지 못한 싸늘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이대로 말려 들어가면 패가망신할 것 같다.
“제비도 아니고 삐끼도 아닌데…… 옷이 그게 뭐야?”
“……그냥 입어봤어.”
“그냥? 그으냐앙? 오라비가 정장을 그냥 입는다고? 불편하다고 몸에 걸치지도 않고 만날 목 늘어난 추리닝이나 적당적당히 걸치고 다니던 오라비가?”
강진호는 말문이 막혔다.
옷이 피범벅이 되어버려서 어쩔 수 없이 있는 옷으로 갈아입다 보니 검은 슈트를 입게 된 것 뿐인데, 그게 구실이 될 줄이야.
“새벽까지 안 자고 뭐하니?”
최대한 침착함을 가장하고 말을 돌렸다. 하지만 강은영은 쉽사리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안 자고 뭐했겠어? 무심한 오라비가 연락 한 번 없이 이 밤까지 안 들어오니 내가 잠을 잘 수가 있나. 이제야 올까, 저제야 올까 하면서 뜬눈으로…….”
“그, 그만.”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삼박 사일을 타박받겠다고 생각한 강진호가 강은영의 말을 끊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얼른 씻고 누워야 강은영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아들.”
첩첩산중이요, 중간 보스를 넘으니 최종 보스가 나오더라.
“예.”
어머니는 온화했다.
“우리 아들, 그리 옷을 입으니 신수가 훤하구나.”
“……예.”
매는 먼저 맞는 게 낫다. 하지만 먼저 맞고 늦게 맞고를 떠나서 매를 맞을 것이 빤한데 눈앞에서 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는 게 가장 피를 말린다는 것에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
“우리 아들이 요즘 엄마도 많이 신경 써주고 참 열심히 하지. 그렇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십니까, 어머니?
“많이 힘든 거 알아. 너도 가게 보고 집에도 신경 쓰고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겠지. 그러니 하는 일도 없이 바쁘지.”
‘하는 일도 없이’라는 부분에서 힘이 살짝 느껴진 것은 강진호가 예민하기 때문인가.
“얼마나 바쁘면 새벽 네 시에 집에 기어 들어오면서 전화 한 통 없었겠어. 안 그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예로부터 한국은 기다림과 인내가 미덕인 세상이었단다. 특히나 집을 지키는 여자들은 바깥일을 하는 남자들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되는 거지. 암.”
“아닙니다, 어머니.”
“그런데 아들.”
“예?”
“옛날처럼 살면 니가 지금 나한테 죽도록 맞아도 할 말 없는 거야. 옛날에는 그랬거든.”
“…….”
“전화 제대로 할래, 안 할래?”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네.”
“그래, 들어가 쉬어.”
강진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으로 향하려고 하자 강은영이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
“……또 왜?”
“엄마!”
강은영은 이대로 납득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오라비 옷 좀 보라니까! 오라비 지금 여자 만나다 온 거야! 빤하잖아! 평소에는 목 늘어난 티에 청바지나 겨우 입고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저리 차려입고 온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딸.”
“응, 엄마!”
“……네 오빠가 여자 만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니?”
강은영이 뜨헉한 얼굴로 백현정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이유라고 하면 딱히 그런 건 없지만…….”
“그럼 쉿.”
손가락 하나로 강은영의 반란을 제압한 백현정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아들.”
“네.”
“엄마는 손주 일찍 보는 거 찬성이야.”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든 맞든.”
“아니라니까요!”
백현정이 영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강진호를 보았다.
“아니, 엄마가 이렇게 이쁘게 낳아줬으면 그런 것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어, 어머니.”
“솔직히 엄마는 그래. 네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래도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요즘은 너나 은영이나 귀여운 맛이 하나도 없잖아. 귀여움 결핍증에 걸릴 판이야. 개 한 마리 키울까 고민했다니까.”
“…….”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말이기는 한데, 왜 서러운 느낌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좀 귀여운 손주 하나 만들어와. 돈 있겠다, 가게도 있겠다, 결혼 일찍 한다고 흉될 것 없잖니.”
“생각 없습니다.”
“생각 좀 하라고 하는 말이잖아.”
순간, 강은영이 빵 터지더니, 입을 가리고 말했다.
“엄마, 엄마. 내가 하나 만들어올까?”
“처 뒈지기 싫으면 드립 수위 조절 좀 하지?”
“……죄송해요.”
어머니의 포스에 찌그러져 버린 강은영이 구석으로 가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뭔가 ‘나만 미워해’라는 사춘기 중딩이나 할 만한 말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강진호는 지금 강은영을 위로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괜한 오해받기 싫으면 일찍 일찍 좀 다녀.”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들어가 봐.”
“예.”
혼이 반쯤 빠져 버린 강진호가 터덜터덜 방으로 향하더니, 옷을 갈아입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엄마.”
“왜?”
“오빠, 진짜 여자 생긴 거 아닐까?”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왜! 생길 수도 있잖아.”
“네 오라비가 그럴 성격이니?”
강은영이 코웃음을 쳤다.
“엄마야말로 아들내미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냐? 솔직히 우리 오라비라 익숙해서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거지, 저 인간 가만히 놔두면 여자가 줄 서도 안 이상하다고.”
“그건 그래.”
“예전에도 좀 생겼는데, 군대 갔다 오더니 포텐 터졌다니까. 내가 가끔씩 혈육 보정을 걷어찰 뻔할 때가 있어.”
“진정해, 딸.”
“그러니까, 생각을 해보라고. 저 양반이야 어디 가서 여자한테 손 뻗을 사람이 아니지만, 세상에 미친년들이 어디 한둘이야? 이 악물고 들이대는 애들한테 잘못 물리면 진짜 집에 말도 안 되는 며느리 들어올 수도 있다니까. 오라비가 책임감은 또 좀 강하냐고! 애 하나 생기면 그날로 다 끝인 거야.”
“으으음.”
백현정 역시 강은영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가족이 우선이라고 저러고 있지만, 마누라 생기고 애 생겨봐. 우리 찬밥 되는 건 순식간이라니까? 엄마는 그 꼴 볼 수 있어?”
“……은영아.”
“응?”
“제에발 정신 좀 차려라, 이년아.”
“아, 왜!”
“니가 평생 오빠 끼고 살 거냐?”
“내가 언제 오빠더러 결혼하지 말라 그랬어?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음, 나는 오라비가 혹여나 잘못된 길로 빠질까 싶어서 그러는 거지. 다른 의도는 없는 거야.”
“너나 정신 차리고 살아!”
“엄마는 나만 미워해!”
수작질을 벌이다가 단숨에 격침당한 강은영이 입을 빼쭉 내밀었다.
* * *
황정후는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눈을 뜬 지는 한참이 지났지만, 지금 일어난다고 해서 할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이렇게 침대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의식이었다.
‘눈이 뻑뻑하군.’
침대 머리맡에 둔 인공 눈물을 가져와 눈에 넣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창가에 둔 재떨이를 끌어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낮게 연기를 뿜어낸 황정후가 담배를 바라보았다.
“이제 끊으셔야 합니다. 오래 사셔야죠.”
“웃기는 소리.”
오래 살아야 한다고? 오래 살아서 뭘 하겠다고.
황정후는 요즘 들어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의사는 큰 이상은 없다고 하지만, 황정후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제는 슬슬 그의 삶이 버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황정후는 낮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쉴 새 없이 달려왔지.’
처음 일을 시작한 이후로 제대로 침대에 등을 붙이고 쉬어본 것은 쓰러져 병원 침대에 누웠 있던 기간뿐인 것 같다. 일에 모든 것을 바쳤다.
가족조차 등한시하고 재경에 그의 혼을 갈아 넣었다.
덕분에 재경은 굴지의 기업으로 자라났지만, 황정후는 최근 들어 허망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삶을 바쳐 만든 재경이라는 기업은 그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안겨주었지만…….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거야.’
이름이야 남을 것이다.
대한민국 재계의 역사에 어쩌면 그의 이름이 영원히 남을지도 모른다. 저 철강왕 카네기나 록펠러처럼 말이다. 기업인으로서는 더없는 영광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황정후는 허망할 뿐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죽은 뒤에 그에게 쏟아지는 영광이 죽은 이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출근을 할 때면 때로 하늘 높이 치솟은 재경의 사옥 건물이 마치 거대한 그의 묘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이가 들었어.”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올라가는 매출과 드높아지는 명성에 만족할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수치에 감흥이 없어져 가고 있었다.
사람이 늙으면 감상적이 된다더니, 황정후가 딱 그 짝이었다.
자식들에게도 가혹하던 그가 아닌가. 최근 십 년간 그가 감상에 젖어본 적은 아내가 죽은 그때뿐이었다.
그랬는데…….
황정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부질없지.’
지금 돌이켜 보면 자식들이 자신을 그리 대한 것은 그가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가족 간의 정을 느끼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내가 있을 때는 집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지만, 아내가 죽고 나서부터는 집 안에 웃음이 사라졌다.
자식들이 분가를 하고 연을 끊으며 홀로 남다 보니 이제는 이 집이 너무도 크고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출근해야겠지.”
딱히 할 일이 있어서 출근을 하는 건 아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제왕적인 경영 구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했다.
있을 때는 그의 의사로 회사가 돌아가더라도 자리를 비우면 그가 없이도 회사가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세대의 경영자들이 하나둘 은퇴를 하거나 병으로 쓰러지며 생긴 공백에 다른 대기업들이 휘청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황정후 역시 강진호가 없었더라면 재경이 무너지는 것을 침대에 누워 들으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관여하는 부분을 최대한 줄이고 결정의 영역을 이사진 쪽으로 많이 넘겨 이리 일찍 출근할 만큼 일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생 살아온 그의 집은 혼자 쓰기에는 너무도 넓고 고요했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말이다.
사람의 활력을 느끼려면 출근을 해야 한다.
황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내려왔다. 아래로 내려오니 이미 가정부가 식사를 차려놓고 있었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아요.”
“아닙니다, 회장님. 간밤에 잘 주무셨어요?”
“늙으니 잠이 없어.”
“좀 주무셔야죠. 요즘 통 못 주무시는 것 같던데.”
“걱정하지 말아요. 내 알아서 할 테니.”
그때,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