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29
#628.
실감하다 (3)
이현수의 눈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눈에 나이트 위긴스는 정체불명의 생물체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그가 상대해 온 그 누구와도 다르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게 되면 사람은 당황하게 된다. 이현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현수는 지금 새삼 자신이 그리 담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가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것은 그가 침착하고 대범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대로 그가 눈앞에 있는 상대보다 지적으로 뛰어나기에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에게는 그런 자신감이 발동하지 않았다.
저 눈.
그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여유 넘치는 저 눈이 이현수를 압박해 온다.
강진호와는 또 달랐다.
강진호는 그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현수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들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피해를 끼친다 싶으면 그때 가서 제거해 버리면 그만이다.
강진호가 이현수에게 가지는 압도적인 주도권의 원천은 비상식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한 일방적인 처리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자는 다르다.
강진호와 이현수의 관계가 한쪽 분야의 비정상적인 우월함에 따라 만들어지는 극심한 차이에 기반한다면, 이자는 그에 비해 모든 면에서 앞서 있다.
상대와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존감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니까.”
나이트 위긴스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로드와 나의 관계를 의심할 필요는 없네. 우리는 아주 간결한 사이니까. 로드는 내게 필요한 것을 얻어가고, 나는 로드에게 충성을 바치지. 이보다 더 간결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계약 관계라는 거군요.”
“그렇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계약 관계라는 게 무척이나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제가 동양인이라 그런지 그 관계가 꽤나 딱딱하고 사무적으로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자네답지 않은 말이로군.”
나이트 위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보게. 내 입장에서 보자면 자네들의 관계가 더 신뢰성이 없어.”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계약이라는 것은 아주 선명한 관계를 만들어내지. 내가 상대에게 해야 할 것이 명확하니까. 하지만 자네들의 관계는 무척이나 모호해. 상대를 위해 어디까지 하는 것이 옳은지가 정해져 있지 않지. 그건 다시 말하자면…….”
나이트 위긴스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현수를 떠보겠다는 듯 말이다.
“단순한 변심이나 관계의 경색만으로도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든 계약만은 반드시 고수해야 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말일세. 그 예로 동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대들이 그만큼이나 강조하는 충성이 그리 잘 이뤄진 것 같지는 않던데?”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자, 쉽게 생각하자고.”
나이트 위긴스가 너스레를 떨자 이현수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변화를 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흠.”
나이트 위긴스가 천천히 시가를 빨았다. 아무렇게나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너무도 쉬운 질문이니까. 하지만 쉬운 질문이니만큼 대답을 고심해야 한다. 수많은 답 중에서 이현수가 원하는 답을 골라내야 할 테니까.
“내가 왜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는가?”
“…….”
“솔직히 말하지. 원탁은 지는 해야. 하지만 지는 해라 하더라도 아직 총회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내가 죽는 그날까지 총회가 원탁을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할 걸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이래 봬도 다음 대의 마스터로 손꼽히는 자였네. 원탁의 마스터 자리와 총회의 이사 자리라면 비교할 것도 없지. 후자를 선택하는 놈은 미친놈이라 봐도 괜찮겠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말이야.”
나이트 위긴스가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곳을 선택했겠는가.”
“……가능성을 보신 겁니까?”
“그렇다네. 몇 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총회가 원탁을 능가하지 못할 것도 없지. 조건이란 것도 간단해. 로드가 마음대로 날뛰고, 총회는 전력으로 로드를 서포트하면 되는 거야. 당연히 그리될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여기 와보니 아니더군. 오히려 로드가 총회를 서포트하고 있는 느낌이었어.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발전하겠는가.”
할 말이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지금의 총회는 강진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강진호가 총회를 손에 넣어 얻은 이득은 극미한 반면, 총회와 연관되면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극도로 늘어났다.
이현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이해가 빠르지는 않지만 정확하군. 그래, 그걸로 좋아. 일단은 말이지.”
나이트 위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보세나. 내가 해야 할 일은 메일로 보내주게.”
“가, 가시는 겁니까?”
“더 할 말이 있나?”
“제가 해야 할 일은…….”
“이보게.”
나이트 위긴스가 미묘한 시선으로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이현수가 움찔했다.
“강가로 데리고 가줬으면 물은 알아서 떠먹도록 하게. 다 큰 남자를 위해서 물을 떠서 컵에 부어주는 짓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으니 말일세.”
“…….”
“그럼.”
나이트 위긴스가 휘파람을 불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는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빛들이 떠올라 있었다.
“이 정도까지 해줬으면 알아먹겠지.”
총회의 핵심을 쥐고 있는 건 강진호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총회를 흔들 수 있는 강진호이지만, 그는 굳이 그런 일에 직접 나설 의욕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일까지 강진호가 직접 나서는 것도 옳지 못했다. 하나부터 끝까지 보스가 직접 나서야 하는 조직이라면, 그 결과는 빤한 것이다.
조직을 바꾸기 위해 변화시켜야 할 것은 실권자였다. 나이트 위긴스가 보기에 총회의 진정한 실권자는 이전까지 회주였던 방진훈이 아니라 이현수다.
예산을 집행하고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이 실권자인 것이다. 명목상의 명령권만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아니라.
그러니 이현수를 바꾸면 된다.
“개혁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지.”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쥐새끼?”
“오!”
나이트 위긴스가 고개를 돌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셨습니까?”
“그새 중국어가 유창해졌군?”
“원래 어느 정도는 알았으니까요.”
나이트 위긴스는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바토르의 거대한 육체를 보았다.
‘언제나 압도되는 느낌이로군.’
육체의 크기는 언제나 상대를 위협하는 무기가 된다. 하지만 일정 이상의 무학을 익힌 이들에게 육체의 크기는 위협이 될 수 없다. 서로 지닌 무학의 수준이 모든 것을 가를 뿐이다.
하나 바토르의 육체는 예외였다.
아무리 나이트 위긴스라고 한들 저 육체에는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비좁은 곳까지 무슨 일로 왕래하셨습니까?”
“건물이 좁아서 그런지, 쥐새끼가 설치고 다니는 느낌이라 말이야. 쥐를 잡아볼까 해서.”
“좋은 일이군요. 그래서 그 쥐는 잡으셨습니까?”
“고민 중이야.”
“어째서요?”
“단숨에 뭉개 버릴지, 그게 아니면 이 쥐새끼가 하는 꼴을 지켜볼지 고민이라 말이야.”
“음, 그건 제게는 좋은 소식이군요.”
“좋은 소식이라…….”
쿵, 쿵, 쿵!
바토르가 한 발, 한 발 걸어 나이트 위긴스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실감이 난다.
신이 깃든 육체.
그 육체가 적의를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 말이다. 시야를 모두 채워 버리는 바토르의 육체는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위협, 그 자체였다.
“잘 들어라, 쥐새끼.”
“…….”
“네가 뭘 획책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알 필요도 없지. 내가 평가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너의 행동이 주군에게 이득이 되는가, 그게 아니면 손해가 되는가.”
바토르가 으르렁대고 있었다.
“만약 네가 하는 일이 주군에게 해를 끼친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너의 쓸모없고 노쇠한 육체가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주지. 자연의 이치와 하나가 되는 건 꽤나 운치 있는 일이니까.”
죽여서 묻어버리겠다는 말을 기이하게도 돌려 말하는 바토르였다. 그리고 나이트 위긴스는 당연히 바토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난 언제나 침착하지.”
“제가 하려는 일은 결코 로드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한 배를 탄 입장 아닙니까?”
“한 배?”
바토르가 가볍게 웃었다.
“한 배 안에서도 반란은 일어나는 법이지. 나는 너 같은 놈은 신뢰하지 않아. 겉과 속이 다른 놈을 믿을 수는 없지. 긴장해라. 결코 그 긴장을 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주군처럼 관대하지 않다. 그분은 네 쓸모를 인정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네가 쓸모 있는가 없는가 따위는 관심이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물론입니다.”
“능구렁이 같군.”
“능구렁이 같은 게 아니라 호의를 보이고 있는 거지요. 로드의 충직한 부하로서 바토르 님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저를 신뢰할 이유도 없지요. 아직까지 제가 보여 드린 게 없으니까요. 다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저를 지켜보시면 제가 그리 의심스러운 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길 빌지.”
바토르가 몸을 돌렸다.
그저 빠르게 몸을 돌려 버린 것만으로 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진짜 어마어마한 몸이군.’
냉정하게 걸어가 버리는 바토르를 보며 나이트 위긴스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패이긴 하지만, 지금은 조금 곤란하군. 이렇게 감시를 당하면 행동반경이 줄어드는데 말이야. 일단은 좀 치워볼까?’
나이트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아, 바토르 님.”
“음?”
“그거 알고 계십니까? 로드의 행적에 관한 건데.”
“주군의?”
바토르가 흥미를 보인다. 몸을 다시 돌린 바토르를 보며 나이트 위긴스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로드께 잔소리를 좀 듣기는 하겠지만, 이것도 다 로드를 위한 것이니까 이해하시겠지.’
강진호의 표정이 상상되기는 하지만, 일단은 이게 최선이었다. 맹목적인 충성으로 무장한 병사는 언제나 사고를 치는 법이니까.
“로드께서 어딜 좀 가시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바토르 님께서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수행이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지만, 아무래도 가는 곳이 가는 곳이다 보니…….”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본론부터 이야기해라!”
애가 닳은 바토르를 보며 나이트 위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서야 무슨 위협이 되겠습니까, 바토르 님.’
참 순진하고 좋은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일단 커피라도 한잔하시며 이야기 나누실까요?”
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