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23
#722.
고심하다 (2)
“안녕하세요.”
“응, 그래.”
밖으로 나온 박유민은 곽현태와 마주치고 말았다. 곽현태가 그를 보고 고개를 푹 숙인다.
‘역시나 껄끄럽네.’
프로인 이상 경쟁은 피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사람인 이상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모두가 즐겁게 잘살 수 있는 세상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은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경쟁자와 대면하는 일은 여전히 껄끄러웠다. 특히나 그 경쟁이 이미 거의 끝났고, 그 승리자가 자신이라면 말이다.
“연습 잘하셨어요?”
“그렇지 뭐.”
박유민이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 그가 이곳에 테스트를 받으러 왔을 때만 해도 곽현태는 자신감이 넘쳐 났다. 오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박유민은 그걸 나쁘게 보지 않았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계에서 저런 오만함은 되레 장점이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확고한 자신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게 오만함이니까.
부럽기까지 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박유민이 그를 앞서기 시작하면서 곽현태는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과거의 오만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적당히 겸손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곽현태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작아졌다.
좋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박유민이 곽현태의 포지션 경쟁자가 아니었다면 해줄 조언이 넘쳐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유민은 곽현태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이다. 그런 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럼 가볼게.”
“아, 선배님.”
“응?”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가지런히 모인 손이 꼼지락대는 걸 본 박유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카페에 자리를 잡자마자 튀어나온 말이었다.
박유민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연습을 하고는 있거든요. 저도 나름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아요.”
“음…….”
박유민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벌써 한계가 온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빨리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박유민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하나 물어도 될까?”
“예.”
“왜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예?”
곽현태가 고개를 들어 박유민과 눈을 마주쳤다.
“네 입장에서는 제일 껄끄러운 사람이 내가 아닐까 해서. 그런데 왜 굳이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지? 다른 상의할 사람도 많을 텐데. 감독님도 계시고.”
“아…….”
곽현태가 다시 손가락을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예전에 진호가 아마 이런 기분이었겠지.’
박유민도 저랬다.
곽현태는 일시적으로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지만, 박유민은 항상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물어오면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내가 한 대답을 다른 이들이 나쁘게 받아들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박유민은 곽현태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저 기다리는 게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선배님이시니까요.”
“응?”
“게임하는 사람치고 선배님 경기에 열광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저도 아마추어일 때는 선배님 팬이었어요.”
“……고맙다.”
뭔가 대답에 핀트가 어긋난 것 같지만, 일단은 감사를 표하는 박유민이었다.
그리고 대답도 자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우상으로 삼은 이의 인생관마저 닮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존경하는 이가 동물애호가라면 자신도 동물에 관심을 가지려 하고, 존경하는 이가 채식주의자라면 최소한 채식이 뭔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그런 방향에서 박유민이라면 그가 하는 고민의 대답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는 뜻이겠지.
박유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나이가 들고 입장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기대를 받는다는 건 불편한 일이다. 그 자신은 예전과 별로 바뀐 게 없는데 말이다.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다고?”
“예.”
“방법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하면 실력이 더 늘 수 있을지를 묻는 건 아닌 것 같고, 프로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가 고민이라고?”
“예. 아무래도 선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으니까요. 재능이 없고 가능성이 없으면 빨리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음…….”
박유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위화감이 조금 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말씀드렸는데요. 장래성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예?”
박유민이 가만히 곽현태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장래성이 없다고는 해도 네 나이에 그런 걱정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거든. 열아홉에 이 정도 위치면 재능도 대단하고, 받고 있는 연봉도 또래에 비하면 최상위권이고, 게다가 발전 가능성도 충분하고.”
“…….”
“그런데도 그만둘 생각을 한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그럼 둘 중 하나지. 게임이 더 이상 재미가 없어서 게임하는게 고통스럽다든가…….”
“그, 그건 아니에요.”
곽현태가 손을 내저었다.
“게임은 여전히 좋아요. 물론 예전처럼 마냥 즐기면서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는 여전히 게임하는 게 좋습니다.”
곽현태의 얼굴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그럼 무서운 거지?”
“…….”
“게임이 무섭다라……. 하긴 다들 한 번씩은 겪는 일이지. 나도 한때는 마우스 잡는 것도 무서울 때가 있었으니까.”
“선배님도 그럴 때가 있었어요?”
“나는 큰 대회 앞두고는 밥도 잘 못 먹었어.”
“아…….”
박유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고쳐지지가 않더라. 태생이 소심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큰 경기가 있다 싶으면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넘어가. 그리고 모니터만 보면 숨이 턱턱 막혔지. 심리 상담도 여러 번 받았어. 부담감이 심해서 그런 거니까 마음을 편히 먹으라는데, 마음이 편히 먹어지면 병원까지 안 갔을 거 아냐.”
“그렇죠…….”
“그럼 뭐, 별수 있나. 다른 종목이면 약이라도 먹을 텐데, 워낙 섬세하게 컨트롤해야 하니까 감기약도 잘 못 먹잖아. 결국 버틸 수밖에 없지.”
“……예.”
“그럼 들어보자. 너는 왜 게임하는 게 무서운데?”
곽현태가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고민한다. 박유민은 그런 곽현태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고민이 당사자에게는 너무도 심각한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박유민도 그랬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당시에는 죽음 같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강진호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비슷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다려 줘야지.’
먼저 다가가 다른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그 손을 거절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게 원장수녀님의 가르침이고, 강진호에게 그가 배운 것이다.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봐서요.”
“아무것도 아니다?”
“예.”
곽현태가 무겁게 대답했다.
“제가 예전에 게임을 하기 전에는 애들 사이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받았거든요.”
“음…….”
박유민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만 더 그런 생활을 했으면, 제대로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슬슬 그런 기미가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다행히 제가 게임을 잘하니까 힘 있는 애들이 같이 게임하려고 하고, 그러면서…… 네, 그러면서 프로까지 올라온 거예요.”
“그랬구나.”
“게임을 잘하는 것만으로 인생이 달라지는 세상이잖아요. 제가 게임을 못했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서도 최고가 되지 못하면 다시 그런 생활을 하는 게 아닐까, 여기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를 내지 못하면 시간만 낭비하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곽현태의 얼굴이 어두웠다.
박유민이 가만히 곽현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현태야.”
“예, 선배님.”
“전 세계에 최고라고 불릴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곽현태가 고개를 들었다.
“종목당 열 명을 쳐줘도 몇이나 되겠어? 네 말대로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가치 없는 삶을 사는 걸까?”
“아니요. 그건 아니죠.”
“그래, 아니지.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아.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지. 최고가 되고 싶었어. 최고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최고다. 여기서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박유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너보다 더했지. 나는 몸도 불편하잖아. 게임에서라도 최고가 되지 못하면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강박적으로 게임을 했어. 그래서 결과를 내긴 했지만, 그래서 내가 뭔가를 얻었을까?”
“최고가 되셨잖아요.”
“그랬지, 예전에. 그래, 예전에. 지금 내가 최고일까?”
“…….”
“아니지.”
박유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는 없어. 결국에는 내려와야 하지. 네가 원하는 건 그런 거야. 최고의 자리. 영원히 유지되지 않고 한때의 영광으로 남는 자리. 그런 자리에 올랐다가 내려오면 네 삶이 뭐가 그렇게 바뀔까?”
곽현태가 멍한 눈으로 박유민을 보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유민은 최고의 자리를 찍은 람이다. 그런 이가 하는 말은 무게감이 달랐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이를지도 모르지. 나도 아직 어리니까. 하지만 건방짐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나는 삶이라는 게 산을 쌓는 거라고 생각해.”
“산이요?”
“그래. 오르는 게 아니라 쌓는 거지. 급박하게 올라서 목표를 찍고 내려오는 게 아니라, 천천히 지금의 순간순간을 모아서 쌓아 올리는 거라고 생각해.”
“쌓는다…….”
“사람이 쌓아 올릴 수 있는 산의 높이는 다 다르겠지. 재능이 다르고, 방식이 다르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최고가 아니라고 실망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나는 쌓아 나가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더 높은 산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내가 옆 사람보다 낮은 산을 쌓고 있다 해서 손을 멈춰 버리면?”
“더 쌓이지 않겠죠.”
“그래, 그런 거지.”
박유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희가 보기에는 내가 정점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기어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같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때의 삶들은 내 발밑에 쌓여 있어. 지금 나의 토대가 되어주는 거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위에 새로운 것들을 쌓고 있는 거지.”
“아…….”
“최고가 되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잖아. 나도 한때는 그게 사탕발림이라고 생각했어. 최고가 되지 못하고, 결과를 내지 못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했지. 그런데 그게 그런 뜻이 아니더라. 최고가 된다고 하더라도 계속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뒤처진다는 뜻이야. 지금 당장 눈앞에 뭔가가 보이지 않더라도 항상 그때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이긴다는 뜻이지.”
“어려워요.”
“그래, 어려울 거야.”
박유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조금 쉽게 말해볼까? 힘들겠지. 고민도 많겠지. 걱정도 되겠지. 그런데 그걸 누가 해결해 주겠어. 결국 자신의 길을 정해야 하는 건 자신이잖아.”
“……예.”
“고민해. 얼마든지 고민해. 대신에…….”
박유민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고민하는 동안 발을 멈추지는 마. 되돌아가야 하더라도 한 걸음 더 걸었다는 사실이 네 인생의 거름이 되어줄 거야.”
“헛수고라고 해도요?”
“경험은 남겠지. 어쩌면 지금 네 노력이 최고의 결과를 낳지는 못할 수도 있어. 그래도 적어도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아무것도 안 한 나보다는 조금 더 나아지지 않겠어?”
“……그건 그렇겠죠.”
“그 조금을 계속 쌓는 거야. 쌓고 또 쌓다 보면, 어느새 훨씬 커 있겠지.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어.”
곽현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엄청 어렵네요. 그래도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
“아뇨, 형. 도움이 됐어요. 그리고…….”
곽현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전에 건방지게 굴던 것 정말 죄송해요.”
“죄송할 것 없어. 나도 이제 건방지게 굴 거니까.”
“예?”
“농담이야.”
박유민이 피식 웃었다.
‘고민되겠지.’
누구나 고민은 한다. 누구나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계속 걸어야 한다.
박유민은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지금쯤 그의 친구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쌓아 올리면 언젠가는 따라잡겠지. 평생이 걸리더라도 말이야.’
도움만 받는 게 아니라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대등한 관계.
거기까지 가는 길이 아직은 너무도 멀었다.
하지만 박유민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형.”
“응?”
“전화 안 보세요?”
“놔두고 왔는데, 왜?”
“카톡 왔는데…… 스크림 시간 늦었다고 형 찾아오라는데요?”
“히익!”
박유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연습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나 먼저 간다.”
“혀, 형!”
카페 문을 열고 튀어나가는 박유민을 보며 곽현태가 허탈하게 웃었다.
“저 형도 좀 이상한 형이야.”
그럼에도 속이 좀 풀린 것 같다.
앞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도, 우선은 나아가 보기로 결심하며 곽현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