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 business RAW novel - Chapter 2
CHAPTER 02. 십오 년만의 재회
“백작님은 어디 계시지?”
영주의 행방을 묻는 비앙카의 뜬금없는 질문에 집사 뱅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비앙카가 얼마나 자카리에게 관심이 없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만, 이번에는 해도 너무 했다. 그는 비앙카에 대한 힐난을 감추지 않은 채, 어처구니없다는 듯 답했다.
“…영주님께서는 전쟁에 나가셨잖습니까.”
어쩐지. 회귀한 뒤 정신을 다잡기기까지 비앙카는 난리법석을 피웠었다. 아무리 그들 부부 사이가 냉담해도 이정도 소란이라면 한번쯤은 찾아왔을 텐데, 자카리가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때마침 전쟁으로 성을 비웠다니, 여러모로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리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은 반가웠다. 당장 그를 마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비앙카는 안도의 숨을 속으로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천연덕스레 물었다.
“그래?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이래?”
“…마지막으로 연락 받았을 때는, 겨울이 올 때쯤 귀환할 예정이라 하셨습니다.”
“흐응.”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을 보았다. 고갯짓 하나에서도 귀족적인 우아함과 나태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자카리에게 무심한지도. 그녀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했던 뱅상은 소태 씹은 표정을 지었다.
집사 뱅상은 마흔 쯤 되는 사내였다. 자카리가 남작 위를 받기 전, 위그 가에 있었을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했다. 제일 오래된 가신인 만큼 자카리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고, 내성을 관리하는 집사인 만큼 비앙카와 제일 자주 부딪히고는 했다.
이 성에 비앙카를 못마땅해 하고 미워하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아마 그 중 제일은 바로 이 뱅상일 것이다. 아마 자카리를 사모하는 하녀들보다도 더 비앙카를 저주하겠지. 게다가 그는 비앙카를 싫어하는 내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아마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뱅상의 태도를 트집 잡더라도, 자카리가 그런 이유로 자신을 내치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사로서의 그는 우수했다. 태도가 재수 없긴 했지만 그것은 단지 사감이었을 뿐, 그는 아르노 가의 안주인인 비앙카가 바라는 것을 대부분 들어주려 노력했고, 그녀를 모시는데 있어서 소홀하거나 트집잡힐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니 비앙카도 그의 건방진 태도를 흘러 넘기는 것이다. 정도 이상으로 기어오르지 않고 제 분수를 안다. 비앙카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차피 아랫것들에게 깊은 충심을 바라는 것은 아니니까. 게으름 부리지 않고 제대로 일하고, 주인의 것을 노리는 도둑놈만 아니라면 비앙카는 제법 관대했다….
물론 그것은 비앙카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르노 가의 하인들은 모두 그녀를 꺼려했다. 그녀가 유난스레 못되게 구는 주인도 아니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뭐. 그렇다 해서 현생에서 그 이유를 알아내어 개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전생의 삶에 대해 후회하고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몇 가지 요소에 관한 것일 뿐, 딱히 착한 사람이 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 천지가 개벽하였다 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비앙카는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졌으면서도 남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내쫓긴 굴욕을 못 잊어 하는 형편없는 아내였다. 되살아나서도 다시 남편을 사랑하겠다 다짐하는 것보다 애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여자. 그것이 바로 비앙카였고, 비앙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일신의 안녕과 전생의 업에 대한 복수였다. 자신의 평판, 혹은 타인과의 관계 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뱅상은 창밖을 보며 상념에 빠진 비앙카에게 딱딱한 어투로 되물었다.
“별달리 지시하실 일이라도?”
“아니, 딱히.”
비앙카는 고개를 저었다. 궁금했던 것은 물었으니 이걸로 되었다. 이제 쓸모없어진 뱅상을 돌려보내려고 한 순간, 그녀는 퍼뜩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맞아. 이번 겨울, 추울 것 같으니까 여우털 모피를 준비해줘. 흰여우가 좋아.”
“…알겠습니다.”
뱅상은 다시 한 번 얼굴을 구겼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이미 모피가 몇 개나 있으면서도 매번 새 모피를 맞춘다. 남편은 전장에 있는데, 평소와 같은 사치스러운 소비는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그들의 어린 안주인은 사치스럽기로도 유명했다. 블랑쉐포르 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그녀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중 갖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녀와 자카리가 결혼 했을 때, 블랑쉐포르 가에서 보낸 지참금이 어마어마할 정도였다.
지참금은 신부 측에서 보내는 혼수였지만 만약의 경우, 그러니까 신랑이 일찍 죽기라도 한다면 과부가 된 신부에게 그만큼을 더 얹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면 남편이 죽고 난 뒤 신부는 지참금의 두 배만큼의 재산을 갖고 재혼을 하거나 홀로 살아가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딸을 생각하는 신부 측 부모는 줄 수 있는 만큼 지참금을 챙겨주려 했고, 신랑 측에서도 당장 많은 돈이 들어오는 것을 반기기도 했다.
하지만 블랑쉐포르 가에서 제안한 금액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당시 아르노 가의 이 년 치 예산에 육박했는데, 만약 자카리가 전쟁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아르노 영지의 대부분이 그대로 블랑쉐포르 가로 굴러 떨어질 정도의 금액이었다. 결국 자카리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참금을 좀 조정해 주십사,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셔온 아가씨는 기품과 오만함을 두른,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소꿉놀이를 해주는 대신 보석이나 여우 모피를 사다 나름으로서 비위를 맞춰야 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이 데려온 유모와만 이야기 했으며, 필요한 말 이외에는 사용인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작의 혈통인 고귀한 그녀가 근본 없는 것들과는 이야기조차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에는 비앙카의 시선 또한 한몫했다. 블랑쉐포르가의 맑은 연녹색 눈동자는 언뜻 보기엔 봄에 솟아나는 새싹처럼 따듯한 온기를 품고 있었으나, 실제로 마주한 그녀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차가운지 비앙카가 일곱 살일 적부터 기가 약한 이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았고, 기가 센 이들은 불퉁하니 치솟는 반발심으로 씩씩거렸다. 그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혈기 넘치는 이들을 진정시키느라 뱅상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녀의 쌀쌀맞은 시선은 이 성의 주인, 아르노 백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할 당시 자카리는 남작이었고, 본가는 자작가 출신의 한미한 집안이었다.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자작가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수도원과 기사,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는 열여섯의 나이에 첫 출전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스물의 나이에 남작의 작위와 함께 아르노 땅을 하사받게 됨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명문 블랑쉐포르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자카리 본인조차도 어째서 블랑쉐포르 백작이 자신에게 혼담을 넣었는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어 했다.
블랑쉐포르 백작이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깊은 뜻을 딸아이에게 전달해주었다면 참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일곱 살의 비앙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못마땅한 듯 투정을 부리고 남편인 자카리를 기피했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달래기 위해 나름 많은 노력을 했다. 비앙카와 함께 식사를 하려 해보기도 하고, 비앙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주기도 하고…. 하지만 무뚝뚝한 얼굴과 험한 말투가 결합되니 썩 효과가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카리는 최선을 다했고, 그런 만큼 아내에게 찬바람이 쌩쌩 날릴 정도로 차가운 태도로 홀대당할 이유는 없었다.
뱅상은 비앙카가 지금껏 계속해서 자카리를 밀쳐내는 것은, 그녀가 내심 자카리의 작위와 혈통을 깔보아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주인님이 그저 혈통 좋게 태어났을 뿐인 어린 여자아이에게 멸시당하는 것이 분통 터졌다. 하지만 정작 주인인 자카리가 그런 그녀의 태도를 흘러 넘기니, 뱅상으로서는 어찌할 바가 없었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이제 비앙카는 어린 아이가 아닌 소녀가 되었고, 곧 여인이 될 것이다. 그녀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치러지지 않았던 첫날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정략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 사랑이 있는 경우가 드물었으니까. 귀족 부부들은 양가 사이에 켜켜이 쌓여진 계약서와, 잠자리를 하며 붙은 정, 그리고 핏줄을 통한 후계자를 의지하며 살아가곤 했다.
후계자. 그 후계자가 생기게 되면 좀 나아질까.
무공으로 작위를 받고 세력을 불린 귀족인 만큼, 자카리는 일련의 절반 가까이를 전장에서 보냈다. 집사이자 가신 된 입장에서 후계도 없는 영주님이 그렇게 위험한 전장을 전전하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부터 후계를 가지시라 계속해서 간청 드려왔는데, 비앙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자카리는 그의 청을 묵살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던가. 남편이 사지에 있는데, 아직도 철이 없는 백작부인은 흰여우 모피나 가져다 달라 요청하고 있지 않던가. 뱅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겨울, 자카리가 돌아오면 다시 한 번 후계에 대해 진지하게 건의 드려봐야겠다. 후계가 생기고 나면 마님께서도 철이 들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뱅상은 혀를 차며 방을 나섰다.
* * *
겨울이 다가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낙엽은 파스스 사라지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눈이 소복이 올라왔다. 그리고 자카리는 한 무리의 군사들을 이끌고 아르노 성으로 돌아왔다.
뱅상은 겨울이 오기 전 흰여우 모피를 구해왔다. 흰여우는 쉽게 잡기 어려웠지만 그만큼 하얀 털이 아름다워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발 빠르게 움직인다 하여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냥꾼이나 상인들과 나름의 연결책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 흰여우 모피를 냉큼 구해오다니, 뱅상은 여러모로 유능한 집사였다.
비앙카가 굳이 뱅상에게 흰 여우 모피를 가져다 달라 요구한 것은 사치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과거의 화려했던 추억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각오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비앙카는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내리 감았다. 이런 것을 계속 두르고 있고 싶다면, 계속해서 안락한 삶을 살고 싶다면,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내놓을 것이 있어야만 한다.
어린 시절에는 마냥 주어지기만을 기대했지만, 이제 세상을 겪을 만치 겪은 그녀는 이제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해야 하는 일 또한, 일종의 ‘대가’였다.
흰 여우 모피를 어깨에 두른 비앙카는 창밖을 보았다. 귀환한 자카리와 그 부하들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온 듯, 창밖으로는 마부들이 말의 고삐를 잡아끄는 모습만이 보였다.
비앙카는 심호흡을 했다. 남편과의 대면이 코앞으로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까 언뜻 본 그의 모습이 눈에 각인된 듯 선명했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 뿌옇게 가려진 안개 속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듯 그의 젊은 모습은 반가움보다는 생소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자카리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였더라?
십오 년도 더 전이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도 하다. 낯선 것도 당연하지. 비앙카는 스스로를 그리 타일렀다.
몇 달 만에 성으로 귀환했지만 자카리는 비앙카를 찾아오지도, 찾지도 않을 것이다. 별다른 용건이 없는 한, 그들 부부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어디까지나 같은 행동반경에서 동선이 겹칠 때 이루어지는 우연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카리에게 있어 전쟁에서 돌아온 일은 별다른 용건조차 되지 못했다.
자카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녀가 직접 움직여야만 했다. 비앙카는 방을 나섰다. 다리가 치맛단 속에서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태연한 척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 끝을 잡아 당겼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주변 하녀들은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질 쳐 그녀를 피했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로비로 향했다.
그녀가 로비로 가까이 갈수록, 사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자카리가 이끄는 아르노 기사단의 이번 출정은 그다지 험난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내들의 낯에 승리의 기쁨만이 흘러 넘쳤다. 기사들은 왁자지껄하게 자신의 무훈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였고, 하인들은 그들을 선망의 눈길로 지켜 보았으며, 하녀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그들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아직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들떠 오른 분위기는 이미 연회의 한창이나 다름없었다.
비앙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래서 내가 그 놈의 목을 딱! 움켜쥐고 탈탈 흔들었는데….”
“소뵈르.”
아르노 군의 부대장, 소뵈르가 흥분한 태도로 침을 튀기며 자신의 활약을 늘어놓고 있던 찰나, 그의 동료이자 같은 부대장인 로베르가 소뵈르의 옆구리를 툭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한창 신이 났던 소뵈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로베르를 돌아보았는데, 그는 그제야 로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어? 어어….”
“…….”
로비는 언제부터인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로베르의 턱 끝이 슬쩍 2층의 계단참을 향했다. 소뵈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로베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르노 성의 안주인, 비앙카였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도 섣불리 반발할 수 없는 위엄과 기품이 그녀의 작은 몸집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비를 잠식한 무거운 침묵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비앙카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숨을 들이켠 채 침묵한 이유. 그것은 바로….
“마님께서 소란스러운 이곳에는 어떤 연유로….”
로베르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비앙카에게 물었다. 그의 자세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공손하였으나, 암녹색 눈동자에 비친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보는 듯한 불안함이었다.
로베르 뿐만이 아니었다. 로비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에 도사리고 있는 적대감과 거리낌. 그들에게 있어 비앙카는 어리고 까탈스러운 데다, 좋아할 구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주인마님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비앙카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런 그들의 태도에 상처받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들키면 다들 자신을 우습게 볼까 두려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더 콧대를 높였고, 지금은 그런 것에 상처받기엔 다른 신경 쓸 것이 많았다.
비앙카의 시선이 로비를 훑었다. 자카리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집사 뱅상을 찾았지만, 뱅상 또한 로비에 없었다. 비앙카는 한숨을 속으로 삼킨 채 로베르에게 물었다.
“백작님은?”
“…방으로 먼저 가셨습니다.”
“그래? 왜?”
“몸을 씻으신다고.”
“알았네.”
비앙카는 별 거 아닌 듯 천연덕스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로비에서 자카리를 만날 줄 알았는데. 잔뜩 긴장했던 몸이 일순 풀어지며 심장이 쿵쾅쿵쾅 크게 뛰었다.
비앙카가 로비에서 사라지고 난 뒤, 약속이라도 한듯 다같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제일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던 소뵈르는 그 동안 숨조차 쉬지 않은 듯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로베르는 비앙카가 사라진 복도 끝을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저러지?”
“뭐가?”
“뭐긴 뭐야. 마님이 여기까지 행차한 게 신기해서 그러지.”
“하긴. 항상 방안에 콕 박혀서 백작님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던 분이셨으니까.”
“…….”
무뚝뚝하니 말 없는 가스파르 또한 로베르와 소뵈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끄덕였다.
소뵈르와 로베르, 그리고 말없는 가스파르. 아르노 기사단의 부대장인 세 사람은 자카리의 수족과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그런 만큼 자카리를 홀대하는 비앙카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자카리가 그녀를 위해 얼마나 신경써주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이것밖에 안되느냐는 듯 구는 걸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그들의 안주인은 비앙카, 그녀였는데. 그녀를 욕해봐야 누워서 침 뱉기밖에 되지 않는다. 소뵈르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으며 비앙카의 돌발 행동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갑자기 왜 저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별 거 아닌 변덕이겠지. 우리가 알 바는 아니야.”
“또 괜히 백작님을 찾아가서 심기 거스르는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면….”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가 막을 수는 없잖아.”
“하긴. 아, 백작님도 백작님이지. 마님이 뭔 소리를 하든 그냥 듣고만 계시고…. 한번 쯤은 화를 내셔도 되는데.”
“아서라, 아서. 열세 살이나 어린 신부 바람 불면 날아갈까 찍소리도 못하시는데, 화는 무슨 놈의 화.”
“그러니까 그 어린 신부 비위를 언제까지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하는 소리지!”
로베르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용이 내용이니 만큼 아차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소뵈르가 먼저 눈짓으로 하인들을 물려놓은지라, 그의 불경한 지탄을 들은 하인은 없었다. 애써 진정한 로베르는 언성을 낮췄지만, 미처 삭이지 못한 분이 남아있다 보니 그의 목소리는 이글이글 끓었다.
“블랑쉐포르 가에서 혼담이 왔을 때, 열세 살이나 어린 신부 데리고 소꿉놀이 하게 생겼다며 놀리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다른 혼처를 찾아보라 했었어야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블랑쉐포르 가만 한 가문은 또 없어. 블랑쉐포르 가의 지원 덕에 백작님께서 작위를 얻는 게 더 수월했다고 한 건 로베르, 너잖아.”
“…….”
자신이 했던 말을 끄집어내는 소뵈르의 말에 로베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셋 중에서 제일 경박하고 정치판도 읽는 수가 얕은 소뵈르에게 사실을 지적당하니 로베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로베르에게 한 소리 하기는 했지만, 소뵈르는 로베르가 왜 그리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로베르는 남작가의 셋째 아들이기는 했지만, 세 부장들 중 유일한 귀족이었다. 그런 만큼 귀족들의 허례허식과 예의를 숭상하며 점잔하고 숙녀들에게 상냥했다. 원래의 그였더라면 귀족 마님, 그것도 그들의 주군의 아내인 비앙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일가는 자카리의 충신이었다. 소뵈르와 가스파르 또한 목숨을 내걸 수 있을 정도로 자카리에게 충성했지만, 로베르는 충성을 넘어서 헌신에 가까울 정도였다. 자카리를 위하는 마음을 제일 대놓고 드러내는 이도 그였고, 자카리가 남작이었던 시절 백작가에서 혼담이 들어왔다는 말에 ‘우리 남작님이 인정받은 것’이라며 제일 기뻐했던 것도 그였다. 그랬던 만큼 비앙카와 자카리의 결혼생활이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더더욱 못마땅했으리라.
소뵈르는 자신의 말에 입을 꾹 다문 로베르를 보며 난처함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말을 돌리기 위해 아까 비앙카의 모습을 떠올리며 과장스레 말했다.
“그러고 보니 흰여우 모피는 처음 보는 건데. 또 그새 사재끼셨어. 대단하다, 대단해.”
“…백작님이 허용하신 걸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우리 영지가 모피 하나로 벌벌 떨 정도로 빈곤하지도 않고.”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로베르가 정돈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베르는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투덜댔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성의와 마음의 문제지. 우리 마님께서는 저 여우 모피를 받아들고 희희낙락하시는 동안 우리 백작님께서 죽을 고생하며 전장에서 구르고 있었던 건 아시나 몰라.”
“확실히 유지비가 많이 드는 장사기는 하지.”
소뵈르의 말에 동감이었던 만큼, 로베르는 그의 입을 다물리는 대신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뚝뚝한 가스파르 만이 그런 둘의 태도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말재간이 없는 그는 두 사람을 말리지 못하고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 * *
비앙카는 자카리의 방으로 향했다. 자주 발걸음 하지 않던 곳이다 보니 이 길이 맞나 싶어 몇 번이고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를 반복했다. 자카리의 방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오랜만에 귀환한 영주님을 보필하느라 바쁜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문 틈새로 흘러나왔다.
문이 열려있다 하나 선뜻 들어서는 건 예의가 아니다. 비앙카는 우아하게 똑똑,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 마님?”
문을 열고 상대를 파악한 뱅상은 뜻밖의 상대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태도는 예상한 바다. 감춰지지 않는 상대의 거리낌에도 불구하고 비앙카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백작님은?”
“…씻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뱅상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자카리는 항상 전쟁을 끝내고 성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목욕을 하곤 했다.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아내라는 이가 그런 것 하나 모르다니, 정말 백작님에 대해 관심이 없구나 싶어 뱅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네.”
비앙카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림이 없는 것에 작게 안도했다.
갑자기 비앙카가 자카리를 보겠다 나서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뱅상의 눈빛이 의심스레 비앙카를 훑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천연덕스레 고개를 치켜들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꺼림직하다 해도 안주인인 비앙카를 막을 수는 없는 법. 뱅상은 어쩔 수 없이 비앙카를 방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백작님께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그리하지.”
뱅상이 자카리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자리를 피하고 비앙카 혼자만이 방에 남았다. 비앙카는 초조함에 파르르 떠는 손을 옷자락 사이로 숨겼지만, 서성거리는 발걸음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자카리의 방은 비앙카의 방보다 훨씬 크고 넓었지만, 그만큼 휑했다. 벽에 별다른 장식용 무늬가 그려진 것도 아니고, 커튼은 밋밋했고, 카페트는 고루하기 짝이 없는 단조로운 무늬였다. 그의 방에 있는 장식이라 할 만한 것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태피스트리와 벽에 걸린 몇 개의 무기가 전부였다.
주인의 귀환을 맞이하여 일찍부터 신경 쓴 듯 벽난로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비앙카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장작을 집어 삼키는 불꽃의 흔들림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긴장해서 그런지 주의력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런 그녀를 비웃듯, 나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
“오랜만이로군.”
비앙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커다란 남자가 산처럼 서있었다.
그녀의 남편, 자카리 드 아르노 백작이었다.
짙은 눈썹과 그 밑의 날카로운 눈매는 항상 풀어짐 없이 또렷했으며, 콧대는 높은 자존심을 그대로 드러냈고, 딱 다물린 입술에서는 입이 무거운 그의 성격이 묻어났다. 아내가 아닌, 적군의 수장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스물아홉인가. 지금의 그는 비앙카가 죽었던 서른여덟의 나이보다 젊은, 한창인 나이의 청년이었지만 마냥 풋풋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카리의 관록과 연륜은 나이에 비해 훨씬 농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수성가로 두각을 나타낸 귀족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위그 가의 둘째로 태어나서 수도원과 기사,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카리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하고 열여섯의 나이에 검을 들고 전장으로 향했다.
열여섯은 그런 나이다. 어른으로 인정받는 나이. 사내는 가문에서 내쫓기고, 여자는 다른 가문으로 팔려가고. 가문에 남아있는 자식들은 대부분 열여섯을 넘기지 않고 뿔뿔이 흩어진다. 가문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문의 후계자, 혹은 결혼 장사를 할 필요가 없는 대단한 가문의 여식들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비앙카의 나이이기도 했다.
자카리가 검을 들고 나선 나이에, 비앙카 자신은….
비앙카는 떠오르는 상념을 몰아내었다. 괜한 생각을 해봤자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비앙카의 시선이 가볍게 자카리를 훑었다.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사슬 갑옷은 벗어낸 그는 훨씬 가벼운 차림새였다. 가벼운 튜닉과 바지, 그리고 가죽 장화. 그의 한쪽 이마를 덮은 은회색 빛 머리카락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목욕을 하던 중에 자신이 방해를 한 모양이었다.
“제가 목욕을 방해한 건가요?”
“아직이야.”
자카리의 대답은 단조로웠다. 그는 언제나 말이 짧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뿐더러, 필요한 이야기 또한 거의 하지 않았다. 그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부차적인 정보를 얻는다거나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끼이이익. 백작 부부 사이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자카리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이제 방안엔 정말 두 사람뿐이다. 비앙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가는 목울대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자카리는 문가에서 몸을 떼고 한 걸음, 한 걸음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지만 바로 비앙카에게로 향하는 대신, 그는 그녀와 어느 정도 일정 거리를 둔 위치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확실하게 목을 물어뜯을 수 있을 때를 노리며 상대의 반응을 지켜보는 거리. 그는 마치 사냥감을 향해 빙빙 돌아 접근하는 맹수 같았다. 물론 사냥감은 비앙카, 그녀였고.
자카리는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꿰뚫릴 것만 같다. 비앙카는 자신을 노려보는 자카리의 검은 눈동자에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겁먹은 듯한 모습은 앞으로 그녀가 늘어놓을 말들에게서 신뢰를 빼앗아간다. 슬핏 창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비앙카는 표정을 가다듬고 허세를 둘렀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자카리였다.
“웬일이지?”
“웬일이라니요. 남편이 전쟁에서 돌아왔으니 가문의 안사람으로서 찾아뵙는 게 당연한 법도지요.”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을 아내가 찾아왔는데 웬일이냐니. 비앙카는 애써 웃음지으며 부드럽게 받아쳤지만, 사실 그들 부부가 ‘당연한 법도’ 운운할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카리가 그녀의 방문을 얼마나 당황스러워하는지 공감하는 만큼, 비앙카는 이 민망하고 어색한 상황에 귓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급한 일인가 보군.”
급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다는 듯한 말투에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카리와 말하면 말할수록,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 부부 사이의 앙금은 생각보다 깊고 단단하여 쉽게 허물어질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비앙카 또한 자카리가 갑자기 페르낭처럼 군다면 되레 마음의 벽을 쌓아 올릴 것이다. 그만큼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비앙카는 주먹을 꾹 쥐고, 참을성 있게 답했다.
“…단순한 안부 차 들른 거였어요.”
“그러니까.”
자카리의 까만 눈은 깜빡임 한번 없었다. 그의 시선은 비앙카의 내심을 샅샅이 파악하려는 듯이 집요했다.
“당신이 내 안부를 물을 정도면, 어지간히도 급한 일 아닌가.”
자카리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그의 말에 섞인 이죽임은 툭 튀어나온 못처럼 날카로웠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비앙카를 공격했다. 넌 지금껏 나에게 신경 쓰지 않지 않았더냐, 라고 되묻는 것만 같았다.
자카리가 갑작스러운 자신의 방문을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모두 예상 범위 내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을 맞닥트리고 나니 심장이 거세게 뛰고 혀가 딱딱하게 굳었다. 입안에 있는 것이 돌덩이 같았다. 비앙카는 진정하려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 해야 이 분위기를 누그러트릴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녀에게 그럴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무언가 갖고 싶은 게 있나보지? 그런 게 있다면 집사 뱅상에게 요구하면 되네.”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저….”
비앙카의 입이 달싹 거렸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그가 그녀의 말을 곡해 없이 들어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비앙카는 드레스를 꽉 쥐었다. 가늘고 쭉 뻗은 하얀 손가락의 뼈마디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일단 그가 믿든 믿지 않든, 그녀로서는 우겨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그, 그녀 둘 다 알고 있다 해도.
비앙카는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마 남들이 보기엔 괴이한 표정일 테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오신 거잖아요. 아내 된 도리로서 찾아오는 게 당연하죠.”
자카리의 미간에 미약하게 주름이 졌다. 비앙카의 말이 거슬리는 것일까? 지금껏 외면하고 있었으면서, ‘아내 된 도리’ 운운을 하는 것이 불쾌했을 수도 있다. 그를 비꼬는 거라 생각했을 수도. 비앙카의 억지웃음에서 느껴지는 거짓말 또한 한몫 했으리라. 자카리가 자신의 말을 오해할까 두려웠던 비앙카는 급하게 덧붙였다.
“지금까지 제가 소홀했던 것도 있구요.”
자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로 비앙카의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자카리는 여전히 비앙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그녀를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의 거리가 머니, 계속해서 대화가 빙빙 겉도는 느낌이었다. 거리가 조금이라도 가까우면 좀 나아질까. 비앙카는 자카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고작 한 발짝인데도 발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그런 비앙카의 노력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비앙카가 다가서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크게 움찔이더니, 뒷걸음질 쳐 그녀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듯 그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서는 것도 싫을 만큼 질색이란 말이야? 비앙카는 아까보다도 더 멀어진 거리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행동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걸 자카리 또한 깨달았는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한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아직 안씻었어.”
“…네?”
엉뚱한 자카리의 말에 비앙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자카리는 당황했다. 그가 당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비앙카 또한 당황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지?”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아무 것도 아니네.”
자카리는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리더니 또 입을 꾹 다물었다. 알쏭달쏭한 그의 말에 비앙카는 살풋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말의 인과관계가 도통 이해 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자카리가 조심스레 비앙카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이제는 비앙카의 몸이 움찔했다. 본능이 그에게서 달아나야 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거라 경고했다. 그건 안 된다. 두렵다 하여 마냥 도망친 결과가 어땠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비앙카는 뒷걸음질 치지 않은 채, 고집스레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뒷목이 선뜩했으며 손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선 자카리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본 자카리는 그녀가 지레짐작한 것보다 훨씬 컸다. 그녀의 시선 높이에 닿은 것은 단단하고 드넓은 자카리의 가슴팍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떠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비앙카는 숨을 들이켰다.
과거의 그녀는 이런 그가 싫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궤짝 속에 숨어있는 검을 괴물처럼 너무 커다랗고, 무서워서.
하지만 언제까지 두려워 할 수는 없다. 그녀는 그를 마주봐야만 했다.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비앙카의 시선이 자카리의 굵고 긴 목선을 지나 단단한 턱 끝, 그리고 깊게 패인 눈두덩이 아래 빛나는 날카로운 눈에 닿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는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 자카리의 움직임은 훈련받은 군인처럼 절도 있고 딱딱했지만, 그럼에도 이런 사소한 행동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야만성과 야생성이 드러나곤 했다. 날 것 그대로를 상대하는 듯한 느낌. 초식동물이나 다름없는 비앙카는 바르르 떨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위협이었다.
자카리는 잠긴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대가 이렇게 살가운 건 또 처음이로군.”
자카리의 까만 시선이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를, 코를, 뺨을, 목덜미를, 둥근 어깨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샅샅이 훑는 느낌.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비앙카의 하얀 피부가 열에 데인 듯 달아올랐다. 자카리는 혀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입안이 바싹 마른 모양이다. 자카리로서는 별것 아닌 행적 하나하나에 비앙카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이 굳었다.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아.”
“꿈이 아니에요.”
비앙카는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 올렸다. 오늘 얼마나 억지 미소를 많이 지어댔는지, 뺨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가운 듯 웃어야만 할 텐데, 차라리 이대로 얼굴이 굳었으면 좋겠다. 비앙카는 그리 바랐다.
그나저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지, 그와 자신의 몸이 곧이라도 맞닿을 것만 같았다. 비앙카의 가지런한 앞머리에 자카리의 숨결이 닿으며 살짝 흐트러졌다. 그와의 거리가 좀 가까워지면 마음의 거리도 좀 좁혀질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비앙카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빨리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몸이 움찔움찔했다. 비앙카는 그런 심약한 자신이 싫었지만, 바꾸고 쉽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인내심 초과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비앙카는 최대한 거부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카리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슬쩍 밀어 냈다.
그녀의 약한 힘으로는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안할 것 같았던 자카리의 몸이 가는 손끝 아래 순순히 멀어졌다.
비앙카는 마지막 힘을 다해 생긋 웃었다. 자카리가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믿든 안 믿든, 그녀로서는 한동안 구관조처럼 말을 하고 또 하고, 되풀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도 이제 나이를 먹었잖아요.”
자카리는 어딘지 얼떨떨해 보였다. 그는 비앙카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짐작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짐작도 못하는 모양이다.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언제까지 백작님을 피할 수도 없고…. 제 의무를 다해야죠.”
“의무?”
자카리가 되물었다. 차라리 비웃는 쪽이 낫다. 자카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 건조한 낯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오히려 비앙카의 얼굴이 더 홧홧해졌다. 비앙카는 자신의 떨림이 드러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애써 태연한 척, 당연한 척 턱 끝을 치켜들었다.
“백작님의 후계자를 낳는 것이요.”
“…후계자를 낳기 위해 무슨 일을 치러야 하는지는 아시오?”
“물론이죠!”
어른스러운 척 담담함을 유지하려 했는데, 어린애 취급하는 자카리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바락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자카리는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비앙카에게서 빗겨 내려갔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쉽사리 답을 내뱉지 않았다. 계속되는 침묵에 비앙카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몇 번이나 날름였다. 비앙카는 저 혓바닥의 감촉을 알고 있다. 둔탁하고, 거칠고, 비앙카의 저항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거세고 우직한 느낌. 비앙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한참 끝에 자카리의 목소리가 비앙카의 귓가를 두드렸다.
“솔직히 곤혹스럽군.”
한숨 섞인 목소리는 난처함으로 가득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꾸민 듯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일렀다.
“무엇이 그대의 맘을 뒤흔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떠하오?”
일견 다정하게 들리는 말투는 자카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비앙카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르게 붉어졌다 파래졌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들어가서 쉬라니, 그것밖에 할 말이 없단 말인가? 자신이 어떤 각오로 이 자리에 섰는데…. 자카리의 모욕에 비앙카의 몸이 떨렸다.
비앙카의 초록빛 눈빛에 확 불이 질러졌다. 비앙카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지금껏 애써 붙들고 있던 나긋한 가식에 금이 쩡 갔다. 파편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며, 상처 받은 자존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해서 이러는 줄 알아? 어차피 이 년 뒤에는 날 찾아오게 되잖아. 어차피 나에게서 후계자를 봐야하잖아!
비앙카는 거칠게 토해지는 숨을 죽이려 노력했다. 그녀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비앙카의 작은 입술이 달싹이며 올라갔다. 그녀는 다시 가식의 가면을 되찾았지만, 혀끝에는 미처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아있었다. 심록의 숲처럼 어둡게 침잠한 비앙카의 눈동자가 유난히 선명했다.
“우리의 결혼은 얼마짜리 결혼이었죠?”
“송아지 400마리, 돼지 900마리, 은그릇 100개, 비단 300필, 보석 두 궤짝, 그리고 영지 일부분…. 아르노 가의 이 년 치 예산 만큼이었지.”
비앙카의 뜬금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에서 오간 예물을 나열하는 자카리의 목소리는 고요하고도 평안했다. 자카리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다시 떠올리지도 않았고, 손가락을 꼽아 셈해보지도 않았다. 자카리는 외우기라도 한 듯 지참금을 비롯한 그녀의 재산 목록을 줄줄 읊었다. 마치, 항상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비앙카는 자카리가 왜 그런 걸 외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참금이 어마어마한 금액이기는 하지만 늘상 외우고 있을 만큼 자주 들여다 볼 내용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내의 재산은 남편의 재산이나 마찬가지다. 아내의 재산을 셈해봐야 할 때는 남편이 죽어 아내 혼자 남거나, 아내를 쫓아 보내고 새장가를 들 때라거나, 두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를 쫓아내려고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에게 정부가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상관없다. 어차피 자카리는 그녀를 이혼시킬 생각이 없다.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이혼을 당해도 전생에서 진즉 당했겠지. 여자는 이혼을 주장할 수조차 없는 만큼, 이혼은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잖아. 비앙카는 자신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흰여우처럼 웃었다.
“그 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
자카리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드디어 그에게 한방 먹였다는 생각에 비앙카는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지금 그녀 혼자 있었더라면 절로 콧노래를 불렀을 정도로. 휘어지는 눈매에 즐거움이 뚝뚝 묻어났다.
처음에는 긴장감에 바들바들 떨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어느새 비앙카는 자카리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고삐가 쥐이니, 무서웠던 자카리 앞에서도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그가 곤궁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하면 혓바닥이 근질근질했다.
잠자코 있던 자카리가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마치 패배의 시인과도 같은, 길고 긴 한숨이었다. 비앙카는 승리의 도취감을 느꼈다.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지지부진할 뿐인데, 관계의 주도권을 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그래. 자카리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만약 비앙카가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갑자기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아내가 나타나서 후계자 운운하니 갑작스러웠겠지. 정부에 관한 문제도 채 해결하지 못했을 테고. 비앙카는 인심 쓴다는 듯 거드름을 폈다.
“정부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것도 좋아요. 헤어지라고 하지 않을게요. 제 밑으로 넣어줄 수도 있구요.”
“…정부?”
“모르는 척 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그 정도 세상물정은 알아요.”
스무 살 한창일 때 일곱 살 어린아이와 결혼해서 십여 년간 독수공방. 그 사이 숨겨둔 정부 하나 없을 리가 없다. 아르노 성의 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부부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리 말했다. 하물며 비앙카의 아버지, 블랑쉐포르 백작도 은연중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 넌지시 일렀을 정도였다.
비앙카가 생각해도 그에게 정부가 있는 게 당연했다. 자카리가 불능도 아니고, 그 누구보다도 혈기 왕성한 사내 아니던가. 침대에서 집요하게 달라붙어오던 그를 생각하면, 그가 정부가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 정부조차 받아들여 주겠다니, 본처로서 자신이 얼마나 아량이 넓은 이인가! 자카리는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했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비앙카와 앞으로의 그녀가 다른 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생각이다. 비앙카는 천연덕스레 자카리를 올려 보았다.
“하.”
하지만 자카리는 화를 냈다. 소리를 지르지도,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자카리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기가 찬 한숨을 뱉었다. 곧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것처럼 그의 눈빛이 형형했다. 비틀린 입술 사이로 이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났다.
마치 비앙카가 그의 약점을 찌르기라도 한 듯이.
숨겨둔 정부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걸까? 언제까지 그녀에게 비밀로 할 생각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자카리가 죽고 나서도 그의 정부에 관한 이야기가 떠돌지 않은 걸 보니, 계속해서 철두철미하게 숨긴 모양이다. 될 수 있는 한 밝히고 싶지 않았겠지. 그것을 아내가 공공연하게 들고 나오니 면목이 서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자카리도 자신의 제안이 이득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후계자도 얻고, 지금껏 꽁꽁 숨겨두었던 정부도 공공연하게 데리고 다닐 수 있고.
비앙카는 조금만 더 설득하면 자카리가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로서는 자카리에게 정부가 있든 없든, 후계자만 가지면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비앙카가 한 마디 더 하려고 입을 뗀 순간, 자카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이야기를 일축했다.
“누가 그대에게 그런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모르겠군. 후계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당장 쓸모없는 이야기로군.”
“쓸모없지 않…!”
“뱅상! 마님을 정중하게 방으로 모셔가게!”
자카리는 비앙카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카리의 고함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뱅상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기라도 한듯 재빨랐다.
방에 한 사람이 들어왔을 뿐인데, 지금까지의 균형이 기우뚱 자카리에게로 기울며 승기가 전복되었다. 비앙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얼굴이 일그러진 건 비앙카 뿐만이 아니었다. 방안의 상황을 살펴본 뱅상의 얼굴도 와락 찌푸려졌다.
냉정한 백작님이 소리를 높이고, 마님을 억지로 끌어내라 말하기 까지 하다니. 우리 답 없는 마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분명 못된 말로 백작님의 가슴을 후벼 팠겠지. 뱅상은 쯧, 혀를 차며 비앙카에게로 다가갔다. 그래도 백작님이 정중히 모시라 한 만큼 억지로 끌어낼 수는 없었다. 뱅상은 비앙카에게 허리를 숙이며 한껏 예의를 갖춰 요청했다.
“마님. 따라 오십시오.”
하지만 비앙카는 제 앞에 고개를 숙인 뱅상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자카리를 노려보았다. 대화하기 싫다 해서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비앙카는 화를 억누른 채, 최대한 자신이 흥분하지 않고 냉정한 상태라는 것을 어필하듯 침착하게 말했다.
“쓸모없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르노 가를 위해서 제일 중요한 일 아닌가요?”
아르노 가를 위해서! 비앙카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뱅상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비앙카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 십여 년 전, 처음 비앙카가 아르노 가에 왔던 어렸던 시절에는 꿈 꿔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 비앙카의 행보를 보고는 고이 기대를 접었다.
그래. 그래서 무엇이 아르노 가를 위한 일이라는 걸까. 소비를 줄이는 것? 뱅상은 코웃음을 쳤다. 그만큼 비앙카에 대한 뱅상의 기대는 바닥에 바닥을 쳤다.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대꾸하는 대신, 머뭇거리는 뱅상을 다시 한번 불렀다. 그의 느릿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는 나직하게 공간을 울렸다.
“뱅상.”
“마님. 이리로.”
자카리의 충직한 심복, 뱅상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비앙카를 재촉했다.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아직일 뿐이다. 비앙카가 조금만 더 뻗대기라도 하면 남들 보기 흉한 꼴로 답싹 들려져 나갈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비앙카의 손아귀 아래 옷자락이 구겨졌다.
자카리는 후계자를 갖겠다는 그녀 말을 들은 척도 안했다. 그녀 나름 용기를 내어 그의 앞에 선 것인데, 이렇게 아무런 소용없이 허물어지니 허탈하고 얼굴이 홧홧했다. 비앙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더 화가 나는 건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하루 빨리 그의 아이를 임신해야만 했다. 이대로 물러선다고 끝이 아니다. 다시 그에게 접근하고, 또 이런 일을 반복하고, 또 내쫓기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비앙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높디높았던 자존심은 이미 페르낭에게 버려지고 수도원으로 내쫓기면서 모래처럼 흩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회귀하면서 자존심도 되살아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홧홧하지 않을 것이다. 심장 대신 불덩이가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옷을 추스르는 것조차 잊은 비앙카의 어깨를 타고 흰여우 모피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팔꿈치에 툭하니 걸리는 묵직함을 느끼고 나서야 비앙카는 자신이 흐트러진 꼴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앙카는 한숨과 함께 모피를 끌어 올리려 했지만, 자카리가 먼저였다.
어느새 그녀를 향해 뻗힌 자카리의 손끝이 비앙카의 팔에 간당간당하게 걸쳐진 흰 여우 모피를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여우 모피가 매미의 날개라도 되는 것 같았다. 비앙카의 어깨에 폭신하고 부드러운 털이 얹어졌다. 그녀의 어깨에 여우 모피를 둘러주는 동안, 그의 손의 온기는 조금도 비앙카에게 닿지 않았다. 자카리의 손은 금방 떨어져 나갔지만,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비앙카의 어깨에 얹어져 있는 듯 묵직했다.
비앙카는 갑자기 자카리가 자신에게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이런 친밀한 행동이라니, 무슨 뜻일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의 손짓 하나에 무슨 의미가 부여되어 있을지 머리를 싸매는 비앙카를 비웃듯, 자카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상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새 모피를 산 모양이로군.”
“…….”
“그대에게 잘 어울려.”
그의 얼굴은 비앙카와 처음 마주했을 때와 똑같았다. 고요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침착했다. 지금 있었던 대화는 그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니었던 듯이.
“오늘 마중 와주어 고마웠소.”
자카리는 그것으로 축객령을 대신했다. 일렁이던 감정의 편린 모두가 파도에 쓸려나간 듯, 자카리는 까만 눈동자로 비앙카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비앙카는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비앙카로서는 정부니 뭐니 이야기 하며 관계의 고삐를 제가 쥘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카리가 반응한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이나마 제가 쥐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단 한번도 그녀의 손에 쥐어져 본 적이 없던 것이다. 모두 자카리의 속셈이었다. 그녀가 착각하도록 유도해서, 그녀를 잔뜩 거들먹거리게 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당황한 듯 보인 것도 연기였을까? 비앙카의 얼굴이 망연히 무너졌다.
비앙카는 자카리에게 답인사를 하지 않은 채, 비척비척 방을 나섰다. 비앙카의 뒤를 따라 뱅상이 나오고, 자카리의 방문이 닫혔다.
끼이이익, 탕.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은 그들 사이의 단절과도 같이 단단했다.
* * *
비앙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기력이 모조리 빼앗긴 듯, 몸이 축축 늘어졌다. 오늘 하루 몸이 피로할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극과 극을 오가다 보니 온 몸에 진이 빠졌다. 비앙카는 바로 침대로 쓰러지고 싶은 욕망을 참아내며 창가로 향했다.
창밖으로는 어둠이 내려앉아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았다. 저 멀리 농노들의 집인 듯 반짝이는 불빛이 하나둘 흔들렸다. 비앙카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만약 낮이었다 해도 눈앞에 펼쳐진 전경이 익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성에서 내쫓겨 십오 년 동안이나 외지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에서 머물던 그전 십오 년 동안에도 성 밖의 전경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방 밖의 세상에는 흥미가 없었다. 과거의 그녀는 자신의 방에 콕 박힌 채, 어떻게 해야 자신의 방을 블랑쉐포르처럼 꾸밀 수 있을지에만 골몰했다.
이제 비앙카는 세상이 자신의 방 안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 먼 지평선 끝에서 자신이 앉은 곳을 희번득한 눈으로 갈구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한 것들이 모두 얽히고 설켜 제 목을 죌 수도 있다는 것을 이 한 몸으로 직접 겪어내지 않았던가.
저 어둠의 끝자락이 닿은 저 끝까지 세상은 흘러간다. 그에 비하면 오늘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앙카는 그렇게 스스로를 추슬렀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녀 부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엉망이었다. 애초에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결혼이었으니까. 과거의 비앙카가 자카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남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남작이었던 그의 신분이 비앙카의 집안보다 한참 격이 떨어진다거나, 전쟁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느라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거나. 혹은 열세 살의 나이 차라거나.
사실 귀족들의 결혼에서 그 정도 나이 차는 흔한 편이었다. 열여섯의 소녀가 예순이 다되어 가는 늙은이와 결혼한 적도 있고, 열여덟의 풋풋한 젊은이가 마흔다섯의 미망인과 결혼한 일도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열셋 정도야. 다만 그들의 문제는 자카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비앙카의 나이가 바로 일곱 살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들의 제일 큰 문제였다.
너무 어린 시절에 만나, 너무 오랜 세월을 흘려보냈다.
서로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음에도, 십 년의 세월은 어설프게나마 상대를 파악하게 만들었다. 단단히, 그리고 켜켜이 쌓아올려진 편견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대로 계속해서 꿰어온 단추. 이미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올리고 나서야 그 어긋남을 깨달았다. 아니. 하나하나 잠그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푸르고 다시 잠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뿐. 계속해서 미루고, 또 미루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뻔했음에도, 보지 않고자 눈을 질끈 감으며.
창틈을 타고 스며든 냉기에 비앙카는 으슬으슬한 팔을 문지르며 질렀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덮은 따듯한 모피를 추슬렀다. 원래도 유난히 추위를 타는 편이었지만, 수도원에서 병든 몸으로 얼어 죽고 난 뒤 깨어나 보니 조금의 추위에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비앙카는 목 끝까지 모피에 파묻은 채 창밖을 보았다. 유리창에 희뿌옇게 비앙카의 모습이 비쳤다. 새하얗고 예쁜 얼굴은 티 하나 없었고, 걸치고 있는 것은 모두 값비싼 것들뿐이었다. 그럼에도 거울 속에 비친 소녀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모피가 잘 어울린다고 했었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걸까? 비꼬는 거였을까? 그가 전쟁하는 동안 자신은 이런 사치나 하고 있었다고?’
픽, 자조의 웃음이 여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블랑쉐포르 가와의 협정의 대가라고 치기엔, 그녀에게 들어가는 유지비는 꽤 과했을 것이다. 흰여우 모피. 저 먼 타국에서 비싸게 수입해온 염료로 물들인 옷감. 보석과 금붙이. 목욕물에는 꼭 향유가 들어가야 하며, 하다못해 취미로 튕기는 악기마저도 비싼 것이었다.
치졸하게나마 변명을 하자면, 비앙카의 인생에 있어서 그런 것들은 당연한 것들이었다. 블랑쉐포르 가에서 항상 최고급으로만 두르고 있던 그녀의 안목에 아르노 가는 한참 부족했다. 비참하게 내쫓기고 나서야 비앙카는 그녀가 향유하던 것들이 얼마나 값비싼 것들인 지 깨닫게 되었다.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뱅상에게 요구하라는 자카리의 말을 떠올려보면, 자카리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을 펑펑 쓰면서 오래간만에 얼굴을 마주해도 반기기는커녕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아내. 그녀가 말을 거는 순간은 언제나 사치품에 관한 것들일 뿐. 자카리의 입장에서 비앙카는 증오스러운 족쇄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힐난하려 그런 말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내로서의 의무 운운하는 비앙카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런데 왜일까. 비앙카에게 여우 모피가 어울린다던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처음 듣는 누그러진 상냥함.
내가 착각한 걸까. 아니면 자카리가 대상을 착각한 걸까.
한때는 자카리가 돌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무뚝뚝했고, 항상 여유로웠으며, 비앙카가 무엇을 하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아무리 무뚝뚝한 사내라 해도 정부에게만큼은 달콤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앙카가 듣게 된 것은 그 파편일 뿐이다. 비앙카의 뜻밖의 행동에 당황한 자카리가 미처 추스르지 못한, 흔적에 가까운 상냥함. 비앙카의 가슴 한 켠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시큰거렸다.
아니야. 내가 그만큼 그를 당황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비앙카는 도리질 쳤다. 마음이 저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려 하고 있다. 비앙카에게 중요한 건 자카리가 정부에게 어떤 목소리로 속삭이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정부는 정부. 정부가 아이를 가져봐야 그 아이는 사생아일 뿐이다.
항상 비앙카가 무얼 하든 알 수 없는 태도만 취하던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이 무척 미약한데다, 정확한 속내가 어떤 것인지는 짐작도 못하겠지만. 지금껏 꽁꽁 숨겨왔던 것을 드러날 듯 말 듯한 수면 위까지 끌어올린 것에 의의가 있다.
과거와 같은 인생을 두 번 다시 보내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카리를 꽉 붙들고 살아야 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동아줄이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가 전사하기 전에 그의 자식을 낳자. 그렇게 되면 그들은 쉬이 비앙카를 내쫓을 수 없을 테니까. 열여섯 소녀가 하기엔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서른여덟의 나이로 수도원에서 비참하게 죽은 여자가 품기엔 충분한 독기였다.
* * *
자카리는 욕실로 들어갔다. 한참 데워진 물은 비앙카의 방문으로 미적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자카리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물었다.
“다시 데워올까요?”
“됐다. 상관없어.”
자카리는 단호하게 답하고는 가볍게 차려 입었던 옷을 훨훨 벗어던졌다. 단단하게 단련된 몸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죄여있었다.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만큼 자잘한 상처도 많았고, 꽤 큰 상처들도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대부분은 그가 젊고 혈기왕성했던 시절 입은 것들이었지만, 비앙카와 결혼한 뒤에 입은 상처들도 꽤 있었다. 물론 비앙카는 언제 그런 부상을 겪게 된 것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자카리는 성큼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뜨끈한 열기는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미약한 온기뿐이었지만, 자카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락했다. 등 뒤에서 화살이 언제 겨누어질지 신경 쓰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던가. 자카리는 참아온 숨을 길게 뱉어냈다. 몸에 쌓인 피로와 독소가 한 올 한 올 물속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