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 business RAW novel - Chapter 21
CHAPTER 21. 실패한 결혼장사
비앙카는 열에 시달렸다. 들끓는 고열에 땀을 뻘뻘 흘렸다. 밤새 고통스러움으로 몸을 뒤척였지만, 차라리 이 고통이 기꺼웠다. 몸이 괴로운 와중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으니, 적어도 마음만큼은 편안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뜨문뜨문, 정신이 들 때가 있었다. 비앙카가 완전히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이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방 안에는 그녀 혼자였다. 침대에 누워 있던 비앙카는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비앙카는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십여 년간 봐 온 그녀의 방 천장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비앙카의 방에 달빛이 들이쳤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흰 피부가 창백하게 물들었다.
이성이 수면으로 떠오르기가 무섭게 수도 없이 많은 감정의 파문이 해일처럼 비앙카에게 몰아닥쳤다. 비앙카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카리가 죽었다니…. 나는, 나는 성인이 아니던가.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그가 죽은 거지? 내가 더 뭘 했었어야만 했어?
비앙카는 자신이 지금껏 했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자신은 자코브의 마수에서 자카리를 구해내지 못했다. 성기사단도, 왕족과의 인연도 모두 부질없는 발버둥이었을 뿐이다.
허탈한 무기력함이 그녀를 잠식했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비앙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코브가 그녀의 안전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 말에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되레 그의 목을 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보았던 미래와 달리, 이제는 그녀를 아르노 영지에서 쫓아낼 명분이 없다. 집사인 뱅상도 그녀를 배신할 생각이 없고, 자카리의 유언장의 존재도 알고 있다.
아직 아버지와 조아생도 살아 있고, 왕녀인 오델리와도 친분이 있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터놓게 된 친구 카트린도 있으니, 설령 아르노가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예전처럼 수도원에서 뼈가 시린 추위 속에서 덜덜 떠는 비참한 인생을 보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앙카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놓쳐버린, 자카리와의 미래가 자꾸만 생각났다.
자카리와 그의 아이를 키우며 함께 살아가는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그린 미래에는 항상 자카리가 함께하고 있었다.
“하, 하하….”
비앙카는 웃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은 웃음이라기보다는 건조하게 바싹 메마른 울음에 가까웠다. 그녀의 웃음은 이내 꺽꺽이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뒤바뀌었다. 가슴이 죄는 고통. 비앙카는 금방이라도 소리 내어 오열하고 싶은 마음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이제 지쳤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 미래고 뭐고, 아무 의미도 없어….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비앙카의 가는 손가락이 이불을 그러쥐었다. 마치 의지를 다잡는 듯이.
여전히 전쟁은 진행 중이었고, 자카리가 죽었으니 자코브는 더더욱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길고 지루한 전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비앙카는 싸워야 했고, 이겨야 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자카리의 장례를 치러야만 했다.
영주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영주 부인의 의무였다. 그녀가 아니면, 자카리의 시체는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세브랑의 어디 한구석에 홀로 묻히게 될 것이다.
그의 용감했던 전적을 찬양하는 비석조차 없이, 외롭고 쓸쓸히….
그녀가 보았던 꿈속에서는 자카리가 죽고 어떻게 되었더라. 뱅상이나 세 부장 중 하나가 어떻게든 시신을 수습했을 것이다.
그제야 비앙카는 자신이 과거, 자카리의 시체가 묻혔던 곳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그녀는 그토록 잔인하고 무심한 여자였다.
이번 생 또한 그럴 수는 없어. 정말, 죽고 나서 자카리를 볼 염치가 없다.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잔뜩 버석해진 입술이 갈라지며 터진 피가 흰 이를 붉게 물들였다.
‘그대는 항상 내 아내였소, 비앙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상대는 그대뿐이었고, 내가 사랑한 상대도 그대뿐이지.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사랑을 모를 것이오.’
“저도 마찬가지예요, 자카리…. 나는 항상 당신의 아내였죠. 그건 앞으로도 다를 바 없어요.”
비앙카가 작게 미소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연록빛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죽어 있었지만,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형형하게 빛났다.
이번만큼은 부끄러운 이가 되지 않으리라. 떳떳하게, 그에게 당당하게….
그렇게, 그녀가 해내야만 하는 마지막 임무와 의무,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나면….
비앙카는 미소 지었다.
이번 생에는 제대로 결혼 장사를 해 보려고 했다.
지참금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게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어떻게든 지참금을 두둑이 챙겨 재혼하려고. 혹은 어엿한 아르노가의 후계자를 낳아 내 권리를 다 누리려고.
예전처럼 비참하고 서러운 마지막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기적으로, 사치스럽게 살려고….
하지만 그에게 이토록 빠져버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아득바득 노력해서 손에 쥔, 아직 손아귀에 남아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아아. 이번 생의 결혼 장사는 단단히 망했다.
비앙카는 자조했다. 금방이라도 훌훌 날아 자카리에게로 갈 것 같은, 아스라한 미소였다.
* * *
한밤중 다시 기절하듯 까무룩 잠이 든 비앙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다음 날 낮이었다. 귀를 찌르는 함성 속에서, 비앙카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비앙카가 일어나자,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본느가 화들짝 놀랐다.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마님…!”
“이본느.”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이 한참만인 모양이었다. 이본느는 숫제 울 기색이었다. 비앙카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본느는 눈치 빠르게 비앙카가 물을 원한다는 걸 깨닫고 그녀에게 대령했다.
물로 입술을 축인 비앙카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전쟁은…? 전쟁은 어떻게 되고 있니.”
“조아생 경과 가스파르 경이 잘 막아내고 있어요. 서신 속의 내용은 일단 함구령을 내렸고요.”
이본느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다시 잘 정돈해 덮어 주었다. 이불 위로 도닥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비앙카가 좀 더 쉬기를 설득했다.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계세요. 마님께서 건강하셔야지 저희도 사기가 치솟죠.”
하지만 영주의 죽음이라는 큰 화두가 언제까지 덮어질까? 자카리의 죽음이 밝혀지면 사기에 큰 영향이 있을 테고, 그것은 곧 패전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이렇게 누워 있을 여유가 없었던 비앙카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내가. 내가 나가 봐야겠다.”
“안 돼요!”
이본느가 황급히 저지했다. 온몸을 날려서라도 비앙카를 침대에 다시 눕히려는 그녀의 기세에 비앙카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반응이 과했다. 그녀가 밖에 나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도대체 방 밖이 무슨 꼴이기에?
비앙카는 픽 웃었다. 그저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기절한 건 처음이라 이본느가 많이 걱정한 것일 뿐이다. 과민 반응하는 건 제 쪽이리라.
비앙카는 자신 앞을 가로막은 이본느에게 손을 내저으며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괜찮다고는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렸다. 카펫 위에 위태롭게 선 비앙카는 하얀 속옷용 드레스만을 입은 채 이본느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장 옷을 입히라는 무언의 채근이 담긴 눈빛에, 이본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몇 번이고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마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목에 탁 걸려 말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순간 이본느의 눈빛이 바뀌었다. 단단히 각오한 표정. 이본느는 비앙카의 손을 이끌고, 그녀를 침대에 다시 앉혔다. 이본느의 기세가 자못 무시무시하였기에, 비앙카는 순순히 그에 따랐다.
이본느는 비앙카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조곤조곤 운을 떼었다.
“마님, 이제부터 제가 할 이야기에 너무 놀라면 안 돼요.”
“더 놀랄 일이 남아 있겠니?”
비앙카가 자조적으로 되물었다. 그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해도, 자카리의 죽음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으리라. 이미 그녀는 죽을 각오까지 한 몸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그녀에게선 허무함이 흘러넘쳤다.
이본느는 그런 비앙카를 빤히 응시했다. 순박하고 선량한 눈동자가 걱정과 우려로 그득했다.
다짐했음에도 쉽사리 꺼내기 쉬운 이야기가 아닌지, 이본느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비앙카는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렸다.
맞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본느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그녀의 떨림이 비앙카에게까지 전해졌다.
“마님께선…. 지금 홀몸이 아니세요.”
“뭐?”
“임신하셨어요. 마님의 배 속에, 아르노가의 희망이 잠들어 있어요. 마님께선, 어떻게든 버티셔야 해요, 아셨죠?”
처음엔 제법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끝이 되어선 울먹이는 울음기가 목소리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본느는 비앙카를 붙들고 오열했다.
이본느의 오열을 바라보는 비앙카의 머리가 멍했다. 그녀는 느릿하게 시선을 떨구어, 자신의 마릇한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 그의 아이가 있다고?
그녀의 손끝이 조심스레 배에 닿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납작하여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님께서 충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아기씨께서 백작님을 닮았는지 강하게 버텨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아셨죠, 마님? 마음 단단히 잡수셔야 해요. 마님만이 우리 희망이에요….”
이본느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헐떡이며 비앙카의 팔뚝을 강하게 잡았다. 윽박지르는 태도는 시녀의 본분에 맞지 않았지만, 그만큼 이본느가 필사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비앙카 또한 갑작스레 알게 된 임신 사실에 정신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비앙카의 낯은 여전히 넋이 빠져나간 듯 멍했다.
“뭐라도 좀 드셔야 해요. 어쩐지 최근 들어 식사를 힘겨워하시더라니…. 제가 그래도 마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좀 챙겨 올게요. 쉬고 계세요.”
이본느는 손등으로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는, 부산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앙카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할 새도 없이, 그녀는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비앙카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망연자실하여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무의식중에도 그녀의 손은 계속해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당신은 정말이지….”
비앙카가 쓰게 웃었다. 자카리가 출전하기 전, 마지막 밤에 생긴 아이가 분명했다.
그토록 그리던 후계자였다.
그런데 하필, 마음을 전부 정리하고 각오한 지금 그 존재를 알게 되다니…. 참 얄궂은 일이었다.
“제가 죽음을 결정 내리지조차 못하게 하네요.”
비앙카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러 보였다. 내리쬐는 햇볕이 어찌나 밝은지, 비앙카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만약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일찍 애가 생겼더라면 자카리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을 텐데…. 그토록 아이가 생기길 거부한 그였지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들었더라면 참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자카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한 비앙카의 눈가가 흐려졌다. 그녀의 해쓱한 뺨을 타고 뚝뚝, 멈췄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자카리가 죽음과 함께 앗아 간 눈물을 아이와 함께 돌려받은 듯이.
비앙카는 밀려드는 피로에 다시 눈을 감았다. 놓을 땐 그렇게도 가벼웠던 삶이, 다시 잡으려니 너무 무거웠다.
* * *
자카리의 부고를 전했는데도, 아르노 성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서신을 읽은 비앙카가 혼절했다는 전령의 보고에 자코브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려야 무슨 결정을 내려도 내릴 테니까.
하지만 시일은 길어졌고, 아르노 성에서는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초조해진 자코브 쪽에서 다시 전령을 보냈다. 이번에는 답이 돌아왔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자카리가 죽었다는 데도 여전히 저항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한 자코브는 버럭 분통을 터트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놈이 죽었다잖아. 이제 그녀를 보살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자코브는 신경질스레 방 안을 오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고, 이죽거리는 입꼬리는 잔뜩 비틀린 채였다. 잘생긴 외모가 무색할 정도로 귀기 어린 표정은 마치 악마 같았다.
“하, 블랑쉐포르가가 받아줄 거라 믿고 있는 건가…. 어차피 블랑쉐포르가에서도 아르노 백작의 죽음을 알면 그녀를 재혼시키려 할 텐데. 그럴 거면 차라리 나에게 오는 게 낫다 그리도 말했건만.”
그럼에도 자코브를 거부하는 것은, 그렇게도 자코브가 싫다는 뜻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솔직히, 자코브는 자카리만 죽으면 일이 바로 해결될 줄 알았다. 그랬던 만큼 배신감은 곱절이 되었다.
“그놈이나 나나 뭐가 달라! 출신도, 처지도, 상황도! 둘째 부인의 아들로 태어나, 능력도 없는 첫째한테 정당한 밥그릇을 빼앗기고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도록 내몰린 건 똑같잖아!”
버럭 외친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들썩이는 어깨가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악다문 이가 갈리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역시 자카리가 죽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어야 했나…. 하여간 위그 자작, 쓸모없는 놈…. 자카리의 목이라도 잘라 왔었어야지….”
자카리를 죽였다는 위그 자작의 보고에 반색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자코브는 태도를 바꿔 그를 비난했다. 이 모든 것이 위그 자작의 모자란 일 처리 때문 같았다.
“흥분하지 말자…. 그래. 어차피 자카리의 죽음은 얻어걸린 거니까. 애초 계획대로 하는 거야.”
자코브의 낯이 순식간에 정돈되었다. 자카리가 죽음으로써 지원군이 오는 시기가 늦춰진 것 정도로 만족했다.
물론 아직 성기사단이 남기는 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군대. 자카리가 죽었다면 다시 교황청으로 돌아가 교황의 명을 받고 움직여야 한다.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비앙카가 끈질기게 저항해 봤자, 자코브가 더 끈질기게 따라붙으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비앙카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자코브를 독려했다.
비앙카가 그토록 자코브를 싫어한다 해도 소용없다. 자코브는 강제로라도 제 곁에 앉힐 생각이었다. 비록 그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그녀의 몸뚱이뿐일지라도, 그것마저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나았다.
남들이 보기엔 결국 자코브의 여자가 아니겠는가? 자코브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비앙카가 실신한 이후, 뱅상은 전령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을 애써 참으며 그를 돌려보냈다. 자코브가 비앙카에게 치근덕거리는 발정 난 개처럼 군다 하여 그들 또한 명예를 잊어도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전령의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다시피 한 뒤, 뱅상과 가스파르, 조아생은 회의를 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병사와 영지민들에게 자카리의 죽음을 숨기자 결정했다. 그리고 비앙카가 전령을 만나던 당시 홀에 있던 이들의 입단속을 했다.
하지만 자카리의 부고는 그 정도로 잠재워질 내용이 아니었다. 이 엄청난 소문은 알음알음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 나갔다.
영지의 분위기가 파도치듯 술렁였다. 영주님의 죽음이 사실일까? 아니면 잘못 왜곡된 뜬 소문인 걸까? 자카리의 죽음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영지의 사기를 바닥으로 치닫게 했다.
더불어 영지의 최고 결정자이자 영주 대리인인 비앙카가 한동안 전쟁터에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영지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성벽을 지키고 있던 젊은 병사, 토마스가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장년의 병사 긱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정말로 백작님이 전사하신 걸까요?”
“글쎄….”
“마님은 성인이시잖아요. 성인의 가호가 있는데, 어떻게 백작님이….”
긱이 침중한 낯으로 말을 아꼈지만, 토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납득 가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던 그는 잠시 골몰하다 넌지시 운을 떼었다.
“설마, 마님이 성인이 아닌 건….”
“그런 말은 쉽게 입에 담는 게 아니야, 토마스.”
“마님께서도 두문불출하시고…. 긱 아저씨는 이 상황이 답답하지도 않아요?”
긱이라고 해서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토마스를 힐난하기는 했지만, 긱의 얼굴 또한 착잡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토마스는 긱의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안한 속내를 줄줄이 털어놓았다.
“마님께서 전쟁을 포기하신 게 아닐까요? 백작님이 그렇게 되셨다는데, 버틸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마님께서 저 왕자인지 무뢰배인지 하는 놈하고 재혼이라도 하고자 한다는 말이야?”
“그게 아니라…. 아니, 솔직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어차피 우리가 목숨 내걸고 싸워 봤자….”
토마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태연한 척 주절주절 말했지만 속내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하얗게 질린 입술이 달달 떨렸다.
토마스는 아직 죽기엔 너무 이른, 창창한 나이의 젊은이였다. 사십 줄 먹은 긱 또한 토마스의 두려움이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자카리가 죽었다면 전쟁을 계속하든, 계속하지 않든 이 영지는 더 이상 아르노의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아르노 땅은 적법한 후계에게 넘어간다. 자카리는 왕에게 직접 작위와 영토를 받은 귀족이었고, 그에게는 후계자나 영지를 물려받을 친척이 없었다. 아르노가 되기 전에 위그였으니, 위그 자작이 이 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물며 전쟁에서 지기라도 하면 그들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새로운 영주에게 막중한 세금을 내게 된다.
비앙카가 성인이라 할지라도, 후계자를 낳지 못한 그녀는 아르노를 계승하지 못하고 결국 친정으로 돌아갈 뿐이다. 아니면 자코브가 바라던 대로 재혼하든가. 어느 쪽이든 그녀가 아르노의 영지민들을 신경 써 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해도 그들의 주인이 바뀐다. 그렇다면 굳이 아르노를 위해 목숨 걸 이유가 없었다. 냉정하거나 이기적인 생각이라 하여도, 제 목숨과 가족의 목숨을 두고 그 누가 이기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웠는데, 이러다가 전부 물거품이 될 거라 생각하니 심란한 것도 당연했다.
토마스보다 두 살 어린 샘이라는 병사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넌지시 운을 뗐다.
“마님은 그저 백작님의 전사 소식에 충격받아 쓰러지신 뒤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게 아닐까요? 애초에 건강하신 분은 아니니까요. 전쟁 내내 성벽과 마을을 오가며 손을 보태신 것도 이미 충분히 무리하신 일일 텐데….”
토마스와 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와 함께 전쟁을 견뎌 내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던 찰나였다. 아르노의 어린 마님이 안타까워진 그들은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이러다 줄초상이라도 치르면….”
“어허! 괜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긱은 다급히 샘의 입을 막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전쟁에서는 재수 없는 추측조차 삼가야 했다.
현재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흔들리는 건 비단 긱과 샘, 토마스 사이에서의 일이 아니었다.
아르노 성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니, 성벽에서 적군을 막아내는 데 구멍이 많이 생겼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약점이 적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자코브는 희희낙락하며 그 약점을 공격했고, 가스파르와 조아생은 그를 막기 위해 힘들게 허덕였다.
그렇게 패배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던 어느 날, 두문불출하던 비앙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앙카는 두꺼운 모피를 껴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바싹 마르고 가는 몸이 두드러졌다. 모피라도 걸치지 않으면 그대로 겨울바람에 쓸려 날아갈 것만 같았다.
평소에도 건강해 보이는 편은 아니었다지만, 비틀거리는 그녀의 안색은 유난히도 해쓱하고 퀭했다. 병사들은 추측한 그대로인 그녀의 모습에 안타까이 신음을 흘렸다.
비앙카는 옆에 있는 이본느에게 몸을 의지한 채 발을 내디뎠다. 이본느는 전전긍긍하며 비앙카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신경 썼다.
비록 병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낯에서는 어딘지 모를 각오와 위엄이 느껴졌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함. 귀족으로서의 자존심과 고집이 맞물린 눈빛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
성벽에 오른 비앙카가 영지민들에게 외쳤다.
“병사들이여, 그리고 아르노의 영지민들이여!”
얼마나 앓았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벽을 긁는 듯 쉬어 있었다.
잔뜩 앓은 비앙카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비앙카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소란이 단번에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비앙카의 움푹 팬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형형했다. 비앙카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불안해하는 심정은 잘 알고 있다. 영주 대리로서 확실히 말하건대, 아르노 영지는 투항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웠다.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던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숙덕거렸다. 비앙카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쯤이야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비앙카는 자신의 임신을 깨달은 뒤, 정신을 다잡기가 무섭게 자신과 영지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했다.
자카리의 죽음을 알려 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코브다.
그의 말을 마냥 믿기엔, 그에게 신뢰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자카리가 죽었다는 증거조차 없지 않던가.
물론 자코브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자카리의 죽음을 확인하려면 변경으로 사람을 보내야 했고, 그사이에 아르노 영지를 혼란스럽게 하여 사기를 꺾을 뿐만 아니라 혹여 비앙카가 그에 휘둘려 항복하기를 기대하는 속셈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인즉슨, 변경에 확인하여 답을 듣기까지 그들이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전선에 전령을 보내 두었다. 그쪽에 아르노 영지의 침략 사실을 밝혔으니, 좀만 버티면 무언가 답이 올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카리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기대한 만큼 훗날 더 마음이 아파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정이 있어 변경에 나가 있는 용감한 아르노의 군대가 돌아오기까지 시일이 걸리게 되었으나, 우리에겐 성기사단이 있고, 내 친정인 블랑쉐포르가가 있다. 그들이 지원해 준다면, 이 전쟁에도 승산은 있다. 내 염치없이도 고하건대, 아르노를 위해 조금만 더 힘을 내달라!”
비앙카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외쳤다. 얼마나 있는 힘껏 외쳤는지, 그녀의 가는 몸이 휘청 흔들렸다.
비앙카는 영지민들을 설득해서, 전쟁을 계속하게 해야 했다. 적어도, 전령이 소식을 들고 올 때까지.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에, 그녀가 내밀 수 있는 모든 패를 끄집어냈다.
귀스타브가 현재 알베르 왕세손을 돌보고 있다지만, 지금은 그 손이라도 빌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만약 패배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자코브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그녀 홑몸이라면 자진이라도 하겠지만 그녀에게는 자카리의 아이가 있다. 자코브가 과연 자카리의 아이를 가만둘 것인가? 유산시키려고 들 게 분명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다들 비앙카가 의도적으로 자카리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주저하던 이들 중 하나가, 용기 있게 외쳤다.
“백작님이…. 백작님이 전사하셨다는 소문은 어떻게 된 겁니까, 마님?”
“확실치 않다.”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소문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병사들과 영지민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져 갔다.
비앙카는 긍정하지 않았지만, 자카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이 사실이라는 걸 영지민들은 깨달았다. 설마 했던 이들도 그제야 자카리의 죽음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모두가 공황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소란은 폭동이 될 것처럼 거세어졌다. 이본느가 불안하게 비앙카를 응시했다. 비앙카가 영지민들에게 사실을 밝히겠다 나섰을 때 걱정과 우려 섞인 반대를 건넨 뱅상의 낯도 딱딱하게 굳었다.
영지민 하나하나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앙카의 눈에 쏙쏙 박혔다. 혼란한 군중의 외침 속에서도 비앙카는 흔들림 없었다.
그녀는 척추를 바로 세우고 턱 끝을 치켜든 채, 몰아치는 태풍의 앞에 우뚝 선 바위처럼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의연히 말했다.
“나는 아직 아르노 백작의 시신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목이라도 가져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백작의 아내요, 영주의 대리자로서 나의 결정이다!”
그것이 바로 비앙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를 잃는 고통을 두 번 겪게 된다 하더라도, 현실에 무력하게 굴복하지만은 않으리라 다짐했다.
늑대는 잔뜩 굶어 비쩍 마른다 해도 사람이 건네주는 고기를 집어 먹지 않는다. 경계심 가득한, 야생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들을 버티고 서게 만든다.
사람들은 지금껏 비앙카가 여우라고 생각했다. 연약하고 예민한 성정으로 자카리를 들었다 놨다 한다고. 그녀가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자카리를 구슬려 얻어 낸다고….
그것은 그녀가 백작 부인의 의무를 짊어지고, 성녀임이 밝혀진 뒤에도 마찬가지인 평가였다.
하지만 그녀는 늑대의 아내였다.
늑대의 아내 역시 늑대인 법. 아르노를 지키기 위해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늑대가 된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몸을 웅크린 늑대였던 건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비앙카는 서슬 퍼런 기세로 말을 이었다.
“백작님의 생사가 불분명하다지만, 우리에게는 차기 아르노 백작이 있다.”
차기 아르노 백작!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새 생명의 존재에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암운이 드리운 와중 한 가닥 희망이 내려왔다.
비앙카는 영지민들의 추가 기울었다는 걸 눈치챘다. 모피를 잡은 가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쐐기를 박아야 했다. 비앙카는 숨을 들이켰다. 겨울바람의 건조한 냄새가 그녀의 코에 맴돌았다.
비앙카는 난간을 짚고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필사적임을, 영지의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폐부 깊은 곳의 힘까지 끌어낸 그녀는 있는 힘껏 외쳤다.
“그러니 그대들은, 아르노를 위해 검을 들어라! 활을 들어라! 돌이라도 좋다! 손에 힘이 남아 있는 한, 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들어 저들을 무찌르라!”
“와아아아아아!!!”
비앙카의 처절함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불을 붙였다. 비앙카의 의지에 화답하듯, 사람들은 모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외침이 얼마나 쩌렁쩌렁했는지, 피부가 떨릴 정도였다.
비앙카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영지민들도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이 자카리의 죽음으로 흔들린 건, 패배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인이 사라진 이상, 그들이 아무리 싸워 봐야 이 전쟁의 명분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 그들에게는 구심점이, 상징이 필요했다….
그리고 비앙카가 그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차기 아르노를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위하여.
아르노 영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 * *
그렇게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비축된 식량을 셈해 본 뱅상은 아직 석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며 긍정적인 소식을 전했다.
영지민들 또한 의욕이 넘쳤다.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오히려 속이 타는 것은 자코브 쪽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르노 영지에서 항복 의사를 보이지 않으니 속이 탔다.
머리가 혼란해하면 손발 또한 우왕좌왕하는 법이다. 자코브군은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아 실수를 거듭했다.
그렇다 하여 아르노가 이기는 쪽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팽팽히 당겨진 실, 혹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저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여기에 작은 추 하나만 올라가도 금방 균형이 깨지리라.
자코브군과 아르노군은 모두 자신이 추를 얹기 위해 노력했다. 서로 지원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이들이란 이들에겐 모조리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다들 변방의 전쟁에 지원을 나가 있어 좀처럼 긍정적 회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과연 누구의 지원군이 먼저 도착할 것인가.
그렇게 하루하루 버틴다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전황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와중, 저 먼 평야 너머 지평선부터 우르르 먼지구름이 일었다. 마치 군사가 몰려오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탄 군사들이 아르노 영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망대 위에서 상황을 살피던 파수꾼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
“원군! 원군입니다!”
“누구의?”
파수꾼의 보고를 들은 비앙카가 다급히 되물었다. 하지만 파수꾼에게선 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거리가 꽤 되는 만큼,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파악하기엔 거리가 멉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원군의 세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수꾼은 집중하여 지평선 너머를 노려보았다. 모든 이들이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잠깐의 찰나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블랑쉐포르가? 자코브의 가신? 아니면 성기사단?
과연 비앙카와 자코브, 어느 쪽의 원군일 것인가?
긴장한 병사들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원군의 세력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만큼, 그들이 초조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잠시 뒤, 파수꾼이 탄식했다. 원군 가문의 문장을 알아본 그는 바로 소리 높여 외쳤다.
“검은 늑대!!”
검은 늑대는 아르노가의 상징이다. 파수꾼의 외침을 들은 모두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비앙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르노가의 깃발입니다!!”
자코브의 원군이 아니니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비앙카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자카리의 생존 여부를 맞닥트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카리가 살아 있는 건 아닐까…. 아니야, 기대하지 마. 그저 로베르와 소뵈르가 귀환하는 걸 수도 있어….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한번 싹이 튼 기대는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은 비앙카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뱅상 또한 다급히 파수꾼을 재촉했다.
“선두에서 군을 이끄는 것은 누구인가?”
“…늑대.”
“늑대?”
파수꾼은 이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몇 번이고 눈을 비비며 원군을 보았다. 정말 내가 본 것이 사실인가?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참을 입을 달싹이던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한 확신을 얻기가 무섭게 황급히 외쳤다.
“늑대가 조각된 투구입니다. 백작님의 투구예요!!”
파수꾼의 환희에 찬 외침이 아르노 성을 쩌렁쩌렁 울렸다. 파수꾼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씰룩이며 올라갔다.
비앙카는 멍하니 파수꾼을 올려다보았다. 믿지 못하는 표정. 아니, 차마 믿을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파수꾼 또한 그런 비앙카의 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성안에서, 그가 본 것에 가장 가슴 졸일 이는 응당 비앙카일 테니까. 파수꾼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확신을 담아, 비앙카에게 전했다.
“백작님이, 백작님이 계세요!”
* * *
변경으로 찾아온 위그 자작이 던지고 간 레이스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칼리아 숲으로 가기 전. 막사에서는 함정임이 뻔한 곳에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탁상공론이 한참이었다.
상황은 의심스러웠지만 자카리는 고집스러웠다.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꺾지 않는 고집이니, 설득할 수 없다시피 했다.
하다못해 비앙카가 관련 없다는 것만 알아도 함정에 방비하기 위한 계획을 좀 더 유동적으로 짤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생각의 폭이 좁았다.
그때 대뜸 나선 이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뵈르였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지, 소뵈르?”
“그 레이스…. 제가 잠시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살펴봐서 무얼 알 수 있단 말인가. 소뵈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소뵈르가 이렇게 나선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기 마련. 자카리는 흔쾌히 소뵈르에게 레이스 손수건을 넘겼다.
소뵈르는 미간을 찌푸린 채 레이스의 무늬를 살폈다. 그렇게 한참 레이스를 조사하던 소뵈르의 안색이 환하게 뒤바뀌었다.
“이건…. 마님이 쓰시는 물건이 아닙니다. 마님이 선물용으로 만드신 거예요. 가장자리 무늬가 달라요.”
소뵈르의 확답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걸 소뵈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아해했다.
평민 출신인 소뵈르는 사치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소뵈르가 레이스의 가장자리 무늬 따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당황한 로베르가 어이없어 하며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래 봬도 마님께서 레이스를 만들기 시작하셨을 때 곁에서 종종 지켜본 적이 있다고. 가스파르도 알고 있을걸? 가끔 지나가듯 말씀하시곤 했으니까. 이렇게 될 줄 알고 알려주신 건 아닐 테지만….”
소뵈르는 으스대며 대꾸했다. 거들먹거리며 말하긴 했지만, 실상은 간식을 얻어먹으러 간 김에 겸사겸사 보게 된 것일 뿐이었다.
물론 소뵈르라 하여 레이스의 무늬를 자세히 구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가 봤던 종류의 무늬였기에 파악이 빨랐을 뿐.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다.
자카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레이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게 선물용 물건이라고?”
“네. 마님께서는 직접 쓰실 물건과 선물용, 그리고 하녀에게 알려준 레이스 문양을 다 구분해서 만드셨어요.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마님께서 직접 만든 레이스는 무척 소수였고요. 그중에서도 마님이 직접 사용하시는 레이스는 아주 복잡하고도 정교한 무늬예요. 이건 절대 마님의 것이 아니에요.”
소뵈르가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비앙카는 물건에 차등을 두었다. 그녀는 그저 판매를 위해 상등품과 보급품의 차이를 두려 했을 뿐이었겠지만, 덕분에 구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카리도 다시 한 번 침착하게 레이스를 잘 살펴보았다. 비앙카가 마상 시합 때 그의 팔에 묶어 주었던 레이스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 손수건은 지금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늘하늘하고 화려했다.
이것 또한 화려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비앙카가 평소 사용하던 것보다는 단순한 편이었다.
“과연….”
자카리가 소뵈르의 말에 수긍하자, 주변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다 같은 손수건인 줄로만 알았는데, 비앙카가 나름의 체계와 법칙을 갖고 있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특히 깜짝 놀란 것은 마르소였다. 마르소는 비앙카가 제법 고심해서 레이스 사업을 불리려고 한 것을 눈치챘다.
비앙카의 작품은 일종의 비매품이었다. 친분에 의해서만 넘기는…. 사람들은 일반 보급품 레이스를 구하기 위해 아등바등하지만, 보급품 레이스를 구한 이들은 비앙카가 만든 레이스를 구하려 아등바등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상등 레이스를 구하는 방법은 비앙카에게 잘 보이는 것뿐이다.
비단 여인들 사이의 일이 아니다. 아내를, 혹은 정부에게 잘 보이고자 레이스를 선물하려 하는 사내들 또한 자카리의 눈치를 볼 것이다.
지금도 아르노가의 영향력은 대단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카리의 위명으로 인한 두려움에 의한 것. 비앙카의 레이스는 그 영향력을 좀 더 부드러운 쪽으로 바꿔 줄 것이다.
‘역시 카트린에게 비앙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 제안한 건 옳은 선택이었군.’
연회장에서 볼네 자작을 상대하던 모습만 해도 만만치 않다고는 생각했는데…. 마르소는 혀를 내둘렀다.
비앙카가 이 일과 얽히지 않은 것이 정황상 확실해지자, 자카리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이 손수건의 주인은 누구지?”
“제가 알기로는 마님께서 선물로 레이스 손수건을 보낸 건 오델리 왕녀와 왕비님, 1왕자비님 등 왕족뿐입니다. 아, 라호즈의 대주교도 있습니다.”
대답한 것은 로베르였다. 가스파르가 전담으로 호위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비앙카의 안전에 관해 신경 쓰는 것은 세 부장 모두의 일이었다. 혹시 언제 무슨 일로 호위가 바뀔지 모르는 만큼, 가스파르에게 비앙카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어느 정도 들은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비앙카나 레이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앙리가 뒤늦게 나섰다.
“성인께서 라호즈의 대주교에게 전하신 레이스 손수건이라면, 이미 교황청에 가 있습니다. 성물로 바쳐졌거든요.”
“그렇다면 왕족의 손수건을 빼돌린 것이겠군요.”
로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진실의 윤곽이 드러나자, 내심 성인의 안전에 대해 가슴 졸이고 있던 앙리의 안색이 확연히 폈다. 앙리는 짐짓 엄하게 주장했다.
“성인께서 이 일과 상관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위험한 곳에 굳이 백작님께서 발걸음 하실 필요도 없지요. 당장 위그 자작을 군기를 어지럽힌 죄로 처벌합시다.”
“잠깐.”
그때, 마르소가 끼어들었다.
“왕족의 손수건을 빼돌리는 것 정도는 하녀를 매수하면 되는 일입니다만…. 이런 일을 위그 자작 혼자 꾸몄을까요?”
모두가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이 아는 위그 자작은 욕심과 자존심만 그득한 무능력한 자다. 다들 입을 모아 위그 자작의 흉을 보았다.
“…위그 자작은 그럴 만한 인물이 안 되지요.”
“게다가 겁도 많은 작자입니다. 이렇게 직접 나선 것은 확실히 이상합니다.”
마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손수건을 이용해서 아르노 백작을 끌어들여 함정에 빠트린다…. 계획 자체는 어린아이도 생각할 만큼 단순한 일입니다만, 이 계획이 저희의 골머리를 썩이게 한 데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지요.”
“무엇입니까?”
“아르노 백작이 절대로 움직인다는 확신이요. 하지만 과연, 위그 자작이 거기까지 생각했을까요?”
위그 자작과 자카리의 사이는 모두가 알다시피 좋지 않았다. 그런 위그 자작의 제안은 모두 의심을 사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계획은 전적으로 자카리가, 함정임을 알면서도 발을 떼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그를 위해 비앙카의 안전을 이용하는 것.
하지만 위그 자작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자다. 그런 그가 부인의 안전이 걱정되어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심정을 과연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 그릇만큼 볼 수 있는 법이다. 이 계획은 위그 자작이 세운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위그 자작을 허수아비로 세운 것일 뿐….
마르소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툭 던지는 듯한 말이었지만, 파문은 컸다.
“위그 자작은 2왕자 파죠.”
“혹시 위그 자작이 2왕자의 사주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아라곤과의 전쟁 중 아닙니까. 지금 변경을 맡은 아르노 경을 쳤다가, 아라곤이 세브랑 변경을 집어삼키게 되면 어떻게 하려구요?”
앙리가 의아해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자코브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르소는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하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지 않겠습니까? 안개에 가려진 진짜 적의 존재는 드러낼 수 있으면 드러내는 것이 좋지요.”
“어떻게?”
“그냥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요.”
간단하다는 듯 툭 던지는 마르소의 말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로베르는 조심스레 우려를 표했다.
“매복이 있을 텐데요.”
“매복이 있다는 걸 저희가 알고 있지요. 그러면 충분히 대비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흠….”
마르소는 자카리에게 물었다. 지금껏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카리는 나직이 신음을 흘리며 탁자를 두드렸다.
자카리가 자신의 제안을 그리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마르소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아르노 백작이 저들의 함정에 빠져 전사한 척 일을 꾀는 것입니다.”
“내가 전사했다?”
“예. 백작이 죽은 줄 알면 위그 자작이 분명 누군가에게 달려갈 테니, 그 뒤를 쫓으면 좀 더 분명해지겠지요. 더불어 방심하기도 할 테니, 적의 뒤를 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르소의 제안에 자카리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마르소의 추측은 정확했다. 자카리 또한 위그 자작의 뒤에 자코브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비앙카도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자코브라고 했으니까. 더불어 암살을 조심하라는 말도.
만약 자코브가 위그 자작을 이용해 자카리를 함정에 빠지게 시켰다는 것이 발각되면, 그를 제거하지는 못해도 발에 족쇄를 채울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수도에서 내쫓을 수는 있겠지.
그리고 수도에서 떨어지면 남의 눈이 드물어지는 만큼, 그를 처리하기도 쉬울 것이다. 자카리는 암살과 같은 일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상대가 자코브라면 기꺼이 손을 더럽힐 용의가 있었다.
자코브를 적대하는 것은, 비단 자코브가 전생에서 그를 죽였다는 비앙카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자카리는 자코브가 비앙카에게 어찌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팔뚝에 남아 있던 푸르른 멍 자국….
‘죽여버려요. 적군의 암살로 가장해도 좋으니까.’
비앙카가 몇 번이고 했던 말. 그녀가 부탁한 일을 들어줄 기회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다면 응당 손을 뻗어야 하는 법. 자카리는 그보다 더 홀가분할 수 없다는 태도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적군이 어디쯤 매복을 세워 두었을지 파악해 봐야겠지. 로베르, 당장 칼리아 숲의 지도를 가져와라.”
* * *
그 뒤로는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칼리아 숲의 중심 깊은 곳에 자카리를 선두로 한 선봉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매복하고 있던 적군이 그들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길이 깊고 좁아 선봉이 홀로 고립되었고, 적은 그 주변을 빙 둘러쌌다.
위그 자작은 틈을 봐서 빠져나갔다. 자카리 쪽에서 일부러 놓아준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약삭빠름에 자화자찬하며 안전한 곳으로 숨었다.
막다른 곳에 몰아 넣어진 아르노군을 향해 화살 비가 내리쳤다. 이럴 줄 알고 화살을 막을 방패를 다들 들고 왔다. 그들은 머리 위로 치켜든 방패 밑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뜻밖의 기습으로 혼비백산한다고 적군이 믿게 하도록, 그들은 의도적으로 전열을 뒤섞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를 보던 와중, 자카리는 중간에 활에 맞은 것처럼 의도적으로 낙마했다.
“백작님!”
“아르노 백작!!”
자카리의 측근을 비롯한 주변 이들이 전부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를 끌어안자, 오히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것은 바로 위그 자작이었다.
“백작님은 괜찮으신가?”
“숨을, 숨을 쉬지 않으십니다!”
“말도 안 돼!”
멀리 있는 그에게도 들려오는 요란스러운 비보에 위그 자작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는 ‘그’ 자카리가 이렇게 쉽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로 제 손으로, 자카리를 죽였단 말인가?
전투의 혼란스러움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방해했다. 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자카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카리의 주변에 군사들이 모여들었다. 그 사이로 일순, 피에 젖은 자카리의 모습이 보였다.
아!
자카리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곧 죽을 것이 명백해 보였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위그 자작을 감쌌다. 이성보다도 그를 뒤흔드는 성취감. 그가 위그 자작 위를 잇고 자카리를 내쫓았을 때 이은, 인생에 있어 자카리를 이긴 두 번째 순간이었다.
상황에 취한 위그 자작의 입꼬리가 비실비실 올라갔다. 그의 머릿속에 백작 위에 오른 자신의 그럴듯한 모습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위그 자작은 자카리의 시체를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카리의 시체를 둘러싼 군사의 벽을 쉽사리 뚫을 수가 없었다. 이 기회에 저들을 완전히 밟아 없애고 싶었던 위그 자작은 총공격을 내렸다.
하지만 아르노군이 괜히 백전의 군사들이 아니었다. 자카리의 죽음이 그들의 사기를 꺾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있는 힘껏 저항하며 위그 자작의 군에 맞섰다.
아르노군을 쉽사리 제압할 수 없을 것 같자, 위그 자작의 얼굴이 못마땅함에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2왕자에게 달려가 백작 위를 받는 제 모습이 코앞에 어른거렸는데, 저들의 저항으로 지지부진 길어지자 속이 탔다.
위그 자작은 욕심이 많은 것에 비해 인내심이 짧았다. 어차피 자카리가 죽었으니, 굳이 여기서 군사나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다. 그렇게 판단한 위그 자작은 군사들을 선동했다.
“이만 퇴각하자! 자카리가 죽었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그리고는 냉큼 말을 몰아 자코브가 있을 아르노 영지로 달려갔다.
위그 자작의 머릿속 한편에는 정말로 자카리가 죽었을까 하는 의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위그 자작은 피로 물든 자카리의 가슴과 정신을 놓은 듯 희게 질렸던 자카리의 얼굴만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했다.
‘그래…. 그 상황에서 살아 있을 리 없어. 활에 맞은 데다 낙마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와중, 그는 아르노군의 후방이 소란스러운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끊어 놓은 후방을 아라곤이 급습한 모양이었다.
무척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아라곤이 자코브의 사주를 받았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는 하늘이 저를 돕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혼란한 군을 급습하였으니, 자카리가 생존할 확률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설령 자카리가 죽지 않았더라면…. 자코브의 반응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자카리는 죽어야만 했다. 죽었을 것이다…. 위그 자작은 끔찍한 가정에서 회피한 채 애써 행복한 상상을 했다. 그런 그를 비웃듯, 뺨을 스치고 가는 바람이 유난히도 칼처럼 시렸다.
머리가 복잡했던 탓일까. 위그 자작은 누군가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위그 자작이 매복지를 뜨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그에게 붙인 밀정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위그 자작이 자카리의 생사를 확실히 확인하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대로였다. 단지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라곤이 그들의 후방을 노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미리 방비하고 있었기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무언가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적군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자카리는 한참을 죽은 척했다.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한 작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감시를 붙여 두고 갔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계속해서 죽은 척하며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자카리는 철두철미하게 보안이 이루어지는 곳에 머물며 회의에 참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의 후방을 치다가 되레 당한 통에, 아라곤의 기세가 많이 죽은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위그 자작에게 붙인 밀정이 돌아왔다. 얼마나 급하게 말을 몰았는지,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밀정은 다급히 자신이 본 것을 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위그 자작이 달려간 곳이 바로 아르노 영지였습니다!”
“뭐? 아르노 영지엔 도대체 왜?”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백작님. 아르노 영지에서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
막사 안, 모든 이들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자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릅뜬 눈이 그가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자카리는 다급하게 밀정을 다그쳤다.
“누가…. 누가 영지를 침략한 것이냐?”
“그게….”
밀정은 머뭇거렸다. 그 또한 자신이 보고 온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2왕자입니다. 위그 자작 또한 2왕자에게 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황이 급박해 보였습니다, 백작님.”
자코브가 도대체 왜, 아르노 영지를 침략했단 말인가? 위그 자작까지 시켜서 자카리의 발목을 잡아 두고는…. 이게 마냥 우연은 아닐 것이다.
혹시 몰라 가스파르를 두고 오기는 했지만, 영지에 남은 군사 수는 오백여 명이다. 수성이 유리한 입장이라고는 하나, 자코브가 얼마만큼 되는 군사를 이끌고 왔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자카리가 처음으로 출전했을 때가 열여섯의 나이였다. 지금의 비앙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때 자신은 어떠했던가? 두려움을 견디려 이를 악물지 않았던가.
비앙카는 얼마나 두려울까. 성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을 비앙카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전쟁 같은 것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영지전이라니. 이 모든 것이 그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자책과 걱정이 뒤섞여 자카리를 잠식했다.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왔다. 자카리의 커다란 몸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가까스로 팔을 뻗어서야 탁자에 몸을 지지할 수 있었다.
“빨리.”
자카리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단어를 내뱉었다. 혹시, 하는 불안에 가슴이 탁 틀어 막혔다. 누군가가 그의 목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그런 자카리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들짝 놀란 로베르와 소뵈르가 자카리를 부축했다. 자카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허덕이며 말을 이었다.
“빨리 가자. 가서….”
“얼른 군을 꾸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로베르가 바로 움직였다. 소뵈르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급박한 상황을 깨닫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소가 상황을 정리했다.
“아라곤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으니, 저와 앙리 경은 변경에 남아 그들과 대치하겠습니다. 백작은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아르노로 돌아가서 영지전을 마무리 지으십시오.”
“다보빌 백작과 앙리 경만 믿겠소.”
아르노군만으로도 충분히 영지전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군사들을 더 많이 데려가면 가는 시일만 늦어질 뿐이었다.
출정 준비를 하는 군사들의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그들 또한 영지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다. 자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지가 침략당했다니,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한시바삐 영지로 돌아갈 군을 꾸리고 있던 와중, 때마침 비앙카가 보낸 전령 또한 자카리의 군이 자리 잡은 변경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엇갈릴 뻔했을 정도로 절묘한 시기였다.
“백작님!”
“아르노 영지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안 그래도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준비하고 있던 찰나였다. 비앙카는? 비앙카는 괜찮나?”
“마님께서는 영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얼른, 얼른 가셔야 합니다…! 2왕자가 노리는 것은 바로 마님이세요!”
“비앙카?”
짐작도 못 한 전령의 발언에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비앙카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 사소한 예의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그는 혼이 나가 있었다.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비앙카가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건 짐작했다. 하지만 자코브가 비앙카를 노린다니? 자카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비앙카를 왜?”
“마님이 성인이시니까요! 그는 마님의 신변을 원하고 있어요. 백작님이 죽었다는 말로 마님을 협박하시고…. 얼른 영지로 가셔야 합니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전령이 자카리를 재촉했다. 일개 전령이 백작인 자카리에게 소리를 높일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위그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과 결부하니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자카리를 죽이고 미망인이 된 그녀를 맞아 결혼하고, 성인인 그녀의 신분을 이용하여 교황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를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자카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가 변경에 와 있는 사이, 비앙카에게 드리운 마수의 존재가 더할 나위 없이 그를 위협했다.
그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이 된 자카리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만약 2왕자가 위그 자작을 통해 내 죽음을 알게 되었다면….”
“아마 그 사실로 아르노 영지를 혼란스럽게 하겠지요. 항복을 받아 내려 할 것입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아르노 백작.”
마르소가 다급히 자카리를 재촉했다. 수성은 어지간해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수성하는 쪽의 의지만 있다면. 그 이야기인즉슨, 의지가 사라지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카리의 죽음에 대해 알기 전, 영지를 떠난 전령은 지금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2왕자가 나의 죽음으로 비앙카를 협박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확신합니다. 그러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마르소가 자카리를 또렷이 응시했다. 그의 매끈한 낯은 평소와 같이 흔들림 한 점 없었지만, 침중한 그의 눈빛에서는 그가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그의 죽음이 비앙카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자카리는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그저, 위그 자작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캐내기 위한 함정을 팔 생각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비앙카의 귀까지 흘러 들어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비앙카가 그의 죽음을 알고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차라리 무덤덤했으면. 아니, 그건 싫다. 하지만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싫다. 제발 그녀가 몰랐으면…. 안 그래도 힘겨울 그녀에게 이런 마음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다….
수많은 생각이 자카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비앙카의 일에 한해서만큼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자카리는 바로 아르노 영지로 향했다. 바로 출전할 수 있을 정도로 군이 준비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앞만을 노려보며 말을 모는 그의 까만 눈동자가 분노와 절망, 그리고 한 가닥 남은 희망으로 시시각각 변해 갔다.
제발. 제발, 비앙카. 내 금방 갈 테니, 조금만 더 버텨 줘.
자카리는 애타게 빌었다. 비앙카가 그의 죽음에 꺾이지 않기를. 비앙카가 그를 포기하지 말아 주기를….
신이시여. 그대가 비앙카를 성인으로 택했다면, 그녀를 조금만 더 굽어살펴 주십시오.
지금껏 찾은 적 없던 신까지 부르짖을 정도로 자카리는 절박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은 아르노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 * *
자카리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몰았다. 시야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어지러이 그의 머리를 흔들었다. 자카리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김이 흘러나왔다.
필사적인 것은 비단 자카리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아르노군이 하루빨리 영지에 도착하기 위해 밤낮을 줄였다.
영지까지는 대략 3주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얼마나 말을 재촉했는지, 그들은 가까스로 2주 만에 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아르노 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천만다행이도 성이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전쟁은 한창 물이 올라 있었다. 투석기가 동원되었고, 굳건한 성으로 사다리를 대고 올라가는 적군이 성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르노를 향해 득실득실 몰려가는 개미처럼 수도 없이 많은 군사!
자신의 보금자리가 흙발로 엉망진창 짓이겨진 꼴을 두 눈으로 마주하니, 자카리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말고삐를 잡은 단단한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성벽에 매달린 군사들의 목덜미를 잡아 떨구고 싶었다.
‘이곳은 네놈들 따위가 침범할 곳이 아니야. 세브랑의 그 어느 곳보다도 안전해야 하는, 내 아내가 있는, 나, 자카리 드 아르노의 영지다…!’
한편, 이렇게 힘겨운 와중에도 성문을 단단히 닫고 영지를 지키고 있는 비앙카와 영지민들에 대한 고마움이 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혹여나 제 죽음을 빌미로 협박당해서 문을 열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렇게까지 굳건히 버텨줄 줄이야.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왈칵,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
이리저리 뒤섞인 심정에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그의 괴기한 낯 속 눈동자만큼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겁화처럼 타올랐다.
당장이라도 저 전쟁터에 뛰어들고 싶어 몸이 달았다. 초조함이 그를 충동질했다. 저들의 투석기를 무너트리고, 저들이 벽에 댄 사다리 대신 말발굽 아래 그 시체를 탑처럼 쌓아 올려서. 위풍당당이 영지로 귀환하여 성안에 갇힌 채 그를 기다리고 있을 비앙카를 향해 활짝 팔을 벌리리라.
뜨겁게 달구어진 쇠는 잘 식힐수록 날카롭게 벼려진다. 자카리는 침착하게 대열을 정비하고, 전쟁에 뛰어들 최적의 시기를 가늠했다. 최저의 희생, 최대의 피해. 그리고 그 시기가 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때가 도래했다. 자카리는 군의 제일 앞, 선봉에서 외쳤다.
“아르노군이여. 눈앞의 처참한 꼴이 보이는가? 우리가 목숨 바쳐 변경을 지키고 있는 동안, 2왕자라는 작자가 우리의 터전을 유린하고 있다. 이 무슨 명예 없는 짓거리란 말인가!”
“우! 우!”
자카리가 외치기가 무섭게, 군대가 박자를 맞춰 창을 치켜들었다. 갑옷 위 검은 서코트를 차려입은 채 일사불란한 그 모습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사령의 군대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그제야 자코브군의 말미가 상황을 파악했다. 까맣게 뒤를 메운 아르노군에 그들은 망연히 넋을 놓았다.
자카리는 투구 덮개를 내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전장에 못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투구 속 자카리의 입술이 먹이를 노리는 늑대처럼 기이하게 올라갔다. 비앙카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지금껏 꼭꼭 숨겨 온 그의 야생적인 본성이었다.
“저들이 더 이상 우리의 땅에서 활개 치게 놔둘 수는 없다! 아르노군이여! 우리의 땅을 침략한 저 악의 무리를 처단하자!”
“와아아아!”
자카리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흑마는 단숨에 적진 사이로 내달렸다. 자카리를 선두로, 군사들은 큰 함성과 함께 자카리의 뒤를 따랐다.
자코브군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아르노군의 말발굽이 그들 사이를 현란하게 오갔고, 그들의 번쩍이는 날붙이 끝은 적의 목숨줄을 꿰뚫었다.
자카리의 군은 파죽지세였다. 거칠 것 없이 내달리며 자코브군을 쓸어내는 그들은 전장에 늑대라는 이명, 그 자체였다.
그렇게 자카리가 이끄는 아르노군이 후방부터 공격하며 전열을 엉망진창으로 흐트러트리는 사이, 자코브군의 전방은 성벽을 공격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던 자코브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당황하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갑작스러운 후방 공격에 자코브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이게 무슨…!”
“전장의 늑대, 아르노 백작입니다!”
병사의 외침에 자코브는 어이가 없었다. 자코브는 제 옆에 있던 위그 자작을 바라보았다.
위그 자작은 아르노 백작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재빠르게 상황을 눈치챈 그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 했지만, 자코브가 손을 뻗는 것이 먼저였다.
자코브의 손에 목덜미가 잡힌 그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푸른 눈에 서린 예기와 마주해야만 했다. 희번덕거리는 광기 어린 눈에 위그 자작은 히이익, 기겁했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는 상황일 텐데도, 자코브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은 채였다. 오히려 평안해 보일 정도로. 자코브는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자카리가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부, 분명 죽었어요! 죽었습니다! 피가 철철….”
“저게 무슨 피가 철철 난 부상자의 꼴이냔 말이야!!”
하지만 그런 자코브의 가식적인 평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위그 자작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기가 막혔던 그는, 그들의 군대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날아다니는 자카리를 가리키며 악을 질렀다.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흥분한 그는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그리고는 돌연 표정을 싹 지우고는 빙긋 웃었다. 손바닥을 뒤집는 듯한 빠른 태도 전환. 위그 자작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자코브는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많은 걸 기대한 것도 아니야. 자카리가 정말 죽었다고도 믿지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저렇게 멀쩡한 꼴로, 자네 뒤를 밟아 왔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나타나지는 말았어야 할 것 아닌가. 응?”
“전 정말 이해되지 않는…. 용서해주십시오, 왕자님!”
주절주절 변명하던 위그 자작은 뒤늦게서야 자코브가 바라는 것이 자신의 변명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자코브에게 용서를 빌었다. 위그 자작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자코브의 태도는 북풍한설이 따로 없었다.
“멍청한 데다, 거짓말까지 하는 자네는 정말로 쓸모가 없군…. 자네에게 가문을 물려준 선대 위그 자작이 불쌍할 정도야.”
이죽이는 자코브의 말에 위그 자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안 그래도 현 위그 자작의 부친인 선대 위그 자작은 죽기 직전까지 자카리를 안쓰러워했다. 그뿐이랴. 병중에 노망이 든 것인지, 그는 첫째가 아닌 둘째, 자카리에게 자작 위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다.
그러려면 당연지사 응당한 후계자인 현 위그 자작을 처리해야 했다. 현 위그 자작은 가까스로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분노한 그는 자신의 자리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자작 위를 물려받았다.
그랬던 만큼, 선대 위그 자작에 관한 이야기는 위그 자작의 역린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자코브에게 화를 내겠는가, 무얼 하겠는가? 지금의 분위기는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위그 자작은 고개를 바닥에 처박듯 숙이며 간절히 빌었다. 자코브가 어떤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렸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가 이 실수를 반드시 만회하겠습니다…!”
“만회?”
“예! 왕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억, 크억…!”
위그 자작은 절박하게 자코브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대로, 자코브의 칼날이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내리꽂혔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해줄 수 있는 만회와 도움은, 죽어주는 거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뒤통수가 꿰뚫린 위그 자작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칼에 꽂힌 도마뱀처럼 바르작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자코브는 혀를 차며 칼을 뽑았다. 칼에 희뿌옇게 들러붙은 뇌수와 피를 허공에 흩뿌린 그는, 분기 어린 눈으로 밀려 나가는 자신의 군을 노려보았다.
위그 자작을 죽였지만, 그건 그저 화풀이일 뿐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의 머리가 복잡하게 엉켰다.
자카리의 군 또한 오랜 시일 동안 말을 몰아 달려왔으니, 체력적으로 지쳐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조금만 버티면 저들도 체력이 바닥날 것이다….
하지만 지친 것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좀처럼 항복하지 않는 비앙카를 단숨에 함락시키기 위해 총공세를 펼치던 와중이었다. 높게 쌓은 탑일수록, 무너질 때의 여파가 큰 법.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붕괴하였다.
그 꼴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자코브는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자코브가 전전긍긍하며 머뭇거리자, 주변에서 가신들이 그를 잡아끌었다.
“왕자님! 퇴각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전선을 유지하면 전멸일지도 모릅니다!”
“전멸이라니! 군사 수의 차이가 있는데, 이렇게 쉽게…!”
“이미 저희는 많은 군을 소비했습니다. 상대는 아르노 경이고요. 게다가 영주인 그가 멀쩡히 살아 있는 이상, 백작 부인을 데려오게 되더라도 명분을 갖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젠장….”
자코브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믿기 힘들지라도,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카리가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가 무섭게 그들의 사기는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코브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거의 다 되었는데. 저자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비앙카가 나의 것이 되었을 텐데….
“젠장!!”
자코브는 이를 악다물었다. 하지만 가신들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도망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퇴각! 퇴각이다!”
자코브가 말에 훌쩍 올라타며 박차를 가했다. 백마가 목을 쭉 빼고 투레질하더니, 냉큼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자코브의 뒤를 쫓아 다른 이들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자코브는 말을 몰아 도망치며, 자카리가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그의 군사를 유린하는 자카리의 위로 태양 빛이 내리쬐었다. 은빛 갑옷이 햇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성화 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비해 자코브는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칠 뿐이었다. 얻은 것 하나 없이.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자코브는 패전의 원인을 알기 위해 몇 번이고 과거를 곱씹었다. 하지만 그는 비앙카를 얻기 위한 자신의 어긋난 바람이 문제였다고는 한 톨도 생각하지 않았다.
“2왕자가 도망친다! 소뵈르! 2왕자를 잡아라!”
자코브의 도주를 눈치챈 자카리가 외쳤다. 자카리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뵈르는 히죽 웃으며 말을 몰았다. 허허실실 방정맞지만, 전쟁에서는 누구보다도 집요한 사내였다. 그는 마치 토끼를 뒤쫓는 사냥개 무리처럼, 군사들을 몰아 자코브의 뒤를 따라붙었다.
아르노 영지의 평야를 까맣게 메웠던 적군들이 물러나고, 남은 것은 시체와 적막, 포로, 그리고 대지에 당당히 선 아르노군뿐이었다.
로베르는 자코브의 뒤를 따르지 못한 채 남겨진 포로들을 모았다. 줄줄이 밧줄에 묶여 가는 이들은 자신의 참담한 미래를 떠올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전쟁은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마무리 또한 중요했다.
헤집어진 땅을 정돈하고 무너진 가옥을 올려 세우는 등 내실을 다져야 했다. 그나마 전쟁이 일어난 것이 겨우내여서, 내년 농사에 큰 지장이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밖으로는 자코브의 편에 참전한 귀족들에 대한 처우를 비롯해 자코브, 본인에 대한 판결도 현명하게 내려야만 했다. 왕실이 얽힌 일인 만큼, 흠 잡힐 것 없이 매끄러이 처리하는 게 중요했다.
일단은 자코브를 사로잡는 것이 문제지만…. 소뵈르는 지금껏 한 번도 목표를 놓친 적이 없는 이이니, 잘 해낼 것이라 믿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문제점이 많았지만, 지금 자카리의 머릿속을 메운 것은 바로 비앙카였다. 자카리의 흑마가 저벅, 저벅. 전장을 가로질러 성으로 향했다.
도개교가 내려오고, 한 달 반 동안 굳건히 닫혀 있던 성문이 영주를 맞이하기 위해 활짝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성문을 가로질러 말을 몰고 자카리를 향해 달려왔다.
허공에 펄럭이는 녹색 천 자락이 유난히도 선명했다. 녹색 직물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었고, 아르노 영지에서 녹색 옷을 입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상대를 깨달은 자카리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비앙카!”
“자카리!”
자카리가 입성하기까지 기다리지 못한 비앙카가 냉큼 말을 타고 달려오던 중이었다.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선물해 주었던 크림색 팔로미노. 작년 겨울 이후로 승마 연습을 소홀히 한 탓인지, 달려오는 비앙카의 모습이 불안불안했다.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가 냉큼 달려갔다. 비앙카에게 도착한 그는 비앙카의 고삐를 대신 쥐고 말을 진정시켰다. 순한 말인지라 그리 애를 먹이지 않았다.
말에서 내린 자카리가 안장에 앉아 있는 비앙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앙카의 작은 손이 자카리의 손 위에 얹어지고, 그의 단단한 팔에 안긴 비앙카의 몸이 깃털처럼 땅에 내려왔다.
비앙카와 자카리의 시선이 얽혔다. 3개월 만에 재회였다.
두 사람은 침묵한 채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작 3개월이었지만, 그사이에 겪은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을 글썽인 것과 달리, 비앙카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눈동자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건조하다고 생각했던 눈동자는 사실 저 먼 사막에 작열하는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모든 것을 불태우다 못해 자신의 감정마저도 태워 잠식한 듯한 열기가 비앙카를 향해 내리쬐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피부의 솜털 하나까지도 눈에 담을 듯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살피면 살필수록, 그의 억장이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항상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끝은 엉키고 그을려 있으며, 흰 뺨은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보드라웠던 입술은 잔뜩 갈라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가만히 방 안에 있지 않은 꼴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는 했어도, 비앙카가 전선에 나왔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자카리의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누구보다도 귀할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자카리는 사색이 되어 물었다.
“그 꼴이 무엇이오. 설마, 그대가 직접 전쟁에 선 것이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떻게…? 당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들을 방심하게 하기 위한 수작이었소.”
자카리는 침중한 신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자신의 선택이 비앙카를 고생하게 했다는 괴로움과 비앙카가 위험했던 순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다. 비앙카를 바라보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려 왔다.
그와 동시에 비앙카가 영지를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지키려 노력한 것에 감동하였다. 영주의 대리인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영지를 잘 지켜내 주었다.
“그런 수작을 부리려면…. 미리 알려주란 말이에요! 정말…. 정말…!”
비앙카의 목소리 끝이 떨리며 울음에 잠식되었다. 아까부터 그렁그렁하던 눈물은 기어코 차올라 뺨을 타고 흘렀다.
자카리가 원망스러웠던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슴을 떠밀듯 밀어내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가는 팔뚝에 산처럼 우뚝 선 자카리가 꿈쩍할 리 없었다. 평소의 자카리였다면 순순히 그녀의 손짓에 따라 멀어져 주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반대로 비앙카를 와락 끌어안았다.
비앙카 또한 바르작거리며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자카리의 품에 안긴 채,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정말 죽은 줄 알았잖아요….”
“미안하오. 내 할 말이 없소.”
자카리가 거듭 사과했다. 비앙카는 빼꼼히 고개를 들어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비앙카가 전쟁을 치른 것은 한 달 반이지만, 자카리는 석 달 동안 전쟁터를 전전했다.
거칠해진 뺨과 헝클어진 머리칼. 피로한 눈매. 비앙카는 손을 뻗어 자카리의 뺨을 매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까끌까끌한 느낌이 안쓰러웠다.
당신도, 나도 힘들었구나. 하지만 이겨내서, 여기에 있구나….
그토록 처절했는데. 막상 전부 끝나고 나니 허심탄회한 기분이었다. 비앙카는 별거 아닌 듯, 단조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으려고 했어요.”
“뭐?”
자카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 여겼다. 비앙카가 죽다니…. 자신이 전쟁터에 너무 오래 있어서, 죽는다는 말에 익숙해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런 환청도 듣는 것이다….
하지만 비앙카는 확인 사살하듯,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죽어서…. 나도 죽으려고 했어요.”
“그러지 마시오.”
자카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비앙카의 자살이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는 절박한 낯으로 비앙카를 설득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생각 하지 마시오. 알겠소? 그대가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낮게 잠식된 목소리가 먹먹했다. 그는 비앙카에게 그러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야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듯 재차 애원했다. 그만큼 그는 필사적이었다.
자카리가 초조해하는 것과 달리, 비앙카는 여유로웠다. 의뭉스러움을 부드러운 미소로 숨긴 그녀는 살풋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절 죽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
“임신했어요.”
비앙카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었다. 활짝 만개한 꽃처럼 웃는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는 드디어 해냈다는, 승리감마저 도사리고 있었다.
반면 자카리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에게는 너무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자카리가 쉽사리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비앙카는 자카리의 이해를 도와주려는 듯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번복했다. 사실상 재촉에 가까웠다.
“그날, 아이가 생겼어요.”
“아이….”
자카리는 여전히 현실을 인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날이라면, 자카리가 출전하기 직전의 밤이 분명했다. 피임하지 않은 유일한 밤이었으니까.
애초에 비앙카가 그리도 임신하기를 원하니, 그녀의 기분이라도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막상 임신한 걸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전히 비앙카는 작고, 어렸고…. 뒤늦게 자신이 성급한 결정을 한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그를 뒤흔들었다.
물론 비앙카의 고집이 강경하여, 또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카리가 어쩔 수는 없었겠지만….
반면 비앙카와 자신의 아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들일까, 딸일까. 비앙카를 닮았으면 좋을 텐데….
기대가 되기도 하고, 비앙카의 몸이 걱정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던 와중, 자카리는 비앙카의 뒤로 얌전히 어슬렁거리는 크림색 말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아까 비앙카가 말을 타고 달려오던 불안불안한 모습 또한 연달아 떠올랐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자카리는 기겁을 하며 외쳤다.
“아니, 그러면 임신하고 말도 탄 것이오? 잘못되면 어쩌려고!”
“전쟁도 견딘 아이인걸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비앙카는 태연했다. 진심으로 괜찮다고 믿고 있는지, 목을 빼고 천연덕스레 대꾸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때, 저 멀찍이서 한 박자 늦게 달려오는 뱅상과 가스파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것도 위로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눈이 돌아간 뒤였다. 자카리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버럭 외쳤다.
“내가 안 괜찮소. 뱅상, 뱅상!! 어째서 마님이 말을 타게 내버려 두었느냐!”
자카리의 타박에, 애꿎은 뱅상의 얼굴이 울 듯 웃을 듯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말리기도 전에 비앙카가 냉큼 말 고삐를 잡고 뛰쳐나갔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말을 가져오라, 안장을 채워라, 잔뜩 느긋하게 남들을 부려 먹으시더니, 이럴 땐 또 눈 깜짝하기가 무섭게 재빠르다.
한참을 씨근덕거리며 마음을 다스린 자카리는 비앙카를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을 꺼냈다.
“고맙소.”
딱딱한 말투와 달리 비앙카에게로 향하는 그의 눈빛과 손길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자카리는 조심스레 앞으로 흘러내린 비앙카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의 손끝이 비앙카의 뺨을 스치듯 매만졌다. 새끼 고양이의 털을 손바닥으로 굴리듯,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선 조심성이 묻어났다.
“죽지 않고 살아줘서. 나를 기다려줘서.”
“저야말로 고마워요.”
비앙카가 자카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갑옷을 차려입은 단단한 허리는 비앙카의 팔이 감기지 않을 만큼 두꺼웠다.
자카리의 서코트 위에 걸친 검은 망토가 비앙카의 몸을 휘어 감쌌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걷어내듯이.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슴에 고개를 기울여 기대며 속삭였다.
“죽지 않고 살아줘서. 나에게로 돌아와 줘서.”
두 사람의 뒤로 먹구름이 흩어지고, 태양이 평야를 비췄다. 눈이 차츰차츰 녹아내리며, 드러난 땅을 비집고 새싹이 싹을 틔웠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봄이 도래했다.
유난히도 길고 험난했던 겨울의 종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