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able Age Wulin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217
제53장 무한장 방문 (4)
백리설과 헤어지고 후원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가을이 오는 탓일까?
하나둘 떨어지는 잎사귀는 백리세가라고 다르지 않았다.
“슬슬 찬 바람이 부는구나.”
온연히 가을이 깊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 와 처음 맡는 가을인 것 같군.”
학관에서 피고 지는 계절을 색시와 함께하고 싶었거늘.
마음이 쓰리다.
‘칠천사도와 혈교라.’
최근에 일어난 팔천사도의 혈겁은 강호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소호의 몇 개나 되는 중소 문파들이 사라지고, 이름난 고수들조차 불길 속에 목숨을 잃었다.
혹자는 십 년 사이 유례가 없는 혈겁이라며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초운휘는 안다.
‘진짜 망천회가 전면에 나선다면 팔천사도의 혈풍 정도는 장난 수준일 따름이야.’
묵직한 한숨과 함께 초운휘가 중얼거렸다.
“겨울이 가기 전에 칠천사도와 혈교를 지운다.”
누군가 들었다면 기함을 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초운휘는 헛헛하게 중얼거릴 따름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시리겠군.”
중얼거리고 있자니, 문득 정원 너머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초운휘 교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한장주 백리정순이었다.
핼쑥한 안색 위로 작은 희색을 머금은 그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
“설이가 저를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
“비록 어색하고 껄끄럽지만, 이 못난 사람을 다시 아비로 불러주었습니다.”
말문을 잇지 못하는 그에 초운휘는 대강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백리설이 용기를 낸 모양이군.’
발군의 행동력이 아닌가.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초운휘는 내심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모두 초 교관 덕분입니다. 덕분에 과오를 깨달을 수 있었고, 작게나마 바로 잡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를 어찌 갚아야 할지.”
머리를 숙이는 그를 보며 초운휘가 싸늘하게 답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
“난 그쪽을 용서할 생각이 없어.”
여전히 경멸하는 쪽이지.
“자신을 버리려던 가족의 사과를 받아줄 만큼 난 관대한 사람이 아니야.”
“일전의 일은….”
“섭혼술에 당했다는 핑계는 대지 마라. 분명 최면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비술은 대단하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쪽이야. 네 욕심이 없었다면 당하지 않을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환혼섭혼화는 혈교의 교주인 자신도 알고 있는 강력한 최면술이다.
하지만, 천하의 어떤 비술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이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용서한 백리설이다. 온전히 진실을 이해하고, 용서한 것은 오직 그녀의 힘이다.”
“…….”
잠시간 침묵하던 백리정순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속죄와 사죄는 평생에 걸쳐 갚아나갈 생각입니다.”
“직접 행하면 될 일이야. 굳이 내게 말할 필요는 없어.”
단호하게 자르자 백리정순이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언제나 소심하던 아이가, 더없이 냉철한 모습을 보이기에 누구를 닮아가나 싶었더니.”
“?”
“이거. 완패로군요. 과거도 미래도 한 사람이 가져갔으니, 어쩔 도리가 없겠습니다.”
이놈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의아했지만 혼자 말하고 혼자 납득한 백리정순은 이미 저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누구보다 보석처럼 빛나는 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랬던 것 같긴 해.
“금과 옥처럼 아끼고 보살피겠다고도 하셨다지요?”
아니, 그런 말은 안 했는데?
“평생을 품에 넣고 살겠다니, 보기보다 낭만적인 분이셨군요.”
야, 잠깐. 거기 가만있어봐.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말을 멈추려 했지만 백리정순은 도무지 이길 수 없다는 듯 혼자 납득하고는 떠들기를 이어갔다.
“수련을 할 곳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까?”
“…어.”
“신무학관에서 뒤편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가면 산 능선이 나옵니다. 그곳을 넘어가면 아름다운 산중 폭포와 거대한 계곡이 있습니다. 그곳이라면 조용히 수련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폭포와 산중호수라….”
언젠가 남궁윤호를 따라 올랐던 산책로에서 본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곳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는데.”
꽤 많은 무인들이 무서운 얼굴로 지키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백리정순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투였다.
“뒷산 전체가 저희 백리세가의 것이니까요.”
“뭐?”
“가끔 산책을 할 곳이 필요해 산 몇 개를 샀습니다.”
백리정순이 한 마디를 더했다.
“일종의 가족 여행지입니다만, 언제고 내어 드릴 것, 미리 내어 드리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니, 뭘 미리 내어준다는 건데.
묻고 싶었지만, 채 말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
그날 저녁.
팔미로의 구이집에 들러 모처럼 오붓한 자리를 가졌다.
다만, 의외의 참석자가 있었으니.
양대철 동천교두였다.
애인과 시들하다며 침울해져 있던 이 과묵한 교관은, 꼬칫집에 쭐레쭐레 왔다가, 연인과의 관계를 파탄 낸 당사자를 보며,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사석에서 뵙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하하. 동료 교관과 함께 하는 자리는 저도 흔치 않은지라.”
사정을 모르는 능풍운은 너스레를 떨었지만, 양 교두의 눈이 더욱 무서워진다.
‘질투에 사로잡힌 꼴사나운 모습은 참아줘.’
기원하고 있자니, 모용소혜가 짝짝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자자. 눈싸움 그만하고, 앉으세요.”
오늘의 자리는 모용선야가 주최한 자리였다.
“학무관에 한 방 먹인 것을 축하하며, 위하여!”
채앵!
잔을 부딪친 그녀가, 기세 좋게 술잔을 비우고는 턱 한쪽 팔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이제 한숨 돌렸네요.”
“일은 잘 끝난 겁니까?”
“아주 학무원이 난리가 난 모양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예산이 팍팍 올라오니까.”
“가장 난색을 표한 것은, 신년 야유회 쪽이었죠. 화합을 도모하자며, 대규모 야유회를 건의했으니, 상당히 난감할 겁니다.”
“새로 오신 분들과 기존 교관분들과의 마찰은 유명한 일이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여매홍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니. 혹시 저희 승진 시험에 대해서 들어보았어요?”
“응, 어느 정도는.”
휘휘 동석자들의 표정을 살핀 그녀가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아직 공문이 가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정말 소문대로 저희가 직접 강호에 나가는 건가요?”
대게 신무학관의 승진 시험은 학관 내에서 치러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응. 학관을 후원하던 문파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독고율에게 들었던 대로다.
일반적으로 신무학관을 후원하는 문파들에는, 후원자에 대한 예우로 방문해 의뢰를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팔천 사도의 등장으로 강호행이 파탄이 나며, 의뢰를 수행하지 못했고, 이것이 후원자들의 불편을 산 모양.
“후원자들을 다독이는 것도 목적이지만, 상부에서는 앞으로 보다 실전에 강한 인재를 선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실전형 관도를 넘어, 실전형 교관을 발굴하겠다는 겁니까?”
“정확해요.”
능풍운의 지적에 모용선야가 즉답을 했다.
“이번 사건만 해도, 보다 효율적인 대처를 했다면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에요.”
“하지만, 모용 교관. 상대는 이종의 진기를 사용하는 특이한 자가 아니었습니까?”
“이례적인 것은 알아요.”
양 교두의 말에 일부 긍정하면서도 모용선야는 다른 의견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라도 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교관이다. 라는 것이 상부의 생각이에요.”
“…정론이긴 하군요.”
“저들이 얼마나 깊숙이 강호에 침투해 있는지, 수는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어요. 그런 면에서 앞으로를 대비하려면 실전을 강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죠.”
확실히 무림맹이 변하고 있었다.
이전 삶에서 무력하게 넋 놓고 있다 통한의 패배를 이어가던 모습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망천회에 대적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결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번 진급 시험뿐만이 아니에요. 심지어 신천관을 열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으니까요.”
“신천관까지요?”
“허어. 생각보다 결심이 확고한 것 같군요.”
아연실색한 여매홍이나 양 교두와는 달리, 듣고 있던 능풍운은 피식 웃었다.
“신천관의 관도들이 들으면 만세를 부를 일이군요. 하루 종일 교관실에 갇혀 무공 연구나 했을 텐데.”
능풍운의 자조 섞인 말에 사람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뭐,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겠죠.”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마침 구파의 인재들도 들어왔으니, 귀중한 전력을 싸게 부려 먹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호호. 역시 능 교관님은 훤히 아시네요.”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지는가 싶던 참이었다.
우물. 우물.
귀만 열어놓고 쉬지 않고 접시를 비우고 있자니, 곁에서 여매홍이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왜-요?”
주르륵.
입가에 흐르는 양념을 소매로 닦으며 묻자, 모용선야의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초. 교. 관. 님.”
고개를 돌리자, 모용선야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빈정이 상한 얼굴이다.
“뭡니까?”
“몰라서 물으시나요?”
“노처녀는 감정 기복이 들쭉날쭉하다던데.”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쾅!
탁자를 친 모용선야가 왁 소리를 쳤다.
“대화를 하는데 혼자 우적우적 먹고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대화에 껴야죠! 대화에!”
“귀는 열려 있습니다.”
“대화는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말을 나누는 행위라고요!”
“참고할게요.”
참고만 한다.
“으적. 으적.”
지지 않고 접시를 비우자, 모용선야가 하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꽤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초운휘는 내심 억울했다.
‘나름 배려한 건데 말이야.’
오늘도 능풍운을 콕 찍어 초대를 한 마당이거든.
둘이서 괜찮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라며 잠자코 있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내 선의가 의심받고 있어.’
억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구나.
***
자리가 파하고 돌아가려는데, 능풍운이 은근슬쩍 접근했다.
“친구. 할 말이 있네.”
은근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능풍운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승진 시험은 나 때문인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지?”
“얼마 전에 연락을 받았네. 사도의 행적이 발견된 것 같더군.”
오늘 유독 침울해 보이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비공식적인 임무지만, 적당한 명분을 쥐어 보내려는 생각이겠지.”
“…….”
“아무래도 내가 죽을 자리를 찾아갈 때가 생각보다 더 일찍 찾아올 모양이야.”
들려오는 말에 문득 입을 열었다.
“장강수로채인가?”
“!”
잠깐 놀란 눈을 하던 능풍운이 당황한 채 물어왔다.
“어, 어떻게 알았나?”
“내가 눈치가 좋아서 말이지.”
사실은 독고율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능풍운은 대강 나름대로의 답을 찾은 모양이다.
“끙. 하긴 내가 너무 많은 단서를 남기긴 했지.”
확실히 그렇다.
뜬금없이 장강수로채를 아는지 물어본 것도 그렇고.
“가만. 그러고 보니, 자네. 백리세가에 다녀왔다고 하지 않았나? 계곡을 빌려 수중 훈련을 한다는 것도 설마 장강수로채와의 일전을 대비하여….”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이실직고를 할 수는 없다.
“흐흐. 너무 넘겨짚었어. 하지만, 말이야.”
의심이 간다는 정도로 백리세가와 교섭해 계곡을 통째로 빌렸다고 설명하면 확신의 출처를 의심할 것이 뻔하니까.
“하지만 말이야.”
적당히 둘러대며 초운휘가 말했다.
“혹시라도 물속의 전투가 궁금하면 한 번 찾아와.”
쓸모 있는 녀석에게 작은 도움 정도는 줄 생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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