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21
120화 천외의 이야기
천상의 한 자락.
자오경이 위치한 곳에서 연청운의 분투를 지켜보며 장삼풍과 달마는 입을 열지 못했다.
연청운이 패배하여 쓰러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먼.”
달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문 녀석이긴 하지만, 우리쯤 되면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지.”
장삼풍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근(仙根)의 가능성을 지닌 장문경을 보고도 둘이 환호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싸울 것이고, 패할 것이다.
실제로 싸웠고, 완패했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본 두 전설은 석고상처럼 단단히 굳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은 실망감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진전을 이은 제자의 패배를 부정적으로 보는 모습들이 아니다.
“오랜만이야, 이런 기분도.”
“그러게 말이오.”
“눈물이 날 것 같군. 생각지도 못한 생일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야.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 것으로.”
오히려 감동했다.
“다 보여 주었어! 다!”
제자 연청운은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보여 주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끌어낸다.
말은 쉽다.
하지만 일생을 통틀어도 이를 한 번이라도 해내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사람이 평소 이상의 힘을 낸다고 하지만, 이 또한 엄밀히 따지면 본연(本然)의 모든 역량을 다 쥐어짜 낸 것이 아니다.
연청운은 해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쥐어짜 냈고, 본능이 날뛰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까지 이성의 끈을 잡고 배운 바를 펼쳤다.
연청운은 온몸으로 말했다.
온몸으로 소리 질렀다.
그것은 찬가(讚歌)였다.
사부들에게 바치는 신뢰였으며, 목 놓아 부르짖는 믿음이었다.
제자 연청운의 모든 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렸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이토록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실망 따위가 끼어들 틈새는 없다.
마지막 의식을 잃는 순간까지 제자는 자랑스러웠다.
“잘 키웠어…… 우리 제자…….”
“허허…….”
“천상의 많은 이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거야.”
“허허헛!”
답하는 달마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그렇게 만족하는 가운데, 장삼풍은 이 자리에 없는 동료를 떠올렸다.
“천마, 그 양반은 어떻게 보았으려나?”
***
“……어떻게 보긴.”
천마가 만든 보패는 자오경이 놓은 공간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당연히 자오경에서 나오는 소리는 물론, 자오경 주변의 소리도 들린다.
장삼풍이나 달마와는 다르게 천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구조를 짜증 나게 짜 놨어. 망할 놈.”
중토신공이 연청운의 육신을 담당했다면, 천마무겁수는 힘이 구축될 수 있는 틀을 잡아 주었고, 삼재일기공은 그 안에 담긴 여러 힘들이 충돌하지 않게 섞어 주었다.
저마다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십분 다 해냈으나, 방금 제자가 끌어낸 힘 중 가장 중심이 된 것은 역시 삼재일기공이었다.
천마로서는 아쉬웠다. 제자 연청운을 뜨겁게 달궜던 불의 신력이 자신의 유산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천마무겁수가 주가 된다면……. 쯧!”
하지만 천마 스스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 경우 연청운이 배운 무공들을 모두 활용할 수 없다.
극강격과 불의 신력이 서로 어울리지 않았듯, 삼재일기공을 거치지 않는다면 연청운이 배운 무공들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충돌이 일어난다.
연청운이 배운 것들은 그 정도로 개성들이 뚜렷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아.”
천마는 제자가 좀 더 자신의 힘을 활용하길 바랐다.
지금도 가진 것을 백분 활용했다는 측면에서는 만점을 줄 수 있지만, 그 결과 천마의 무공은 보조적인 역할로 그쳐 버렸다.
“내 것으로 채워 넣고 싶다.”
독존(獨尊).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마의 근본적인 기질이다.
홀로 서는 자.
방금 본 그 역투는 분명 천마의 근본을 건드렸다.
“흐흐흐!”
천마는 있을 수 없는 허기를 느꼈다.
피부가 간지럽다.
존재할 리가 없는 피가 끓는 기분이다.
불쾌하고도 기분 좋은 감각.
뭔가 잔뜩 배 속에 구겨 넣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다른 힘을 줄 때인 것 같다.
천마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신녀를 보내면서 필요한 부분을 충족했다 여겼기에 선을 넘는 일은 없게 해 보려 했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
“침 떨어진다, 할망구.”
연청운의 투혼을 지켜본 것은 스승들뿐만이 아니었다.
천마가 뿌린, 지금도 뿌려지고 있는 보패를 통해 이를 지켜본 자들 중에서는 천상의 지고한 존재들도 있었다.
현천상제와 서왕모.
얼마 전 모종의 이유로 만남을 가졌던 그들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후릅! ……침이라니, 무엔 망발인 게냐.”
“사실 그것보다 더 심하지. 다 늙은 할망구가 새파랗게 어린 계집년처럼 발갛게 물들어서는. 그걸 지켜보는 입장도 좀 생각해 달라고.”
“흐흠!”
소년의 외견을 하고 있는 현천상제의 말이라 그런지 더욱 칼날처럼 박혀 왔다.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시선을 돌린 서왕모가 고양이처럼 손등으로 볼을 비비며 문질렀다.
현천상제가 피식 웃었다.
“저게 무슨 선계 제일의 여신이라고.”
“…….”
선을 넘는 현천상제의 발언에 서왕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쯧.”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서왕모의 모습에 현천상제도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음에도 두 대신격이 만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부했던 일은 잘 처리하고 입을 놀리는 것이길 바라느니라.”
“말은 해 놨어.”
“역시 겉만 번지르르한 영감탱이로구나. 느려 터졌느니라.”
“……뭐래, 이 할망구가.”
아픈 곳이라도 찔렸는지 현천상제가 눈을 찌푸렸다.
“온 보람이 없느니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느니라♪”
제대로 쑤셨다는 확신에 서왕모가 흥얼거렸다.
“그놈은 이제 옆 동네 놈이라 관할이 다르단 말이다!”
“흥흥♪”
“애초에 그놈이랑 불화가 있던 건 할망구였으면서!”
“아~ 보람이 없느니라♪”
현천상제의 말처럼 서왕모는 정말 어린 소녀로 돌아가기라도 했는지 떼를 쓰듯 자기 할 말만 했다.
“이 할망구 태도 보소?”
그 유치한 언행에 휘말린 현천상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선계에서 가장 지고한 존재들을 꼽으라면 반드시 손가락 안에 들어갈 이들의 대화 같지 않았다.
누가 보고 들었다면 어안이 벙벙했을 거다.
이게 무슨 지고한 존재들의 대화냐면서.
다른 목소리가 개입한 것은 그때다.
“카카카카카!”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는 어딘가 사람의 것과 거리가 있었다.
짐승이 숨을 내쉴 때 나오는 쉬익거리는 숨소리에 웃음기를 섞으면 이런 소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왔군.”
그 웃음소리를 들은 현천상제는 기다렸던 존재의 등장에 표정을 바로 했다.
허공이 열리며 한 존재가 떨어져 내렸다.
“카카카카카! 그래, 두 분께서 이 몸을 찾으셨다 들었소이다만?”
과장되게 허리를 뒤로 젖히며 웃는데 그 유쾌함이 지나쳐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질 것처럼 보인다.
곡예라도 하는 것처럼 웃어대는 그 존재는 두 발로 몸을 세우고 있지만, 그 얼굴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원숭이다.
세상에 다시없을 화안금정(火眼金睛)을 하고 있는.
“할망구 차례다.”
웃음소리가 거슬리는지 현천상제가 슬쩍 대화의 주도권을 서왕모에게 넘겼다.
서왕모 역시 자질구레한 말을 다 떼어 버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반도가 필요하느니라.”
“카카카! 반도라? 군침 도는 소리긴 합디다만, 영원히 도화(桃花)가 지지 않을 반도원(蟠桃園)의 주인께서 이 필부에게 어찌 반도(蟠桃)를 청하시오?”
반도라 불리는 복숭아는 한 알만 먹어도 영생을 보장한다는 선계의 보물. 그 반도를 관장하는 것이 바로 서왕모다.
그리고 한때 그 반도원의 모든 복숭아를 따 먹어 버렸던 것이 이 존재였다.
당시 먹었던 반도의 맛이 떠오르는지 입맛을 다시면서 되묻는 화안금정의 원숭이에게 서왕모가 단호히 말했다.
“천상의 것을 말함이 아니니라.”
“허면?”
“당시 네놈이 지상으로 빼돌렸던 것. 오만무도하던 시절 지상으로 빼돌린 반도의 씨앗을 심어 둔 곳의 것을 말함이니라.”
“카카카카! 지상이라?”
화안금정의 원숭이가 이제야 좀 알겠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천상에 뿌리를 내린 놈이 아니라 알이 맺혔더라도 볼품없을 것이오만……. 그렇구려. 혹시 이 녀석 주려고 그러시는 것이오?”
허리춤에서 뭔가를 주섬거리는 원숭이가 거울 모양의 보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천마가 만든 자오경을 엿보는 보패가 그 존재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
“그게 거기까지 갔던 겐가.”
“카카카! 달마 녀석 덕에 알음알음 퍼져 있긴 하오. 카카카카, 이 녀석이라…….”
화안금정의 원숭이가 천마가 만든 보패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긴 하오. 카카카! 까짓거 그럽시다. 따지고 보면 나와도 아주 무관한 인연은 아니외다.”
자신과 한 가닥의 인연이 있다 말하는 화안금정의 원숭이가 거울 속에 비치는 연청운을 바라보며 흥미를 드러냈다.
그렇게 천상의 거물 중 하나가 연청운에게 관심을 가졌다.
***
한편 그 시각.
밝은 곳이 있다면 어두운 곳도 있는 것이 균형의 이치라는 듯, 피와 죽음이 흐르는 곳을 한 사내가 걸었다.
그 사내가 걸어가는 길이 곧 그의 성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죽음이 아니면 굴종(屈從).
살아 있는 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한 채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핏물이 되어 질퍽한 웅덩이가 되었다.
유일하게 그 사내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이는 살날이 많지 않아 보이는 붉은 가사의 노승이었다.
“흐읍!”
악다문 입으로 기합을 삼키는 노승이 두 손을 휘두르자 사내의 코앞에 거대한 석불의 그것만큼이나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죽어라!!”
눈이 멀 것 같은 거대한 금광을 번뜩이는 노승의 공격.
서장의 무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왔을 무공이다.
밀종대수인(密宗大手印).
서장의 무공을 말할 때 빠지지 않은 절세의 무공이 사내를 뭉갤 기세로 뻗어나갔다.
파각!
“마, 말도 안 되는!!”
하지만 그를 종잇장 찢듯 찢어 버리는 사내가 그대로 노승의 머리를 잡고 뒤편에 있는 거대한 석불에 박아 버렸다.
콰앙! 콰르르!
머리부터 터져 버린 노승의 몸이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핏물이 되어 튀었다.
노승의 핏물을 뒤집어쓴 야산만 한 크기의 거대한 석불에 균열이 일며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서장의 최강자 중 한 명을 간단하게 압살해 버리는 광경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큭!”
그랬던 사내가 뒤늦게 인상을 쓰며 짧은 단말마를 내질렀다.
“인과율은 충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영향력이 컸던 존재였군, 대종사.”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사내의 혼잣말은 나지막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주변에 머리를 박고 있는 그 누구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홀로 이해받지 못한 채 지상에 서 있는 사내가 위를 바라봤다.
불쾌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사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꾸 하나씩 어긋나는 느낌이다. 알아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