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22
121화 저마다의 꿈
정신을 차리자마자 덮쳐온 것은 끔찍한 통증이었다.
“으아아아아…….”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것 같다.
정신은 돌아왔는데, 몸이 따르지 않았다. 신음 소리를 내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다.
온몸을 두들기고 있는 통증이 아니었다면 전신 마비가 된 상황이라 생각했을 거다.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의식을 차리고 몸 안에 내공을 움직여 확인해 본 결과 기혈과 신경이 엉망이긴 했어도 끊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오지게 혹사했을 뿐이다.
‘튼튼한 몸을 만들어 주신 사부님들께 감사해야겠네. 어우우…….’
아마 다른 사람이 나 정도로 무리를 했다면 평생 숟가락도 못 드는 병신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경험이라면 한 번 있었다.
중토신공의 힘을 무리하게 끌어올렸을 때.
사부님들은 토정공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최소 반년은 정양했을 것이라 하셨다.
강도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몸 상태는 그때와 유사했다.
‘……어! 자, 잠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도중 묘한 불안감이 따라붙었다.
‘……백무호 그 망할 놈이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겠……지?’
당장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등 뒤를 맡길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친구임이 분명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가장 믿을 수 없는 유해물이 바로 백무호다.
당시 뭐라고 했더라? 바지를 벗겨서 뭘 한다고 했지?
그때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일어났냐?”
피칠갑을 한 악귀가 등 뒤에서 나타나도 이것보다는 무섭지 않을 거다.
진짜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다가올 흑역사를 예감하며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야, 내 말 씹냐?”
‘응?’
다시금 들려온 목소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였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려면 목소리가 점점 다가와야 할 것인데?
“끄응…….”
의식이 돌아왔다고 몸이 조금은 회복된 것 같다.
그 쥐꼬리만 한 힘을 모아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보니 백무호의 모습이 보였다.
“아…… 하하하…….”
그야말로 천지신명이 보우하사였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엉망진창인 꼴로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다.
몸을 못 가누는 상태인 건 저놈이나 나나 매한가지인 상황이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웃냐? 웃어?”
‘그럼 웃지, 울겠냐?’
평소라면 시원스레 웃겠지만, 지금은 배가 땅겨서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이거 은근히 아프다.
“말…… 힘들다……. 배에…… 힘…… 없어…….”
어쨌거나 다행이다. 안심하고 정신줄을 놔도 될 것 같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의식이 금방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저녁이었다.
밤공기 특유의 습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흐아으아아으…….”
몸은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조금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정신없이 잠만 잔 것치곤 회복이 빠르다.
‘중토신공 사단공의 힘인가?’
지난번에 눈을 떴을 때는 정신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겠다.
새롭게 구축된 힘이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짜임새 있게 구축된 중토신공이 나를 보듬어 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서도 스스로 움직이며 회복을 돕고 있는 것이다.
몸은 정직하다. 무리를 하면 반드시 그 흔적이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중토신공 사단공의 힘은 놀라운 것이다.
병신이 돼도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몸을 한계까지 혹사시켰는데, 잠 좀 자고 일어났다고 이만큼이나 회복시켜 낸 것이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하루하고 한나절이다.”
얼마나 정신줄을 놓고 있었는지 가늠하는 와중에 홀연히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특징 있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장문경이 의자에 앉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예에?”
“나라면 얼마 정도 의식이 없었는지 궁금했을 테니까.”
정확하게 짚어냈다.
은근히 본능대로 들이받는 양반이라 여겼는데, 그래도 생각이란 것이 있긴 한 모양이다.
“여긴… 어떻게…….”
“딸이 온종일 네 간호를 하고 있어서.”
“예에?”
장소월 소저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내 침상에 누군가 몸을 기대고 있긴 하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장문경의 말대로 장소월 소저가 침상에 기대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다른 의미로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양반, 다짜고짜 호구조사부터 했었지?’
이러다 진짜 모가지 날아가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이 양반이라면 내 모가지쯤이야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썰어 버릴 것 같은데…….
“저기…….”
“선배라고 불러라.”
갑자기 천하십검이 선배가 되었다.
뭐, 꼬여 있는 배분으로 생각해보면 가장 무난한 호칭일지도 모르겠다.
“예, 선배님.”
“흠!”
거부감 없이 바로 선배라 대답하자, 장문경 선배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그러더니 훅 들어왔다.
“후배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제게요?”
“허도진인 노선배가 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만나 보니 네 자질이 경이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렇다면 허도진인 노선배가 네게 얻었다는 가르침 역시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을 거다. 네 스스로 의도하진 않았어도 네 범상치 않은 자질의 일부를 통해 무언가를 보았던 것이겠지.”
‘아뇨, 그거 그냥 장삼풍 사부가 퍼 준 건데요?’
범상치 않은 자질이니 어쩌니 하시더니, 제대로 헛다리 짚으셨다.
‘선배라 부르라는 것도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만?’
무공 앞에서 수치를 모른다는 성정은 밤늦은 시간임에도 야근에 몰두 중인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다음에 이어질 말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검에는 무엇이 부족하다고 보았느냐.”
“선배…… 검이요……?”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물으신다.
사부님들도 지금은 지켜보고 계시지 않으신지 말씀들이 없으시다.
결국, 내 스스로 판단하고, 분석하여, 평가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뭘 봤어야 말이지.’
모든 것을 쥐어짜 냈어도 장문경 선배가 든 막대기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아마도 본 실력의 반의반도 끌어내지 못했을 텐데 평가를 해 달라니, 참으로 송구스럽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장문경 선배 성격에 내가 아무리 고사해 본들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이 분명하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나는 생각의 기준을 좀 달리 잡아 보았다.
만약 사부님들이라면 장문경 선배의 무공을 어떻게 보았을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내 안에는 사부님들의 무공이 있으니까.
“감히 제가 평할 주제가 되겠습니까만…….”
내가 보고 겪어 온 사부님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잡고, 그 관점을 중심으로 잠시 사부님들의 시선을 빌려 왔다.
“천의무봉이라 불리는 검도는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검의 흐름들에 짜임새가 있어 크고 험준한 성벽을 연상케 했으니까요.”
여기까지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사부님들은 언제나 내 무공의 허를 짚어 주셨다.
내가 느낀 장문경 선배의 허(虛).
“그러니 천혜의 방벽은 될 수 있겠습니다만, 하늘이 되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흐음……. 하늘, 하늘이라………….”
보이지만, 닿지 않는 것.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비유는 그 정도였다. 두리뭉실한 표현이긴 했지만, 그것을 자세히 풀어 말할 능력은 내게 없었다.
“그렇군. 검의 끝을 보고자 한다면 현실에 없는 것을 이뤄라?”
하지만 꽤 잘 먹혀든 것 같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마냥 멍한 얼굴을 한 장문경 선배는 분명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천혜의 방벽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결국 하늘 아래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재능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곳이겠구나.”
개떡같이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으신다.
솔직히 말을 늘어놓고 있는 나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하여간 천재라는 작자들은 정말!
“형(形)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그 빈자리에 어디에도 없는 것을 두어야겠구나. 형을 넘어선 초월의 경지라…….”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장문경 선배는 뭔가 얻은 게 있는 것 같다.
“이제, 허도진인 노선배께서 하신 말이 참임을 알겠다.”
“아, 예…….”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이젠 머리를 쥐어짜 내봐도 개떡은 고사하고 콩가루 하나 안 나올 판이다.
“쉬어라. 딸아이는 내가 챙기마.”
다행히 장문경 선배는 더 이상 나를 닦달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았다. 더불어 신경 쓰이는 장소월 소저도 거둬 가신다고 한다.
갑자기 장문경 선배가 보살처럼 보인다.
“밤이슬은 건강에 좋지 않다.”
묘한 말을 남기는 장문경 선배가 장소월 소저를 곱게 품어 안고 방을 나가셨다.
‘밤이슬?’
그 말에서 문득 한 가지를 깨달은 나는 위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려와.”
사천에서 만난 이후 언제나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이화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화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장문경 선배의 말처럼 밤이슬을 제법 오래 맞았는지 몸에서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어마어마한 불의 신력을 품고 있으니, 그 정도 한기는 큰 부담이 없겠지만,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다른 쪽이다.
“너, 내가 의식 없을 때 한숨도 안 잤지?”
“…….”
“대답.”
“……예.”
내가 하루하고 한나절을 잠들어 있었다고 하니 이화는 적어도 이틀 이상을 자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았다는 이야기다.
“얼른 가서 자.”
“쾌차하시고 일어나시는 걸 보고 자겠습니다.”
“그럼 지금 일어날까?”
계속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면 지금 내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을 거다. 그런 내가 몸을 일으키겠다고 하니 이화가 푹 고개를 숙였다.
‘서운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숙인 이화의 입술이 살짝 삐져나와 있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자기 충심을 몰라 주는 걸 야속해 하는 느낌이 든다.
“자.”
“예.”
단호한 명령에 이화는 그제야 적당히 주변에 비어 있는 침상 하나를 골라 몸을 뉘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눕는 이화를 보며 고개를 휘휘 젓던 와중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응? 그런데 장문경 선배는 왜 장소월 소저를 그냥 내버려두셨지?’
공동 수면실 같은 곳이다. 때에 따라서는 병상으로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당연히 주변에는 비어 있는 침상들이 많다.
장소월 소저가 불편한 자세로 내 침상 옆에 몸을 기댄 채 졸고 있었다면 왜 장문경 선배는 그런 소저를 편한 자리에 옮겨 눕히지 않았을까?
***
“검만 아는 선머슴 같던 녀석이, 이제 제법 여자다워졌구나.”
아버지인 장문경의 품에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장소월의 얼굴은 부끄러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