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5
14화 은원이라는 것은
“싹 다 죽였군. 개자식들.”
사람 좋아 보이는 백진성 아저씨도 욕부터 토해냈다.
나는 그런 백진성 아저씨의 말을 귀로 듣고, 눈으로는 이 광경을 둘러보며 다시 한번 청명심법의 호흡을 반복했다.
패자는 비참하다.
패배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 패자들의 모습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문뜩 질문 하나가 입에 담겼다.
“사부님들 시대에도 이런 일은 많았겠죠?”
[숱하게.] [참혹한 시대였지.]두 분은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했을 장삼풍 사부도 말을 아꼈다.
그렇기에 더 놀랍기도 하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겪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직접 무림의 뒷면을 보니 알겠다. 이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두 분 사부는 그런 세계에 살며 도(道)를 행하고 불성(佛聖)을 실천했다. 그리하여 천상에 닿았다. 참혹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논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강건한 것이었는지 새삼 다시 느낀다.
“청명심법이 효자네.”
심신을 맑고 정갈하게 다듬어 주는 심법이다.
이게 아니었다면 못난 꼴을 보였을 거다.
실전 중에도 이 호흡을 펼칠 방법이 없을까 싶을 정도다.
이 와중에도 강해질 방법을 생각했다.
이렇게 되고 싶진 않으니까.
이 무림에서 정명한 뜻을 지키고 살아가려면 강해야 한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하고 오만하게.
허리를 펴고 주변을 바라보는 내 몸에 힘이 들어갔다.
몇몇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며 쑥덕거렸다. 예상했던 모습을 보이지 않아 의외라는 듯했다.
“뭐 그리 힘을 주고 있냐?”
그런 가운데 백무호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을 걸어왔다. 장난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굳이 장난을 걸어 온다.
이유야 뻔하다.
그 마음이 닿아 왔다.
“에휴! 심각해지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백무호는 여전히 구김 없는 모습을 보이며 나를 대했다.
나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우릴 습격했던 녀석들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명운표국은 수준이 어땠어?”
“그 정도에 당할 수준은 아니었지.”
그렇긴 할 거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쓰러트린 상대들만 보면 넷이 아니라 열 명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 정도에 무너질 거면 애당초 표국 일은 못 해 먹는다.
“그럼 우리 쪽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명운표국은 진짜배기들이 공격했다는 건가?”
“지금 상황을 반추하면 명운표국은 습격하는 쪽에 비중을 두었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본다면 우리 쪽을 공격해 온 건 그냥 발목잡기 정도였을 거고.”
당장 드러난 부분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로 이야기들이 풀려나간다.
“그럼 우리 쪽도 곧 노리겠네.”
허허실실이라고 했다. 명운표국과 백가표국을 동원해 시선을 끄는 사이 진짜는 다른 곳을 통해서 움직일 거라고.
습격한 자들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으니, 명운표국을 학살한 진짜배기들이 이쪽을 노릴 것이다.
“잡아 둔 녀석들 데려와 봐.”
박살 난 명운표국의 표물들과 시신들을 살펴보던 백진성 아저씨가 돌아와 말했다.
잡아 둔 녀석들. 이전 습격한 녀석들 중 생포해 잡아 두었던, 살아남은 녀석들을 말하는 거다.
목숨은 붙어 있어도 부상이 심해 뒤를 캐거나 하는 심문은 나중에 할 생각이었다는데 백진성 아저씨는 굳이 지금 불러들였다.
이유는 명확했다. 발목잡기 정도로 생각하고 움직인 자들이라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겠지만, 정보가 아예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앞으로의 표행이 빡빡해지겠어.”
험난한 가시밭길을 예고하는 듯한 말이다.
***
생포된 자들 중에는 내가 때려잡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턱뼈를 아작낸다든가 하는 식의 부상은 입혔지만, 숨통을 끊어 놓지는 않았으니까.
“말 못 하는 놈은 필요 없고.”
백진성 아저씨의 검이 움직였다.
턱뼈가 아작났던 인물. 내가 잡았던 자들 중 한 명의 머리가 떨어졌다.
“흐읍!”
“후, 후으웁!”
남아 있는 자들이 기겁을 하며 숨을 골랐다.
반면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죽인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잡은 인물의 목이 떨어지니 그 피가 손에 묻는 기분이 들었다.
그 피를 끼얹은 사람, 백진성 아저씨는 이전에 본 적 없는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복잡하게 묻지 않는다. 알고 있는 거 다 말해. 가장 쓸 만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놈만 살려 주지.”
미리 한 놈의 목을 날려 버린 뒤에 하는 말이라 더 무게감이 있었다.
어쩌면 턱뼈가 아작나서 말을 못 하는 자가 없었어도 본보기로 한 명쯤 목을 치고 시작했을 것 같다.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의리를 벗어던진 이들이 불편한 몸임에도 열성적으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토해낸 정보들에 의하면 이들은 낭인(浪人). 그저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이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다. 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가 그리 쓸모 있는 것이 없으리란 점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다만 예상을 벗어난 것도 있었다.
“중신상회 쪽에 간자(間者)를 심어 두었었다?”
“예! 부, 분명 우리에게 한 말은 아니지만, 그들끼리 말을 나눌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제가 들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쓸 만한 정보를 말했다.
“이상한데…….”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 상황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진성 역시 그 부분을 짚었다.
“간자가 정보를 빼냈다면 이 표행이 허허실실의 책략이란 걸 알았을 텐데?”
미리 이게 허허실실의 계책이란 걸 알았다면 명운표국의 표물들이 죄다 박살 난 것도 모자라 그들의 배까지 갈라 가며 뒤져 댔을 이유가 없다.
다른 것이 더 있는 거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이자가 목숨이 아까워 아무 말이나 지어서 하는 것이든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허의 허인가?]“허의 허?”
갑자기 들려온 장삼풍 사부의 말을 나도 모르게 입에 담아 버렸다.
백진성 아저씨는 내 말에 눈을 번쩍 뜨며 시선을 표물들이 있는 곳으로 돌렸다.
“표물들을 뒤져 봐. 사람 배 속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물건을 숨겨 놓았을 거라 가정하고.”
백진성 아저씨의 말에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표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신들의 배까지 갈라 확인한 흔적들을 통해 대충 어느 정도 크기의 물건을 찾아야 하는지 알게 된 덕분에 탐색은 금방 마무리됐다.
“청자 안쪽에 붙어 있었습니다.”
정일상 표두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백진성 아저씨에게 건넸다.
그 주머니를 열어보니 둥근 옥 하나가 나왔다.
백옥. 그것도 최상급의 옥이다.
옥은 종류와 색상에 따라 가치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옥의 가치를 높게 치는 귀한 조건을 다 갖춘 옥은 매우 희귀해서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할 정도다.
이 정도 물건이면 보기 드문 수준의 보물이다.
“허의 허란 말이지. 써그럴!”
종인걸은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관리였다.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다. 그 빠른 눈치로 내부에서 뭔가 불온한 흐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미끼로 쓰겠다고 앞에 내세웠던 백가표국과 명운표국, 둘 중 하나에 진짜 뇌물로 건넬 물건을 숨겨 놓았다.
그야말로 허의 허. 속임수 안에 속임수를 두었다.
손에 쥔 최상급 백옥을 부숴버릴 듯 꾹 움켜쥔 백진성 아저씨의 입이 나지막하게 열렸다.
“어떻게 할까?”
“계약에 속임수가 있었으니 당장 이 계약을 파기해도 중신상회에선 아무 말도 못 할 겁니다.”
정일상 표두의 말에서 중신상회에 대한 적개심이 묻어났다.
속이고 이용하려 한 대상에게 호감을 품는 것이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백가표국에게는 선택지가 생겼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될 길이 생긴 것이다.
고민하던 백진성 아저씨가 뜬금없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 생각은 어떠냐?”
백진성 아저씨가 의견을 물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편하게 고민을 떠넘겨 버린 백진성 아저씨의 모습에 새삼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넘겨받은 그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명운표국에는 빚이 있으셨다고요?”
“그랬지.”
“그럼 속행하시죠.”
백진성 아저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목을 치고 싶은 놈들이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요.”
백진성 아저씨라면 명운표국에 졌다는 빚이 금전적인 빚은 아닐 거다. 아마 은원(恩怨)이 얽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도 이 일의 원흉은…… 아니, ‘원흉들은’ 더 이상 제삼자가 아니다.
“하하하하!”
백진성 아저씨의 입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하구나.”
짙어지는 웃음이 백진성 아저씨의 얼굴에 걸렸다.
“좋은 무인이 되겠어.”
워낙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한 말이라 그런지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가 세세히 묻고 싶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다들 들었지!”
“예!!”
백진성 아저씨의 외침에 대답하는 백가표국 표사들의 목소리가 뜨거운 국물을 삼킨 것처럼 크고 우렁찼다.
“표행을 속행한다!”
“알겠습니다!”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그 누구도 반대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
오히려 누굴 건드렸는지 보여 주겠다는 느낌이다.
명운표국이 당한 모습을 보고도 위축된 모습들이 아니다.
오히려 피가 끓는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가 돌변했다.
누가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열기가 확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뭔가 책임감이 느껴지는데.”
불을 질러 버린 게 꼭 자신인 것 같아서.
“너 맞잖아, 인마.”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하면 할 말 없고.”
책임감. 그리고 부담감.
모두 무거운 것들이다.
어깨로 무게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나는 무의식중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조금 전 목이 날아갔던 이가 묻힌 피의 질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다.
무게감이 한층 더 어깨 위를 눌렀다.
괜한 걸 생각해 버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의외로 체질인가 봐.”
“뭐가?”
“이 무림인이라는 거.”
겁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
저쪽에서 알아서 찾아올 테니 굳이 흉수를 찾아 움직일 필요가 없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표행을 속행하는 백가표국의 앞에는 그 말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십 명은 되어 보이는 자들. 느껴지는 하나하나의 기량은 이전 습격을 해 온 자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아는 사람인지, 백진성 아저씨가 이름 하나를 입에 담았다.
“상관책. 역시 홍무문이었나.”
“그럼 어디였겠소.”
뒤의 전력을 믿고 있는 건지 느긋하게 대답하는 것이 여유가 넘쳐흐르는 모습이다.
“우리도 백 국주와는 부딪치고 싶지 않소. 백가표국은 명운표국과 다르니. 그러니 서로 피 볼 거 없이 물건만 내어…….”
여유를 부리며 느긋하게 말을 하던 상관책이란 자가 조용히 웃었다.
툭!
웃는 그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 끝내지 못한 말과 함께.
“아쉽게도 나는 은원이 분명한 사람이라.”
백진성 아저씨가 상관책이 끝내지 못한 말의 마무리를 지었다.
상남자시네.
반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니 말 한마디만 떨어져도 기꺼이 몸을 던질 것 같은 분위기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당황한 저들과 달리 이쪽은 확실하게 기세를 탔다.
“쓸어버려!”
달아오른 열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