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4
13화 시작부터 왜 이래?(2)
백가표국에서 보여준 무공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당파의 무공이었다.
무당파의 유(柔).
아직 덜 여물었으나 분명한 무당파의 본질을 드러내 보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앞으로 뛰쳐나가 적을 부셔야 하는 무공이다.
사나운 범처럼 날뛰는 기(技).
무당권만큼 몸에 익숙하진 않지만, 그간 달마 사부가 몸에 새겨 온 가르침만은 생생하다.
소림의 강맹함이 내 몸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경.’
무당권을 펼치는 중은 아니지만 무당권을 펼칠 때의 감각은 여전히 몸에 남아 있다.
순식간에 한 명을 쓰러트린 나는 연이어 달려드는 존재를 읽었다.
박쥐가 사물을 읽는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청경의 감각이 달려드는 상대의 여러 정보를 긁어냈다.
그의 발걸음, 그의 움직임, 하다못해 그의 호흡까지.
그 모든 것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부딪쳐 왔다.
실전이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만이 부딪치는 것이 아니다.
몸이 부딪치기 전,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먼저 부딪쳐 온다.
마음이 부딪쳐 온다.
미움, 적의, 본능.
살의.
한 마디로 뭉뚱그리자면.
‘기세!’
손을 섞기 전에 부딪쳐 오는 모든 것의 총칭을 굳이 따지자면 이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거다.
표국에서 치른 싸움에 이어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힘이 좋아도, 아무리 감각이 뛰어나도 이 무형의 격돌을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기세가 꺾이면 마음이 꺾이고, 마음이 꺾이면 기량을 발휘할 수 없다.
대련에서 붕붕 날아다니는 자가 실전에선 아무것도 못 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지지 않아.’
달마 사부의 따끔한 훈계라면 지금도 기억한다.
수신은 정심에 있다.
실전에 능할 만큼 경험이 깊지 않다는 걸 알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지키며 눈앞의 상대를 똑똑히 보았다.
눈빛이 교차하는 가운데 부딪쳐 오는 마음이 강해졌다.
앞서 나간 동료가 당했다는 점에 화가 났는지 기세를 끌어 올리며 두 손으로 칼을 높게 들어 올린다.
하지만 너무 크다.
기세를 끌어 올린 건 좋았지만 동작이 컸다.
명치 부근이 훤히 비었다.
‘칠 수 있어.’
상대는 당장이라도 칼을 벼락처럼 내려칠 것 같은 자세다.
동작이 크긴 하지만 그만큼 파괴력도 있다는 소리. 저 안으로 파고드는 순간 머리가 쪼개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감각이 말했다.
할 수 있다고.
지금 내 감각은 맑고 투명했다. 실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정신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감각이 외치는 소리가 맞다.
할 수 있다!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 몸이 따른다.
소림권에는 무당권과 다른 것이 있다.
폭발력!
힘차게 튀는 탄력이 하체를 통해 아래로 뻗어나가 대지를 박찼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일보.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보일 만큼 좁혀진 거리에서 경악으로 치켜떠지는 눈이 고스란히 보인다.
뒤늦게 치켜올렸던 칼을 휘둘러 보지만 이미 내 주먹은 명치에 닿아 있다.
퍼억!
“커헉!”
폐를 쥐어짜 입으로 토해내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기역 자로 꺾인 상대의 눈에는 이미 의식이 없다.
그렇게 두 명을 순식간에 물리친 내가 주변을 훑자 가까운 곳에 남아 있는 두 명의 적이 달려들던 몸을 멈칫 세웠다.
그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멈춰 선다.
‘쫄았네.’
기세가 꺾였을 때, 마음이 흐트러졌을 때 보이는 모습이다.
내가 더 강하다는 것을 보이고 증명했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광경.
나도 남동박이란 표사와 겨룰 때 마음이 흐트러졌던 일이 있었기에 저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나 꼴사나웠는지도.
장삼풍 사부가 괜히 호되게 야단친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더 우월하다.
흥이 솟구친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각이 전신을 질주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앞서 뛰쳐나간 순간.
[미숙하긴!]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장삼풍 사부의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 닿았다.
거침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던 내 발목을 잡는다.
기본적으로 장삼풍 사부나 달마 사부는 어느 순간에 어떤 초식을 구사하라는 식의 훈수는 하지 않는다.
처음 장삼풍 사부에게 훈수를 받았을 때와 달리 이후로는 그런 일이 아예 없었다. 그저 대략적인 흐름을 짚는 정도나 이야기하실 뿐이다.
저런 식으로 말했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무엇이 문제인지 즉각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 하나의 목소리가 멈춘 사고를 일깨웠다.
“너무 튀어 나가지 마! 진형이 무너지잖아!”
백무호의 외침.
날 선 감각으로 주변을 넓게 감지할 수 있는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문제를 파악했다.
습격이 가해지고 있는 곳은 내가 막고 있는 이곳만이 아니다. 사방에서 공격이 이뤄지고 있었다.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라면 뒤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진형 대 진형으로 맞부딪쳤다면 내가 홀로 상대의 진형을 헤집었을 때 다른 동료들이 그 구멍을 더욱 크게 벌려 일거에 적을 분단시켜 소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표물이 있다. 내가 지나치게 튀어 나가면 나를 받쳐 주기 위해 다른 이들도 함께 나와야 하고, 이는 표물에 대한 방어가 약해짐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런 싸움에서는 전체적인 판을 읽어야 한다.
이런 경험이 없는 내게는 다소 낯선 개념이었다.
[주먹을 보려 하면 주먹만 보이고, 움직임을 보려 하면 움직임이 보이게 되느니. 상황을 보려 하면 상황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넓게 보고 깊이 살펴라. 스스로 시야와 사고에 사각(死角)을 만들지 말거라.]장삼풍 사부가 문제를 지적했다면 달마 사부는 내 부족한 부분을 꼬집어 조언해 주셨다.
머릿속에 깊이 새겨둘 내용이다.
어느 부분이 문제였는지 보인다.
‘뒤로.’
확실히 표국의 최우선 목표는 표물의 보호다.
활과 같은 무기를 활용하는 이가 없는 상황이라면 굳이 튀어 나가서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필요는 없다.
일단 물러선다.
그런데 이게 의외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물러서는 내 움직임을 보며 습격자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료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확실히 뒤로 물러서는 나를 조금만 더 밀어내면 가능할 일이긴 했다.
“하압!”
“흐앗!”
기세를 높이며 달려드는 둘.
처음 보였던 저돌적인 파괴력은 앞으로 튀어 나갈 때나 나오는 것이다. 뒤로 물러설 때는 강맹한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후웅!
퍽!
물러서는 나를 더욱 밀어내기 위해 휘두른 칼질을 비스듬히 흘려낸 나는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경은 아직까지 맑은 호수처럼 명확했다.
습격자들이 간과한 부분.
내가 자랑하는 무공은 소림권만이 아니라는 거다.
소림권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수련한 무당권이 펼쳐졌다.
강맹한 맛은 없지만, 상대의 공격을 이용하는 차력미기(借力彌氣), 사량발천근(四兩拨千斤)의 재간이라면 물러나는 와중에도 얼마든지 선공을 가해 오는 자를 잡아먹을 수 있다.
간단하게 한 명을 낚아채 바닥에 내려찍어 버린 뒤 다음으로 연거푸 공격해오는 이를 보며 웃었다.
이미 출수한 검 끝이 매섭게 허공을 가르는 순간.
휙!
퍽!
그의 몸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내려꽂혔다.
앞으로 튀어 나갈 때는 소림권.
뒤로 물러설 때는 무당권.
공수(攻守)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물러나는 내게 잡아먹히는 적들을 보며 백무호가 혀를 찼다.
“칼질 저렇게 하는 거 아닌데…….”
“뭐래.”
굳이 물러나라 하지 않고 가만 놔뒀어도 그냥 다 털어 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나 보다.
변명처럼 투덜거리며 혀를 차고 하는 백무호의 말에 나도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
백진성은 시야를 넓게 잡는 것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백가표국의 국주로서 표행을 이끄는 위치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넓은 관점으로 상황을 살피는 눈을 갖게 되었다.
유능한 지휘자라면 자연스럽게 갖추게 되는 능력이다.
촤악!
일 검에 사람을 둘로 나눠 버리는 검격.
그냥 슬쩍 긋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가벼운 검격에 실린 힘은 강맹했다.
검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간단하게 눈앞의 적을 쪼개 버린 백진성이 혀를 찼다.
“벌써부터 난리군. 명운표국이 괜히 손을 벌린 게 아니야. 까다로운 일을 맡아 버렸어.”
과거의 은원이 아니었다면 받지 않았을 의뢰.
은원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받긴 했으나, 역시나 성가신 일이 되었다며 백진성이 재차 혀를 찼다.
“그나저나, 자네도 봤나?”
백진성은 옆에 있는 정일상 표두에게 물었다.
“청운이 말이시죠.”
“괘씸하게 뒤에서 손 놓고, 친구 녀석 무공이나 주시하고 있던 약은 녀석을 묻는 건 당연히 아니지.”
백무호를 돌려 까는 백진성의 말에 정일상 표두가 검을 허공에 휘둘러 피를 털어내곤 소리 없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백진성이 없을 때는 표행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표두이기에 정일상 역시 시야가 꽤 넓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백진성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백무호가 꽤나 연청운을 눈여겨본다는 거다.
“무호가 청운이의 무공에 흥미가 많은 것 같습니다.”
“뭔가 끌리는 게 있으니까. 솔직히 나도 흥미가 동하고 있다네.”
“국주님까지?”
정일상 표두는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백진성은 일개 표국의 국주이긴 하지만 그의 무공은 일개 표국의 국주로 취급할 수 없는 수준이다. 화산파의 속가제자라는 말조차 그를 낮추는 허울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이니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그 가문과도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이고.
정일상 표두의 놀라움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백진성의 중얼거림이 작게 흘러나왔다.
“소림이라…….”
천하공부출소림.
천하의 무공은 모두 소림에서 나왔다.
소림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소림의 무공은 그 특징이 잘 알려져 있다.
무당권 못지않게 그 특징이 잘 드러나는 무공이란 소리다. 어떻게 보면 무당권 이상으로 그 특징이 뚜렷하다.
무당파에서 쫓겨난 아이가 무당권을 깊이 있게 구사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소림권을 구사하는 것은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혹시…….”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해보는 가운데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다는 듯 백진성이 말끝을 흐리며 어떤 추론을 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천상과 이어져 장삼풍 진인과 달마대사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받고 있다는 생각일 가능성은 조금도 없으니 오해일 뿐인 추론이 되겠지만.
***
한 차례 습격을 받은 이후 백진성은 표행의 속도를 높였다.
어영부영하다가는 추가 공격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짐마차 위에 걸터앉아 있던 엉덩이가 수난을 겪어야 했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때마다 청명심법의 호흡이 올라와 진탕되는 속을 다독여 주었다.
그런 나를 이따금 백무호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달리는 짐마차를 경험해 본 적 없으면 슬슬 쏟을 때도 됐는데?”
“……너 이따가 따라와.”
이놈이 덜 맞았구나.
이놈은 왜 자꾸 매를 버는 걸까.
이번엔 어떻게 메다꽂아 주는 것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청운아. 마음 단단히 먹어라.] [허! 세상은 여전히 혼란하구나.]갑자기 두 분 사부님이 이상한 소리를 하신다.
이 앞에 끔찍한 광경이라도 펼쳐져 있다는 것처럼.
사람이 죽는 광경 정도야 이미 본 일이 있다.
대체 앞에 무엇이 있기에?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후우…….”
잠시 뒤 펼쳐진 눈앞의 광경에 나는 숨을 깊게 내쉬며 가다듬어야 했다.
청명심법의 호흡이 다시 한번 나를 도왔다.
이번엔 진짜 쏟을 뻔했다.
그 정도의 참상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부서진 짐마차들과 그 마차에 꽂힌 깃대 위로 외로이 펄럭이고 있는 명운(明運)이란 글자가 수놓아진 깃발.
그 깃발 아래로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멀쩡한 시체는 단 하나도 없다. 대부분 몸통이 파헤쳐져 있다.
배를 가르고 장기를 뽑았다는 이야기다.
배 속까지 뒤져 봤다는 뜻이다.
무림의 잔혹한 일면. 살기 가득한 일면이 무림초출인 내 앞에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