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70
169화 녹림 속의 마(魔)
[내 차례군.]머릿속에서 천마 사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제일 껄끄러운 분이 튀어나오셨다.
뭐, 현 상황에서는 가장 적절한 분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화야?”
“예.”
“혹시 저 사람 아니?”
외모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이화에게 남성적인 면을 더한 뒤, 연령을 높여서 수염을 붙이면 딱 저 사람이 될 것 같다.
둘이서 시장 같은 곳을 돌아다니게 하면 부녀(父女)가 찰떡처럼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을 정도다.
그렇기에 혹시 혈연지간이 아닌가 싶어서 확인한 것이었다.
이화의 대답은 깔끔했다.
“저 열 번 태워 죽여도 모자랄 참칭자(僭稱者)를 말씀하시는지요?”
“……일단 모르는 사람이라고 알아들을게.”
이것도 대답이라면 대답이랄 수 있다.
‘부녀지간은 아니라는 건데…….’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로 닮았다면 아주 무관한 관계는 아니지 싶다.
하지만 그런 판단이 머릿속에 들어올 여유가 없을 정도로 이화는 빡쳐 있었다.
이 정도로 분노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냥 내버려두면 눈앞의 중년인과 함께 천자산을 통째로 태워버릴 것 같았다.
[흐음! 교육이 잘된 아이구나.]‘아우, 머리야…….’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머리가 아파왔다. 안팎으로 보이지 않는 창이 날아와 머리에 박히는 느낌이다.
서둘러 수습하지 않으면 정신건강에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요?”
“저 아이도 따라오나?”
“아마도?”
“다행이군. 버릇을 고쳐줄 수 있겠어.”
버릇이 고쳐지는 쪽은 누굴까?
[……따르겠습니다.]뒤에서 무척이나 빡친 종 노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교육 당할 쪽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이 자칭 천마와의 대화는 민감한 이야기가 오갈 수밖에 없다 보니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현재 천자산에는 워낙 산적들이 바글바글한 상황이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지만, 다행히 산채 바깥으로 몸을 빼낼 개구멍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협의된 암묵적인 개구멍이랄까?
반골정신에 투철한 녹림 도적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만큼 이런 것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아 바로 납득을 했다.
안 그래도 그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가자 이리저리 오다니는 산적들이 있었다.
이럴 거면 대문은 왜 만들고, 개구멍은 왜 만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서 조달해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큼지막한 술독을 들쳐 메고 올라오는 산적들과 마주할 때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인근에 민가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어딘가의 상인과 계약을 맺고 구매해 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상인들 입장에서 보면 나름 거대한 수요를 지닌 시장이라는 느낌이려나?’
술에 환장하는 사내들이 바글바글한 곳이다.
기존에 비축해 놓은 술이 있다고 해도 금방 동이 날 테니 밀주를 주력으로 하는 상인이라면 군침이 돌 만한 시장이긴 하다.
그 외에도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공급한다면 상당한 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녹림이라면 산적질로 쌓아 놓은 재물이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전과 신용이 문제이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물량을 공급하는 상인이라면 산적들도 공격할 이유가 없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확실히 녹림들을 고객으로 하는 암상(暗商)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정도로 성황을 이룰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술을 찾는 녹림 도적의 방탕함도 대단하지만, 돈이 된다 싶으면 일단 뛰어들고 보는 상인들도 대단하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설명 좀 해주시죠.”
멀리 자리를 옮기는 가운데 나는 천마 사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대충 예상한 거 아니냐?]“그래도 직접 듣는 쪽이 명확하니까요.”
[흥! 내가 마인들 튀기고 다닌다는 건 알고 있을 거다.]“예.”
[어디서 뭘 하다 뒤졌는지 족치다 보면 싫어도 신교의 근황에 대해선 귀에 들어오지. 쓸데없이 세세할 정도로.]천마 사부가 이 자칭 천마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유일 거다.
이 자칭 천마가 천마 사부의 관심을 사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내 핏줄 맞다. 굳이 따진다면 먼 방계에 속하는 녀석이지만.]“역시나.”
기가 막힌 이야기다. 중원에 천마의 혈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까.
“이쯤이 좋겠군.”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으슥한 곳에 다다랐을 즘 자칭 천마 양반이 발걸음을 멈췄다.
“신교에서 왔나?”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 질문에 나는 팔짱을 끼며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생각해 봤다.
‘일단은 맞춰줄까.’
“그렇다면?”
“내 뜻은 이미 전했다. 나를 따라라.”
‘음?’
갑자기 말에 무게가 실리는 느낌이다.
가슴에 직접적으로 닿아오는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위압감?’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각이다.
이 압박감은 단순히 사람의 본질적인 존재감 같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무공이라는 것 같다.
‘사람을 누르는 존재감이라…….’
마교에 남겨진 천마 사부의 무공 중에는 이런 것도 있는 모양이다.
[뭘 신기해하고 있느냐? 네 녀석도 그간 알게 모르게 써먹어 온 주제에.]“제가요?”
[왜 종극이라는 놈이나, 가당찮게 신교 최정예라 떠드는 잡것들이 네 말에 죽고 못 사는 꼴을 보이겠느냐. 천마무겁수는 현 지상에서 보면 모든 마공의 원류이자 정점이다. 본질적으로 마 위에 군림하는 힘이다. 그 힘을 느꼈기 때문이지. 마에 닿아 마를 이룬 네 본질의 격은 저 팔푼이보다 위란 말이다.]‘……그랬나?’
그저 막연히 내가 진짜 천마 사부의 맥을 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을 뿐인데, 이런 식의 재주를 나도 무의식중에 쓰는 모양이다.
‘이런 압박감을 주변에 준다?’
나쁘지 않다. 특히 마교 출신의 마인들에게 유효하다는 것 같다.
[개념적으로 설명하자면 의지로 마음을 누르는 힘이다. 따지고 보면 네 녀석이 더 능숙하겠지. 너는 삼풍이 녀석의 ‘그것’을 중단전에 장착한 상태니까. 제대로 활용하는 법만 알면 단순히 누군가를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미쳐 발광하게 만들 수 있다.]“그게 됩니까?”
[멍청한 녀석. 무공이 강하다는 것과 심기가 굳건하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아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덩치가 산만 한 거한이라고 해서 모두 자신만만하고 용기가 가득하진 않다.
개중에는 심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도 있다.
간단히 풀자면 마음이 약한 사람을 잡아먹는 수법이라는 거다.
본질적으로 마도의 원류인 천마 사부의 무공은 여타 마인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어지간하면 상대를 굴복시키기 용의하다는 의미다.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니 통성명을 하기 전부터 너무 몰아세운 것 같군.”
상대의 수법이 무언지 알게 된 차에 갑자기 가슴 한편을 누르던 묵직함이 사라졌다.
나는 천마 사부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멋대로 착각하고 앉았다.
당연히 이화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거 불만 없이 수습하려면 잘 설득해야겠는데.’
보아하니 이 자칭 천마 양반도 녹림칠십이채의 채주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쓸모가 있다.
왜 천마 사부가 여길 오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 양반을 내세워 녹림을 재편한다면?’
가능하다면 충분히 유요한 패가 되어줄 수 있다.
“이경천이다. 잘 기억해 두도록.”
“…….”
“너무 굳을 것 없다. 나는 관대한 사람이니까.”
꽤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강한 사람이다.
천마 사부의 혈족인 데다 나름 한 세력을 이끄는 입장이니 이상할 것은 없다.
“신교는 여전히 혼란스러운가?”
“……알고 있습니까?”
“천마의 일족인 나의 웃어른들께서 왜 신교를 나왔겠는가. 불온한 자들의 수작으로 신공이 불완전해졌다는 흔적을 발견했을 때 이미 조부께서는 미래를 예견하셨다.”
이화가 이 자칭 천마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을 보고 꽤나 오래전 마교를 떠났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조부까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짐작대로 제법 오래전에 마교를 떠났다는 의미다.
‘마교 내에선 힘을 쓰기 힘들 것 같으니 외부로 피했다는 거겠지? 힘을 기르기 위해서. 세상의 눈을 피해야 하니 녹림 산채 하나를 점거한 거고. 그렇게 기반을 마련한 상황에서 불완전해졌다는 천마신공을 다시 다듬어보려 했나 보네.’
조금씩 이야기가 맞춰지는 것 같다.
“낮에 천자산을 뒤흔든 마기는 놀라웠다. 그와 같은 고수조차 신교를 뛰쳐나올 정도라면 어떤 꼴일지 짐작이 가는구나.”
“나를 부른 이유가 그것입니까?”
“맞다. 그 마기의 주인이 너는 아닌 것 같지만, 너와 연관이 있는 자임은 틀림없을 터. 너는 그를 설득하거라. 그리한다면 권토중래하여 다시 마교로 돌아갔을 때 내 너를 중히 써 줄 것인 즉.”
아무래도 자칭 천마 이경천은 낮에 느낀 그 마기에 크게 놀랐던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주변에 따라와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녹림의 대통합을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기반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종 노인까지 휘하에 두고? 꿈은 크네.’
이경천이란 자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
‘화나 있는 이화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바로 박살 내는 건 취소다.’
제압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녹림칠십이채의 채주라면 일신의 무력이 범상치 않을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몇 대에 걸쳐 불완전한 천마신공을 다듬어왔다면 무시할 수 없는 고수가 되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종 노인의 상대는 아니다.
‘천천히 감화시킬 필요가 있어.’
이자의 현 신분과 야망, 이곳의 특수성, 우리의 위치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본다면 지금 당장 때려잡아 무릎을 꿇리는 것은 하책이다.
오히려 더 귀찮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상의해 보도록 하죠.”
“뭐, 좋다. 바로 답을 주지 않음은 괘씸하지만, 오늘 내가 한 무례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지.”
[별 지랄을 다 보겠군.]아무래도 천마 사부는 무게 잡는 이경천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좋네.’
갑자기 이 양반이 마음에 든다. 어딘가 헛바람이 들어간 것 같은 이 태도까지도.
“아!”
그러다 한 가지 제대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이라. 당돌하군.”
당돌은 무슨. 마음에 든다는 거 취소다.
이 작자, 벌써 나를 아랫사람 취급이다.
‘확 뚝배기를 깨 버려서 천마 사부께 배송시켜 버릴까? 천마 사부 반응을 보니 잘 튀겨줄 것 같은데.’
치밀어 오르는 마음의 어둠을 간신히 억눌렀다.
“혹시 이번 녹림의 대화합에 수상한 사람들이 접근해 온 적이 없습니까?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자들이라든가.”
“수상한 자들이라…….”
이경천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그건 내 휘하에 들어오면 대답해주지.”
그리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그 말을 끝으로 이경천의 신형이 사라졌다.
“허! 뒤끝 쩌네.”
포부도 실력도 있는 것 같은데, 대범한 척하는 행동에 비해 어딘가 좀스럽다.
지금까지의 언행 모두가 꾸며진 것 같달까.
‘천마 사부랑 딱 일 년 정도만 연결해 주고 싶어지는 작자일세.’
어설픈 거품이 싹 빠질 거다.
[뭔가 같잖은 수작을 떠올리는 얼굴이군.]‘그래, 이런 거.’
“……아니, 제가 뭘.”
[흥! 장삼풍과 달마만이 네 녀석을 지켜본 건 아니다.]뭔가 당황스럽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나 돌아봐라. 멍청한 녀석.]“……!”
천마 사부의 말에 돌연 등 뒤로 기척 하나가 새롭게 느껴졌다.
“산책을 참 멀리까지 나오는 것 같네.”
귓가로 설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