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69
268화 용왕의 분노(1)
사연 없는 인생은 없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도 한다.
하물며 수적이 되었을 정도의 삶이라면 인생의 불공평함을 토로하는 것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지새울 수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것이 당연하다.
춘삼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춥고 배고픈 어부의 삶과 배부르고 등 따신 수적으로서의 삶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혹자는 인생을 되돌릴 수 없는 도박판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춘삼은 그 도박판에서 지는 일이 많았기에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래도 요즘은 이기는 일이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도적 연맹이 장강을 차지했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성가시고 짜증 나는 관이 소 닭 보듯 넘어가고 있다.
이대로 잘만 흘러간다면 조장들의 말처럼 인생이 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공을 쌓고, 실력을 쌓다 보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방금까진 그리 생각했다.
“뭐야, 저거……?!”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감 없는 것을 목도하기까지는.
저 멀리서 거대한 것이 몰려오고 있었다.
“배, 배를 돌려야 하지 않아?”
“어느 세월에!!”
열댓 명 정도나 탈 수 있는 작은 배도 물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하물며 지금 장강수로채의 수적들이 타고 있는 배들은 대부분 크고 웅장한 전선(戰船)들이다.
열심히 방향을 돌려 봐야 강기슭에 다다르기도 전에 지금 몰려오고 있는 것에게 덮쳐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무의미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노가 안 움직여!!”
어떻게든 배를 움직여 보려던 수적들이 절망에 빠져 비명을 질러댔다.
출렁이기 시작한 장강의 물결이 거칠게 배의 측면을 때리며 선박의 제어권을 박탈했다.
통제 불능에 빠진 선박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콰앙!
“으아악!”
“사, 살려 줘!!”
이리저리 갈대처럼 휘둘리던 작은 선박이 옆에 있던 대선의 옆구리에 충돌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이미 전장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물이 이상해! 이건, 이건 정상이 아니야!!”
누군가의 외침에 춘삼 역시 장강의 수면을 주시했다.
정말이었다.
물의 흐름이 평상시와 달랐다.
“뭔가 있어…… 뭔가 있다고! X발!! 물 밑에 뭔가 있다고!!!”
아무리 날씨가 미쳐 격랑이 치는 와중이라도 물의 흐름이란 일정한 형태를 반복하는 법이다.
그 흐름을 읽어낸다면 폭풍우 속에서도 구사일생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미쳐 날뛰는 장강은 달랐다.
마치 누군가가 수조에 손을 담그고 크게 휘젓는 것 같다.
아니, 힘껏 허리와 꼬리를 흔들며 요동치는 무언가가 물 밑에 있는 것 같았다.
춘삼은 등줄기를 관통하는 공포를 느꼈다.
정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자 상식 밖의 무언가가 장강 아래에서 날뛰고 있는 것 같았다.
크고 거대한, 인간 따윈 벌레마냥 짓밟을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
“용왕님…… 용왕님이야…… 용왕님이 노하셨어! 우린 전부 여기서 뒈질 거……!”
서걱!
공황(恐惶) 상태에 빠져 횡설수설하던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순간, 목이 잘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려던 수적의 머리통이 장강 수면 위로 내던져졌다.
“지금부터 헛소리하는 놈들은 이렇게 된다!”
배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통제 불능이 되기 전에 선장이 칼을 휘두른 것이다.
“이 배는 튼튼하다! 투석기에 맞아도 멀쩡한 놈이야! 아무리 큰 격랑이라도 버틸 수 있어! 꽉 잡아! 꽉 잡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선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수적들의 혼란을 수습했다.
“오대세가 새끼들도 꼼짝 못 할 거다. 저 새끼들은 배도 없어! 그러니 버텨라! 버티기만 하면……?!”
하지만 그 누구도 선장의 말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저 장강 상류 너머를 말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선장 역시 그곳을 바라본 순간 말끝이 흐려졌다.
“……버티기만 하면… 그러면… 그러…….”
눈앞에서 펼쳐진 악몽 같은 모습에 선장의 말이 묻혔다.
가까스로 버텨내던 의지가 단박에 꺾여나간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수면이 위로 치솟았다.
거대한 전선을 한입에 삼켜버릴 것 같은 물기둥이 밀려왔다.
“있을 수 없어…… 이런 일은…….”
십수 년간 장강에서 수적질을 해온 선장조차 넋이 나갔다.
다른 수적들의 상태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용왕님이 노하셨어…….”
콰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격랑이 배를 집어삼켰다.
***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몰아쳤다.
마치 수천 마리의 야생마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저 위에 오르라고요?”
[쫄리냐?]“……안 쫄리는 게 이상할 것 같은데요?”
본의 아니게(?) 장강 수면 위에 서 있던 나의 다음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 미쳐 날뛰는 물 위에 올라타는 것이다.
물이 어두운 황톳빛이라 그런지 산사태가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엄두가 안 난다.
미친 짓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하지만 장삼풍 사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재미있겠는데 왜?]“와아…….”
자기 일 아니라고, 말하는 것 좀 보소!
저는 두 발로 땅을 걷는 사람이지 말입니다?
[얼른 안 올라타면 더 재미있어질걸?]“어휴!”
뒈지기 싫으면 올라타긴 해야 할 것 같다.
탓!
수면을 박차고 위로 솟구친 순간, 내가 있던 곳으로 거대한 것이 지나간다.
발밑으로 지나가는 물길을 보니 다리 사이에서 솟구치는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헤집었다.
“집중하자…….”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날뛰는 수면 위에 올라탔다.
“으아아아아…….”
평온한 수면 위를 등평도수로 달리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다.
날뛰는 야생마 위에 고삐 하나 없이 몸을 올린 느낌이다.
몸의 균형이 제멋대로 논다.
위아래로 정신없이 몸이 오간다.
천지사방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지면 이 거대한 흐름에 집어 삼켜질 것 같다.
그렇게 버텼다.
정신을 집중하니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정도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장삼풍 사부가 훈수를 두시며 정신을 사납게 한다.
[대라조화심결은 어따 팔아먹었냐?]“아니, 쫌!”
몸 하나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필사적인 상황에서 대라조화심결로 장강의 격량을 한층 더 북돋으라 주문하신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못 하겠냐?]“그으…….”
[뭐, 그럼 어쩔 수 없고.]“아니…….”
“아! 해요! 합니다! 한다고요!!”
이대론 울화통이 먼저 터질 것 같다.
폭우와 격랑으로 인해 귀가 먹먹한데도 머릿속에 직접 때려 박히는 장삼풍 사부의 목소리만큼은 뚜렷하게 들려왔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대라조화심결의 흐름이 장강의 거센 격류에 닿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낼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대라조화심결을 펼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고의 수련일지도 모르겠다.
그 정신없는 자리에 내던져진 나야 죽을 맛이지만.
하지만 가르치는 것이 사부님들의 몫이라면,
행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까라면 까야지!’
콰아아아아!!
대라조화심결에 자극받은 격류가 크게 요동쳤다.
직접 맞닿아 있기에 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된다!
염병할, 이게 된다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 번, 세 번, 네 번…… 작은 힘이지만 그 시도가 반복될 때마다 요동이 점차 커져 가며 힘을 키워나간다.
그사이 벌써 도적 연맹 전선들의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저 새끼들 때문에 이 미친 짓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이빨이 절로 갈린다.
사람이란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것이 예의이자 범절이다.
이를 악물고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심정으로 힘을 집중한다.
내가 키워낸 요동이 마침내 터질 듯 치솟는다.
그 순간 눈높이가 달라진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하게 일어난 격랑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벌레같이 바글바글한 것들이 내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니들 때문에 이게 뭔 꼴이냐고!!’
짙은 부유감과 함께 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다 뒈져라, 십장생드라아아아아아아아!!”
배를 덮치는 폭류 위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며 커다란 배의 중심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가가가가!
집채보다 큰 거함이 반으로 두 동강이 나며 폭류에 휩쓸렸다.
***
도적 연맹의 배들이 폭류에 쓸려나가고 있다.
위풍당당하게 도열해 있던 도적 연맹의 전선들이 걸레짝이 되었다.
게다가 그 폭류는 인접해 있는 지역까지 휩쓸었다. 장강 변에 진을 치고 있던 도적 연맹 역시 날벼락을 맞았다.
미쳐 날뛰는 격류는 게걸스럽게 닿아오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세상에…….”
“와아…… 이게 되네…….”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오대세가 연합은 어이가 가출하는 순간을 공유했다.
전율이 일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품어야 할 위대한 자연에 대한 외경이 절로 솟구쳤다.
“연 소협은…… 이럴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누군가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이레 안에 도착해야 한다며 강행군을 이끌었다.
호언장담(好言壯談)과는 달리 화창하기만 한 하늘을 보며 이번만은 연청운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강행군에 고생했던 이들은 적잖게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혹시나 연 소협이 비구름을 부른 거 아닌가?”
“허허허…….”
두려움을 넘어 경외감마저 들었다.
저런 걸 사람이 부린다고?
하지만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못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몰려오다니.
단순한 자연현상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장강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남궁세가마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러자 모두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비바람을 부르고 벼락을 다스리는 존재.
“용왕님이 노하신 것 같군.”
저 무지막지한 먹구름 사이에서 번뜩이는 푸른 뇌광이 당장이라도 벼락이 되어 떨어질 것 같다.
괜히 불경한 말을 했다가 저 꼴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그런 가운데 팽철이 칼을 뽑아 들며 외쳤다.
“후딱 갑시다!”
비가 오면 들이치라 했다.
이렇게 노닥거릴 새가 없다.
“용왕께서 잔소리할라.”
팽철이 농담조로 말했지만, 누구도 그 말에 웃지를 못했다.
***
오대세가 연합과 달리 이화는 아쉬웠다.
천마께서 역사하심의 순간이다.
이 위대한 순간을 평소처럼 바로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아쉬움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님을 알기에 이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들 보았을 것입니다!”
이화의 말이 주변에 모여 있는 녹림마인들에게 닿았다.
녹림마인들은 차마 소리 내지 못했다.
경외, 경외 그리고 경외.
인세에 강림한 신을 접견한 모습이다.
광신이 극에 다다른 신도들이 복받치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분을 따라야 할 순간입니다!”
이화가 그런 그들의 감정이 향해야 할 방향을 잡아 주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누구보다 간절한 자들이 몸을 던지며 선두에 서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