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81
280화 농담이라고 해주세요
육영기가 쓴 수법을 확인한 나는 허도진인을 살폈다.
잔뜩 화가 나 있는 모습이시기는 하다.
하지만 노기를 억누르시며 자리를 지키고만 계신다.
‘바로 손을 쓰실 생각은 아닌가 보네.’
당장 육영기가 무당파 무공의 파훼법을 쓴 것을 공개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덮고 넘어갈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한 결정권을 무당파에 넘긴 것이다.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
육영기를 잡으려면 당장 잡을 수 있다.
구파가 왜 모였는가?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파훼법을 구사하는 자들에게 공격받았다.
그 때문에 화산파 장문인이 귀천하시기까지 했다.
그런데 종남파 장로인 육영기가 그 파훼법을 썼다.
무당파 무공에 정통한 사람이나 알아볼 수 있을 수이긴 했지만, 구파 장로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펼친 이상 강하게 추궁한다면 몰아붙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종남파에서 꼬리 자르기를 한다면 더 밀어붙일 방도가 없다.
종남파에서 육영기 개인의 일탈로 몰아간다면 이야기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빌미로 종남파 전체에 혐의를 둔다면 종남파에서는 사문에 대한 모독으로 자존심을 앞세우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내부 분란이 커지게 된다면 수습은 불가능해진다.
당영진이 청성파 제자였던 사공패를 꾀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른 구파 내부에도 간자가 심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내부 분란이 본격화되었을 때 간자들이 흔들어댄다면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될 것이다.
학이 바라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뜩이나 학이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시작한 상황이다.
내부 분란으로 발목을 잡혔다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어진다.
그런 점에서 허도진인의 판단은 납득할 수 있다.
내부 분란 따위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증좌를 잡아 발본색원(拔本塞源)한다.
그것을 위해 지금은 일단 넘어가는 것이다.
“더 하시겠습니까?”
“……급살 맞을 새끼.”
슬슬 이성이 돌아오는지 육영기는 저주 같은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도망치듯 훌쩍 회의실을 나섰다.
***
실력과 배분(?) 모두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 나는 구파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 당당하게 자리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분위기는 호의적이었다.
육영기가 워낙 추한 꼴을 보인 상황이라 그런지 그를 까면서 자연스레 나를 환영하는 느낌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후배의 명성이 천하를 흔드는 이유를 알겠다. 아, 이런! 후배라 부르기엔 배분이 높으신가?”
특히 공동파 장로분이 내게 꽤나 호의적이셨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또래 친구마냥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실수인 척 말하지만, 일부러라는 것이 훤히 느껴진다.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성격이 보이는 것 같다.
“후배가 맞지요.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하하하! 그럼 후배라 함세.”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개족보가 맞다.
사실상 명분을 만들어주시기 위해 무당과 소림에서 배려를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설령 명분이 아니라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배분 따지며 건방 떠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는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불편한 부분을 도려내니 한층 더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그런 가운데 허도진인께서 다가오셨다.
“청운아.”
허도진인의 부름은 친손자를 부르는 것처럼 다정했다.
꿀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것 같다.
무슨 말을 꺼내시려고 저리 달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공손히 말을 받았다.
“예, 사조님.”
“네가 무당파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해보겠느냐?”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다.
제법 민감한 내용이기도 해서 나는 잠시 허도진인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이야기해도 되는 겁니까?’
어떻게 보면 무당파의 위명에 흠이 날 수도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허도진인의 따뜻한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라는 시선에 고민을 하던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기본공 일부와 태극권 그리고 팔자진결을 배웠습니다.”
“그뿐이더냐?”
“예. 저는 속가제자였으니까요.”
무당파에서 배운 건 정말 저게 다다.
진짜는 장삼풍 사부에게 배웠으니까.
“허어?”
“이게 무슨…….”
내 대답에 기함하는 외침이 튀어나왔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 중에서는 내가 무당과 소림에서 손잡고 비밀리에 키워낸 기재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지만, 무림에서는 거의 정설로 굳어진 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 대답은 그 소문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후배는 그게 사실인가?”
장난을 걸어오던 공동파 장로가 당황스럽다는 듯 확인을 했다.
“도적(道籍)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도명(道名)조차 받지 못한 몸입니다.”
“허! 허허…….”
방금 내가 펼친 무당파 무공을 보았으니 더욱 믿기 힘들 것이다.
이해는 된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장삼풍 사부에게 배웠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도가 느껴지는 허도진인의 물음에 나는 일단 장단을 맞췄다.
역시나 원하는 대답이었는지 흡족한 허도진인의 웃음이 짙어졌다.
“씨앗은 무당파가 심었으나, 스스로 깨우친 아이이니 천고의 기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네. 세간에 퍼지기 시작한 무종(武宗)이란 별호가 어찌 나왔겠는가.”
무종이란 별호를 부각시킨다.
그것을 위해 무당파의 치부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셨다.
“무당파는 네게 죄가 많다. 그럼에도 네게 청할 수밖에 없구나.”
무엇을 위해 이리 말씀하신단 말인가!
그 끝을 헤아릴 수 있기에 나는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제 뿌리가 무당파에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말씀하시면 따르겠습니다.”
“고맙구나.”
허도진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네가 스스로 터득한 깨달음을 무당에 나눠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 내가 바라던 바이기도 한 이야기가 나왔다.
구파의 무공을 바르게 다잡는 일.
천상의 사부님들께 무공을 배울 당시 스스로 목표했던 일이기도 했다.
‘스스로 터득했다는 평가는 감당하기 어렵지만.’
“기꺼이 나누겠습니다.”
“그래,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허도진인이 포권을 쥐며 감사를 표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구파의 명숙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들이다.
“기본공만으로 저만한 경지에 올랐다고? 허허… 허허허…….”
“허도진인께서 파훼법에 대한 대책이라 하실 만하구나.”
하지만 이내 눈들을 빛내며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에 의해 구파 무공의 파훼법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구파 무공은 강하나, 동수의 고수를 상대로는 불리함을 떠안고 싸울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대책과 해답이 눈앞에 있음을 깨달은 모습들이었다.
***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오간 뒤에 나는 그 자리에서 나와 거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이 커졌네.”
어렴풋이 예상했고, 기대하기도 했던 일이긴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고 보니 생각 이상으로 큰일일 수밖에 없다.
“구파 다른 어르신들도 곧장 달려들 기세였고…….”
무당파 무공의 진의를 전수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소림까지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 외 다른 문파들이라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 동네 무공이 어떤 것이 있다고 ‘들어는’ 봤지만, 실질적인 것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으으으음…….”
아무리 고민해 봐도 결국 답은 하나다.
구파 명숙들이 모인 자리에서 얼굴에 실컷 금칠을 당하긴 했지만, 이건 나 혼자 해결해볼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없지?”
주변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사부님, 계세요?”
믿을 건 사부님들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평소 같으면 바로 대답이 왔을 텐데 감감무소식이다.
‘현천궁이란 곳의 문제가 그렇게 큰일인가?’
현천궁이란 말을 언급하신 이후론 사부님들의 연락이 뚝 끊어졌다.
그만큼 골치 아픈 일일지도 모르겠다.
저 대단하신 천상의 사부님들께서 쉬이 언급하지 않으려 하시는 골치 아픈 문제라니!
어느 정도의 사안인지 감도 안 잡힌다.
“쩝! 그게 다 일거리겠지?”
골치 아픈 문제라는 건 그만큼 일거리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할아버지께서 관에서 일하실 때도 그랬다.
어쩌면 지금 연락을 하지 못하시는 것도 늘어난 일거리에 허덕대고 계시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제자 된 입장에서 마음이 미어진다.
고생하시는 사부님들께 부족한 제자의 일거리까지 떠넘기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다 사부님들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인력난에 허덕이는 사부님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질러 보자.
“관음증 변태.”
[누가 관음증 변태냐아아아!!]장삼풍 사부가 버럭 소리 지르며 뛰어드신다.
역시 누군가를 소환하는 덴 뒷담화만 한 것이 없다.
“어어, 저는 장삼풍 사부한테 한 말이 아니었는데요. 그렇게 발끈하시면 제가 장삼풍 사부를 지칭한 것 같잖습니까.”
[어휴! 새끼가 능글맞아져선!]“에헤헤.”
“옙!”
[이런 건 또 더럽게 잘 들어요. 쯧!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순진하고 어리바리했던 녀석이 이런 능구렁이로 자라다니.]무당파 내부이기 때문일까?
새삼 처음 만났을 당시의 과거가 떠오르시는지 툴툴대며 혀를 차신다.
[한데, 내가 아니라면 관음증 변태는 누굴 말한 거냐?]“아… 그야 뭐…….”
달마 사부?
세 분 사부님 중에서 가장 바쁘신 달마 사부는 요새 잘 들어오지도 못하시는 터라 언급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럼 남는 분은 한 분밖에 없다.
“천마 사부…죠?”
[그렇지? 그 작자가 원래 좀 그래. 자오경 엿보는 기물 같은 걸 만들어 팔며 인과를 벌어들이는 작자잖아.]“예, 그분이 원래 좀…….”
[그런데 이거 천마 그 작자도 보고 있을걸?]X발?
저기요?
지금 저 맥이십니까?
“……농담이라고 해주세요.”
[농담이겠냐? 그 작자 엿 먹이는 일이라면 언제 어느 때고 진심인 것이 이 몸이니라!]그런 거 자랑스럽게 말하지도 마시고요.
여기 무당파입니다, 사부!
[뭐, 한동안 조심하거라. 은근히 뒤끝 작렬인 작자니까.]갑자기 귓가에 천마 사부의 목소리가 들리면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을지도 모르겠다.
특유의 냉소적인 목소리로 죽인다 말씀하시면…… 어휴!
“하아…….”
한동안 천마 사부 목소리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일이 먼저다.
“이야기는 다 들으셨죠?”
[구파 무공 손봐달라는 거?]“예.”
[어렵지 않지.]그러실 거다.
다른 분도 아니고 장삼풍 사부시니까.
[사실 이런 일이라면 나서겠다고 튀어나올 양반들이 한둘이 아닐 거거든. 이런 명분이라면 나도 시간 내는 건 어렵지 않을 거고. 오히려 좋아. 아주 좋아! 엄청 좋아!!]뭔가 합법적인 녹봉 도둑의 선언을 듣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착각일까?
다시 한번 천상의 엄혹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걸로 당면한 문제는 해결이다.
마음이 든든해진다.
온 세상이 다 내 편인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그래서, 누가 관음증 변태라고?]“켁!”
저기요?
장삼풍 사부?
언제부터 목소리가 그렇게 냉소적으로 되셨습니까?
“장삼풍 사부 성대모사 잘하시…….”
[나 맞다.]착각인가?
전에도 한 번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이럴 땐 뭐라 말하는 게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살려주세요오오오오.”
나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