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86
285화 썩은 과일
명광은 단상에서 검을 다루는 연청운을 보며 크게 감탄했다.
검을 든 연청운은 적수공권일 때와는 또 달랐다.
검을 든 연청운은 엄중했다.
나아갈 때는 주저가 없었고, 물러설 때는 묵직했다.
엄청나게 빠른 쾌검이 아님에도 강과 유가 조화를 이루니 검이 닿는 범위 안에는 그 무엇도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한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질지라도 저 검이 휘둘러지는 범위 내에는 일절 쌓일 것 같지 않았다.
직접 연청운과 손을 겨뤄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명광은 연청운의 검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민감하게 느꼈다.
“내 검을 오롯이 펼치면 상대의 검은 당연히 흐트러진다…….”
적수공권일 때와는 달리 부딪침에 거리낌이 없다.
검에 닿는 것을 비껴내고 밀어낸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길이 열린다.
상대하고 있는 사숙의 검세 사이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는 듯하다.
검이 교차할 때마다 검로가 비틀리니 사숙의 검은 시종일관 밀려났다.
연청운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반듯하던 사숙의 간격이 비틀리고 찌그러졌다.
완벽과 불완전함이 싸우는 모습이다.
“대단해…….”
지키는 것에 흠이 없으니 수세를 굳힌 채 나아가자 제풀에 무너진다.
그 검이 말하고자 하는 무리(武理)는 맨손일 때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무당파 무공은 나보다 강한 자를 이기는 무공……. 평수를 이루는 상대라면 더 손쉽게 이길 것이고, 하수라면 내 꼴이 나겠지. 이것이 진정한 남존 무당의 무공인가!”
명광은 여태껏 익히고 받아들였던 무당파 무공이 하얗게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 빈자리에 연청운이 보여주는 무공이 선명하게 각인됐다.
이것이 진짜 무당파 무공!
명광은 벅차오르는 자부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명송이 그런 명광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자네 모습이 참으로 낯설구만.”
아침까지만 해도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며 날을 세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추종자를 자처하며 추앙하고 있다.
“어흠! 무지는 잘못이 아닐세. 참된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함이야말로 잘못이지.”
명광 본인도 태세전환이 너무 빨랐다는 것을 인지했기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을 깨닫고는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정말 명진 자네가 가르친 게 맞는가?”
“모르겠네. 내 입장에선 무척이나 닮은 동명이인이라는 게 현실적일 것 같아…….”
명진은 머리에 망치라도 맞은 모습이다.
충격으로 말을 흐리는 동기의 모습에 명광은 내심 아차 싶었다.
자칫 연청운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성급한 자신의 언사를 자책하며 명광이 빠르게 비난의 대상을 끌어들였다.
“크흠! 소문에는 현도당주가 내쫓았다는 말이 있던데…… 옹이구멍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구먼.”
연청운의 일을 들은 허도진인께서 무당파에 돌아와 피바람을 일으킨 사건은 무당파 제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무려 무당파 장문인인 벽하도장이 가루가 되게 깨지면서 그 아래로 폭풍 같은 내리갈굼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나름 신경을 써주는 명광의 말에 명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어. 저런 재능을 몰라봤으니…… 사문에 큰 죄를 지은 거야.”
“그리 자책하지 말게. 그게 어디 자네 잘못인가. 현도당주가 더러운 짓을 했던 거지.”
명진의 자책에 명광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명진의 쓴웃음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더 말해봐야 친구이자 동기인 명진의 상처를 들쑤실 뿐이라는 생각에 명광이 입을 다물었다.
묵묵히 연청운의 비무를 지켜보던 명진은 문뜩 뒤를 돌아봤다.
연청운을 괴롭힌 주체이자 주동자는 윤시후였지만, 속가제자 중에는 그런 윤시후의 편을 들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한 놈들이 적지 않았다.
최선이라고 해 봐야 적극적으로 괴롭히지 않은 것이 고작이다.
“저 녀석들도 고생하겠군. 지금보다 더.”
인과의 무서움을 느끼며 명진은 스스로의 책임과 죄를 곱씹었다.
***
남수는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눈이다.
지난밤 고민과 걱정으로 잠을 뒤척이다 늦게 잠든 탓에 눈이 뻑뻑하고 괴로웠다.
“아…… 빌어먹을…….”
오지 않았으면 하는 아침이 결국 와 버렸다.
“닭 모가지를 모조리 비틀었어야 했나.”
호북에 있는 닭 모가지를 모조리 비틀어버리면 영영 아침이 오지 않을까.
남수가 어젯밤 잠을 설치며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호북 아니, 세상 모든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면 하늘도 감읍해서 사정을 봐주지 않을까?
“뭔 병신 같은 생각이야, 이거!”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걸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보니 더욱 짜증이 일었다.
“X발!”
쨍!
울화가 일어나며 제일 먼저 한 일은 입산할 때 가져왔던 고급 다기를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이름 있는 도예가에게 큰돈을 줘가며 만든 명품이었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남수는 지난 한 해를 떠올렸다.
운수가 나빴나?
아니, 오히려 좋았다.
덕풍 윤가를 등에 업고 패악질을 부리던 윤시후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남수 역시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윤시후는 그런 남수조차 가급적 상종하고 싶지 않은 놈이었다.
모든 면에서 남수 본인보다 질이 나쁜 놈.
그놈이 사라지면서 무당산에서의 속가제자 생활이 꽤나 즐거워졌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라고, 윤시후가 부리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남씨 가문의 힘만으론 부족했지만, 비슷한 녀석들끼리 손을 잡으니 가능했다.
허도진인이 무당파를 뒤엎으면서 분위기가 빡빡해지긴 했지만, 결국 그건 윗동네 이야기일 뿐이었다.
어차피 밑바닥은 바뀔 것이 없었다.
본산제자와 속가제자는 기반부터가 다르다.
이게 다 윤시후가 나빴기 때문이다 말하며 반성하는 척하는 모습 좀 보이면 그만이다.
문제는 연청운이 돌아왔다는 거다.
그것도 까마득히 높은 분이 되어서.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 한 본산제자들과 달리 연청운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남수가 볼 때 다른 높으신 분들에게 한 것처럼 반성하는 모습 좀 보이는 걸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X바 연청운 그 새끼가 가산 다 털어서 허도 늙은이한테 청탁이라도 한 거 아냐? 안 그러면 이게 말이나 돼? 뒤에서 수작질이나 부리는 더러운 새끼!”
속가제자들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리지 않은 것은 연청운 자신이 직접 괴롭히기 위해 손을 쓴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했다.
“X바…… 속가제자 따위 진즉에 때려치울 걸 그랬나…….”
후회가 생기기도 했다.
진지하게 속가제자를 때려치울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돈이든, 힘이든 있는 집안에서 속가제자로 들어왔다는 건 일종의 선을 그은 거다.
무관이나 표국 같은 곳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상류층 집안에서 속가제자로 들어왔다는 것은 가문에서 이어받을 것이 없다는 선고나 다름이 없다.
그거라도 해라.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기대치가 적은 만큼 이마저도 해내지 못한다면 정말로 가문에서 연을 끊을지도 모른다.
설령 연이 끊어지지는 않더라도 기대치는 더욱 줄어들 테니, 말 그대로 밥벌레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혈혈단신으로 가문을 박차고 나와 비천한 것들과 뒤섞여 살 생각이 아니라면 버텨야 했다.
“엿 같네 진짜…… X바…….”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가문의 단물을 빨고 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싹 엎드리는 걸 안 해본 것도 아니고……. X바, 까짓거 그래 내가 열심히 아부 좀 떨어준다.”
남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숙사를 나섰다.
비슷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기들과 함께.
그렇게 끌려 나온 자리에서 남수는 보았다.
“미, 미친…….”
높으신 분들.
속가제자의 눈높이에서는 그야말로 괴력난신을 휘두르는 본산제자들이 나가떨어졌다.
지켜보는 본산제자들도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감탄 일색이다.
절정은 말로만 듣던 이기어검이 펼쳐질 때였다.
그야말로 분위기가 일변하는 순간이었다.
무당파 본산제자 중에서도 이름 있는 사람들, 무림에서 별호를 얻어 고수로 불리는 이들조차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말문을 잃었을 정도였다.
“저게… 그 둔재라고?”
“어디서 십만 년짜리 산삼이라도 처먹었나…….”
옆에 있던 다른 속가제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자격지심과 부러움의 밑단에는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아부 좀 떨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남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무조건 대가리 박아야 해…….”
다시 보게 된 연청운은 하늘의 별이 되어있었다.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
아부는 고사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용서받아야 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덕분일까.
비무를 마친 연청운이 연무장을 벗어날 때 남수는 홀린 듯 뒤를 따라갔다.
끈질기게 따라갔다.
주변에서 연청운에게 환호하던 본산제자들이 알아서 비켜줄 정도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던 연청운이 발길을 멈췄다.
“언제까지 따라올 건데?”
연청운이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남수는 그 말에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아부를 떨겠다는 생각은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새하얘진 머릿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 미안해. 다 내가 잘못…했어… 다 내, 내 잘못이야…… 요, 용서해주라…….”
남수는 개구리마냥 바싹 엎드렸다.
연청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너한테 뭔가를 했냐?”
“……어?”
“니 팔다리를 부러트렸냐? 아니면 먼지가 나게 팼냐?”
“아, 아니…….”
“니들한테 일일이 신경 쓸 생각 없으니 안심해. 그냥 조용히 살아. 됐지?”
연청운은 제 할말만 하고 떠나갔다.
“다행…인가?”
납작 엎드려 있던 남수는 안도했다.
“다행…….”
하지만 뱃속에서는 다른 감정이 끓어올랐다.
모멸감이었다.
“X바…….”
힘 좀 생겼다고 잘난 척하는 연청운에게 속이 뒤틀렸다.
입장 바꿔서 남수가 연청운 자리에 있었다면 사지를 분지르고 모욕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남수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모멸감만이 중요했다.
그때였다.
“창피하겠구나.”
남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자신이 한 욕설을 들었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몸을 일으킨 남수의 앞에 무당파 도복을 입고 있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수하고 싶으냐?”
“어어…….”
복수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남수는 다시 한번 머릿속에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포기해버린 불가능한 단어가 다시 들어오니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했다.
“쯧쯧쯧. 겁쟁이 녀석.”
중년인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 뱀과 같은 제안을 해왔다.
“그럼 저리되고 싶은 마음은 있느냐?”
이번에는 달랐다.
남수는 하얗게 탈색되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강해지고 싶다면 길을 일러주마.”
남수의 눈에는 눈앞의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보지 못했다.
남수를 바라보는 이 사람의 눈매가 개구리를 보는 뱀과 같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