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14
313화 움직이는 사람들
사람도 동물도 없는 허허벌판에 홀로 앉아있는 한 사내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탈속한 차림의 사내는 누가 보더라도 도통한 도인으로 여길법했다.
하지만 사내의 두 눈은 도인이라 하기엔 너무나 거센 감정을 담고 있었다.
“천지불인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以萬物爲蒭狗)라. 이 정도는 신경 쓸 것도 아니라는 건가.”
하늘을 탓하는 듯한 말을 내던진 사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디까지가 천리(天理)인가.”
사내는 천하의 흐름을 살폈다.
큰 흐름은 여전히 뜻한 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큰 흐름에 합해져야 할 작은 흐름들은 어긋난 것들이 많았다.
“천상의 존재들이 나섰을 리는 없으니, 이는 인간이 한 일일 터. 아직도 인세에 그 정도 힘이 남아있었나?”
사내는 이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한낱 인간 따위가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다.
불쾌한 감정은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대는 처음부터 오욕칠정을 키운 바가 없으니 이는 극복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부족함을 덮을 덕을 쌓지도 못했으니, 쌓아 올린 공이 높다 한들 이 위에 그대의 자리는 없도다.
사내가 내쳐질 때 들었던 말이다.
까마득하게 오래전이었으나 아직도 잊히지 않는 말을 곱씹으며 사내는 하늘을 노려보았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면, 나 또한 하잘것없단 말이더냐.”
하잘것없는 것이 자신을 막아섰다고 생각하니 과거의 불쾌한 기억과 함께 속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사람은 하늘의 법을 잊을 것이니! 어디 하늘 역시 얼마나 고여 썩을지 지켜보아라.”
콰아아아아아아아!!
사내가 분노하자 천지사방이 날뛰었다.
허허벌판이던 곳이 추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함께 사내의 형태도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다.
평범한 사람처럼 피와 살로 이뤄진 몸뚱이가 아닌 듯싶다.
기운이 가라앉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짧게 혀를 찼다.
“인과라.”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다시 수확할 때가 되었군.”
어떤 선택을 앞두고 있는 듯 고민하는 기색이 사내의 눈가에 어렸다.
“혈륜과 한천, 어느 쪽이 좋을까?”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멈춰 있던 사내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엉망이 된 허허벌판의 모습만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갑작스럽게 날아든 두 개의 소식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북쪽에서 일어난 변란. 과거 북란대전의 주역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도 위협적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문제 되는 것은 종남파가 화산파를 공격했다는 소식이다.
구파가 같은 구파를 공격했다.
그야말로 무림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
구파의 평판을 어떻게 박살 낼 사건인지는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평판 높은 성인이 뒤로는 온갖 호박씨를 까며 더러운 짓을 했다는 것이 드러난 수준의 충격적인 사태였다.
구파의 고명한 선인이라고 하면 세간에선 정말 구름 위의 신선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선인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구파를 바라보는 세간의 민심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너무나 확연했다.
게다가 소문으로 접하게 된 종남파의 명분은 그야말로 기가 차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화산파 내부에 불온한 자들이 있다? 이게 종남이 할 말인가?”
얼마 전 구파 습격에서 화산파는 장문인이 목숨을 잃었다.
화산파라면 구파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인데, 장문인을 잃은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구파의 회동이 있던 무당파에서 불온한 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니 확신이 들었고, 필시 화산파 내부에 내통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외부의 사악한 자들과 손을 잡은 내부인이 있어 화산파 장문인이 당한 것이니, 종남의 힘으로 그런 화산파를 바로잡겠다는 것이 종남파의 주장이었다.
명분이라는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지만, 종남파 이 새끼들은 양심이 출타하셨음이 분명했다.
종남파가 그 사악한 세력과 손잡은 것들임을 아는 나로서는 복장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더 환장하겠는 건, 저 주장이 은근히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저 주장을 반박하려면, 화산파는 외부의 습격에 장문인이 죽을 정도로 허접한 문파였다는 자백(?)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내부 상황을 모르는 정파 무림인들 입장에서도 하늘 같은 구파의 하나인 화산파 장문인이 비열한 암수에 걸려 당했다는 쪽이 더 듣기가 좋을 것이다.
게다가 저 주장 자체가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변질된 구파 무공에 대한 파훼법이 드러난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실제로 화산파 내부에도 학의 주구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이게 실질적인 문제가 될 것인데…….”
화산파가 종남파의 공격에 무너졌을 때, 종남파가 목을 날리는 것은 과연 외부와 결탁한 사악한 무리일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화산의 의기를 지키고자 하는 올곧은 이들의 목을 날려버리고 변절자라는 멍에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구파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종남파의 명성만 오를 것이다.
무림을 좀먹어가는 사악한 무리와 가장 먼저 맞서 싸운 곳으로 알려질 테니까.
문제는 이 사건이 내 행보에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가령 종남파를 공격할 때 종남파에서는 내가 사악한 무리와 한패가 아니냐는 여론전을 펼칠 수가 있다.
어떤 문제에 있어 인식을 선점한다는 것은 그만한 힘이 있다.
내가 도연을 상대로 선빵을 날려 내 주장에 대한 인식을 강하게 박아 넣었던 것과 같다.
그걸 종남파가 써먹고 있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절로 솟았다.
그렇다고 북쪽을 내버려둘 수도 없다.
만약 북쪽이 뚫리게 된다면 상상할 수 없는 참극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국경이 혼란스럽게 된다면 학과의 싸움에도 분명 악영향이 될 것이다.
물론 국경을 수비하는 것은 황궁의 역할이지만, 용린대를 통해서 황궁 내부가 개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무작정 신뢰할 수도 없다.
‘몸이 두 개라면 참 좋겠는데…….’
그러다 보니 문득 유명한 술법 하나가 떠올랐다.
“사부님!”
[왜?]“혹시 분신술 같은 거 못 쓰려나요?”
분신술이라고 하면 여러 선인들이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바로 돌원숭이다.
실제 천상에 존재하는 양반이니 어떻게 배워서 써 먹어볼 방법이 있지 않을까?
물론 이른 나이에 탈모가 올 수도 있다는 부작용이 걱정되지만, 정말로 분신술을 쓸 수 있다면 감수해볼 만하다.
하지만 장삼풍 사부는 피식 웃으셨다.
[니 몸에 나 있는 털을 죄다 뽑아도 안 될걸?]“……처참한 등가교환이네요.”
역시 쉬운 길은 없다.
결국,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북쪽이냐, 서쪽이냐.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후회가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갈등하는 찰나, 범각이 나를 찾아왔다.
진짜 철두공 수련이라도 시작했는지 이마가 발갛게 물들어 있는 범각이 들고 있던 꾸러미를 내게 내밀었다.
“이거 니 거 같은데?”
“서신?”
내가 소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서신을 보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얼른 범각이 내민 서신을 뜯어 내용을 살폈다.
“어? 이건…….”
할아버지의 글씨체로 쓰인 서신에는 간략한 글이 적혀 있었다.
북쪽은 신경 쓰지 말거라.
“이야…….”
서신이 도착한 시기를 고려하면, 할아버지는 이와 관련된 정보를 나보다 먼저 입수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할아버지의 정보력이 보통을 넘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쯤이면 정말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수준이다.
보내주신 내용 또한 마음이 든든했다.
할아버지는 학과의 싸움을 위해 수십 년을 대비해오셨다.
무림의 여러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것을 고려한다면 용린대 말고도 움직일 수 있는 다른 힘이 있다는 가정이 충분했다.
실제로 제육천의 하나인 흑애천주도 할아버지의 인맥이 닿아있는 인사였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다.
“서쪽이네.”
“종남파로 가는 거냐?”
“어.”
“아직 소림은 내부 정리가 안 끝났는데?”
“그렇겠지.”
내부의 불순분자들을 걸러냈다지만 소림방장은 정상이 아니고, 신승 어르신의 영향력은 완전하지 않다.
당장 외부로 힘을 투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고려하면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철두공 수련이나 열심히 해둬라.”
“혼자 가려고?”
“시간벌이 정도는 해둬야 할 것 같아서.”
종남파가 일으킨 사건은 단순하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사파도 움직이겠지.’
사파 또한 학의 지시를 받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종남파의 움직임에 맞출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그야말로 첩첩산중(疊疊山中)이다.
앞으로 펼쳐질 싸움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아마 도적연맹과의 싸움은 몸풀기에 불과할 수준일 공산이 높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아군을 끌어모아야 하고, 단합시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슬슬 사천 쪽의 상황도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
화산에서 사천까지.
그 사이에는 공동파의 문제도 끼어 있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일단 종남파를 계도(죽빵)하는 것이 우선이다.
“화산에서 보자.”
말을 마친 나는 곧장 몸을 움직였다.
***
화산파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장문인이 피살당한 이후로 팽배해지기 시작한 분노는 모든 화산파 제자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렸다.
신경은 곤두섰고, 적의는 늘어났다.
어디가 되었던 꼬리를 드러내는 순간 징치(懲治)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런 상황에서 종남파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화산파로서는 분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장문인의 피습 사건은 화산파 제자들이 언급하기조차 꺼리는 역린(逆鱗)이었다.
그걸 종남파가 언급하고 나선 것이다.
구파는 각기 뚜렷한 특색이 있다.
소림이 태산처럼 굳건하다면, 무당은 균형과 부드러움이 특색이고, 공동은 사납다고 한다.
화산파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고고함이다.
강직하고 고고하다.
그런 화산파의 고고한 자존심이 모욕을 당했다.
만약 종남파가 실제로 공격해 온다면, 주저 없이 박살 내겠다는 것이 화산파의 총의였다.
구파의 유대감 같은 것은 분노라는 감정 아래에서 흐릿해졌다.
“종남파 따위가 어딜 감히…….”
화산파 장문인의 귀천 이후 화산파를 수습한 자허진인 역시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아직 구파끼리의 유대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에 초전은 피를 보지 않는 선에서 끝냈다.
결국, 종남은 화산의 문턱을 한 치도 넘지 못했지만, 이후가 쉽지 않을 것임을 화산파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종남파의 기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분노를 가라앉히지 않는 자허진인에게 매경풍이 냉정한 분석을 보고했다.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꺼낸 말에 자허진인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겠지. 네 말대로다. 종남파 제자들의 기량이 생각보다 높더구나.”
과연 자신 있게 화산파를 도모하겠다고 선언할 만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끝을 보기 위한 생사결전을 펼쳐야 할 판이다.
얼굴을 굳히는 자허진인에게 매경풍이 보고를 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종남파에는 특별한 비술로 기량을 늘리는 방법을 사용해왔다고 하더군요.”
“특별한 비술?”
“예.”
매경풍이 은근한 어조로 권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저희도 사용해봄이 어떻겠습니까?”
“비술… 비술이라…….”
자허진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름길만 쫓는 사도는 정도의 굳건함을 넘지 못하는 법이다. 그 비술이란 것을 알지 못하지만 온건한 방법만은 아닐 터. 그런 수단은 화산에 필요하지 않다.”
매경풍은 그런 자허진인을 바라보며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강직하시군요. 역시 사부님은 뼛속까지 화산파 제자십니다.”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자허진인은 몸을 돌려 벽에 펼쳐진 화산 일대의 전도를 살폈다.
그곳에는 종남의 이동 경로는 물론 주변 일대 사파들의 움직임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보단 무당과 소림에 연락을 취해야겠다. 종남파가 끝까지 저리 나온다면 구파의 화합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피를 보아야 할 터. 분명 이후의 어부지리를 노릴 사파의 움직임에 대응하려면 다른 구파와의 연계를…….”
종남과의 싸움 이후를 고려하며 계획을 세우던 자허진인이 입을 다물었다.
배에서 근육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은 탓이다.
한 자루의 검이 자허진인의 복부를 꿰뚫었다.
“사부님은 그런 분이시죠. 난세를 바라면서도 뼛속까지 화산파 제자인 사람.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을 만큼 강직하시니 저로서는 도저히 사부님을 타락시킬 수가 없네요.”
“너… 너, 이노…….”
“이만 퇴장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