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16
315화 분열
자허진인은 백진성이 화산파 제자로 있을 당시에도 이름이 높았다.
화산파를 대표하는 매화검수의 일인으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다만 도인이라 하기에는 워낙 성품이 강한 것이 선대 장문인의 우려를 샀다.
이로 인해 장문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화산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런 이의 참혹한 모습에 백진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화산파의 미래라던 분이 이런 꼴이면 어쩌자는 겁니까.”
사람은 흔히 옛날이 좋았다는 말을 한다.
지나간 과거는 미화되기 쉽다.
사랑을 위해 화산파를 버렸던 백진성이기에 어쩌면 더 화산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백진성의 서글픈 외침을 들었는지 자허진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진성이냐?”
“예!”
“네 얼굴이 보이는… 걸 보니 아직 이승인가 보구나.”
“사백께서 농을 하시는 걸 보니 가실 때가 되긴 한 모양입니다.”
“보면 모르겠느냐……. 나는 이미 글렀다.”
자허진인은 다른 사람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직설적으로 말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흔들림이 없다.
이런 사람이기에 따르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 정신이 더욱 또렷한 모습을 보인다.
명백한 회광반조(回光返照)다.
“어쩌다 이리되신 겁니까?”
“제자가 검을 꽂더구나.”
“매경풍?”
자허진인의 시선이 백무호에게로 향했다.
“너도 있었…… 욱! ……우욱…….”
더 이상 말을 잇는 것도 힘에 부치는지 자허진인이 울컥 피를 토했다.
끝이 머지않아 보였다.
자허진인의 얼굴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한 녀석은 여자 때문에 그만두고, 한 녀석은 지 성질을 못 이겨 나가버리고…… 너희가 내 제자였다면 좀 달랐을까?”
재능이 남달랐던 두 부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랬다면 화병으로 귀천하셨을 겁니다.”
“하긴… 너희는 나와 다른 길을 걷는 녀석들이었으니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할 것이라 믿은 나와 달리 너희는 과정을 중시했으니……. 과정, 과정이라…….”
화병 나서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었는지 자허진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좌정하라.”
미소를 지우고 몸을 일으킨 자허진인이 엄숙히 지시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아들은 백진성과 백무호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가 해.”
백진성이 백무호를 자허진인 앞에 눌러 앉혔다.
자허진인은 곧바로 백무호의 등에 손을 올렸다.
“매경풍 그 녀석이 종남파와 손을 잡았다. 장문인의 죽음에도 관여를 했다더구나. 허나 배후는 종남파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수가 깊고 복잡해. 주의해야 할 것이다.”
자허진인은 알려야 할 정보를 언급함과 동시에 내공을 백무호에게 흘려보냈다.
단전이 뚫리며 새어나간 양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한 양이 전해졌다.
무리한 기의 운행으로 인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지만, 자허진인은 멈추지 않았다.
입과 코를 포함한 칠공에서 피가 쏟아졌다.
내공으로 어떻게든 막아두었던 복부에서도 피가 쏟아져 앉아있는 자리는 피웅덩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쥐어짜 백무호에게 전했다.
“……화산을… 부탁……….”
그리고 최후의 유언과 함께 숨이 멎었다.
그를 지켜보던 한산월이 혀를 찼다.
“후회가 많은 것치곤 변명은 없네요.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태연히 하는 사람은 보통 자기합리화에도 능숙한데 말이지요.”
“내가 알던 저 양반 성격을 생각하면 뭔가 일을 저질렀을 거야. 매경풍이란 싹수 노란 놈도 관련이 있겠지.”
매경풍에 대해서는 백무호는 물론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백진성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하지만 피범벅이 된 자허진인의 시신과 기운을 갈무리하는 백무호의 등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바라볼 때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백가 사람들의 경우 화산파와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반면 문외인인 이화는 냉정한 시선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감상에 젖기보다는 다른 쪽을 먼저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음?”
“매경풍이란 자가 여기 이 자허진인을 습격한 것은 분명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었을 겁니다. 종남파와 손을 잡았고, 배후에 또 다른 힘이 있으리라는 것을 자허진인이 눈치챘을 정도라면 뭔가 음모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게 어떤 결과를 노리고 있는지야 뻔하겠지만요.”
“그렇군.”
화산파 내에 불순한 자들이 있으니 그를 징치하겠다고 나선 종남파.
종남파와 손을 잡았다는 매경풍.
그런 그들의 배후에 도사리는 흑막.
이를 종합해보면 목적은 명확하다.
“화산파를 먹겠다는 것이군.”
“이대로 화산에 오르면 화산과 종남을 동시에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정황이 안 좋군.”
백진성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절대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홀로 전황을 뒤집을 수 있다.
이 자리에는 무림삼불기의 하나인 당대 소수신마와 전대 소수신마가 있다.
전력에서는 밀릴 이유가 없다.
“문제는 세간의 시선이란 말이지…….”
종남파의 행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특히 구파끼리의 자중지란에 대해서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하지만 종남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화산파 제자가 터트린다면 이야기가 크게 달라진다.
그런 종남파와 화산파를 상대로 소수신마의 후예들이 싸운다?
진실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는 너무도 명백하다.
연합을 통해 소수신마의 후예들이 무림에 암약하는 세력들과 오랜 세월 싸워왔다는 소문이 퍼지고는 있지만, 아직 선입견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옳은 행동일지라도 보는 시각과 위치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되는 경우는 너무도 흔하다.
하물며 현재 전력의 일각에는 마공을 익힌 녹림 출신의 마인들까지 있다.
“시기가 욕 나올 정도로 절묘하네.”
백진성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사파는 이득을 위해 움직이고, 정파는 명분으로 움직인다고 했다.
그 명분 싸움에서 밀려버렸다.
“연합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여겨집니다.”
화산파를 포기해야 한다는 이화의 말이 주변의 분위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
자허진인을 처리한 매경풍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장문인의 사후 자허진인이 임시로 장문대리를 맡고 있었다.
그런 자허진인의 제자였던 매경풍은 어렵지 않게 화산파 제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장로들을 포함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매경풍은 준비해두었던 것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소집에 무슨 일인가 싶었던 화산파 제자들은 매경풍이 나눠주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서, 설마?”
거기에는 자허진인이 그동안 해온 일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있었다.
“화산 인근에 출몰했던 도적떼 무리를 사주한 것이 자허였다고?”
“장문인을 암습하는 데 협조했단 말인가!”
“이게 무슨…….”
매경풍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도 교묘하게 자허진인이 한 것처럼 묶어버렸다.
실제로 여기 모여 있는 이들은 이 자료들에 대해 뭐라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반신반의하는 기색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들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감정은 충격과 혼란이었다.
“사부님은 사파를 멸하는 것이 정파인으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셨지요. 그리고 그런 사파를 멸하기 위해 익힌 무공이 무의미하게 썩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자허가 그러기는 했지.”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다.
시끄럽게 선동하는 일은 없었지만, 곧잘 속내를 내비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은 자주 내보였었다.
“허나 장문인을 암습했다면 이건 선을 넘은 거야. 사파를 멸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만큼은 용납이 안 돼.”
“맞아. 이건 아니야.”
그리고 점차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다.
의도는 이해할 수도 있지만, 방법은 명백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그렇게 의견이 모이자 현실을 인식하게 된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되면 종남파에 반박할 여지가 없구먼.”
“허어…….”
다시 한번 큰 창피를 당하게 생겼다고 생각한 화산파 제자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심에는 화산파의 사고뭉치 자부진인이 있었다.
“자허가 장문인을 암습하는 데 손을 보탰다고 했느냐?”
“예.”
“너는 몰랐고?”
“몰랐습니다.”
“그럼 자허가 장문인을 암습한 일에 손을 보탠 건 어찌 알았느냐?”
명백하게 매경풍을 불신하는 어투였다.
매경풍은 자부진인의 취조에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답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화산파를 바꾸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고요.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라 하셨습니다.”
“자허가 제 치부를 알렸단 말이지……. 너를 정말 신뢰한 모양이구나.”
은근히 다른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자허의 실력은 화산파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네 실력으로 자허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것은 쉽지 않지. 네 기량이 생각보다 높았던가, 아니면 기습할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너를 믿었다는 의미겠지. 그건 같이 손을 더럽혔을 때나 얻을 수 있는 신뢰라고 본다만?”
자부진인은 기량의 차이를 언급하며 따졌다.
타당한 의심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늘어났다.
매경풍이 지지 않고 답했다.
“사부님께서 장문인을 암습하는 일에 손을 보탰단 말을 듣기 전까지 저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신봉했고 충직하게 따랐습니다. 예, 그전까지 저도 손을 더럽힌 일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부님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고 이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일단 앞뒤는 맞는다.
자부진인의 의문에 동조했던 이들도 매경풍의 대답에 수긍했다.
그중 한 명이 의심을 거두지 않는 자부진인에게 직접 물었다.
“저 아이의 말을 의심하는가? 나는 대답에 허점이 없다고 여기네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러네.”
“맞지 않다? 무엇이?”
“내가 아는 자허는 지독하리만치 화산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녀석이었네. 다른 것은 몰라도 제 손으로 화산파 장문인의 암습을 유도하고, 화산파 절기를 유출하는 행동을 했을 리가 없어.”
“흐음…….”
도적들을 이용한 일은 간접적인 일이다. 또한, 조용히 수습할 방도가 있다.
하지만 화산파 장문인이 암습당한 일은 화산파 체면에 직접적으로 먹칠을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비급의 유출은 자허진인의 성격상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자부진인의 판단이다.
“게다가 종남파의 움직임도 이상해. 거기에 맞춰서 명분을 던져주는 저 녀석의 행동은 더욱 수상하고!”
“그건 당연합니다. 이것이 사부님의 전횡을 저지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너무 끼워 맞추려 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래? 그럼 네 다음 행동은 무어냐? 내 맞춰볼까? 종남파에 화산파를 들어 바치려 하겠지!”
자부진인이 눈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는 매경풍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린 뒤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화산파는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화산파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인 것이 종남파가 아닙니까.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것이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것을 참고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잠시 화산파의 체면을 접어두어야 합니다.”
매경풍은 부정하지 않았다.
종남파와 뜻을 함께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여기서 다시 의견이 갈리며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때 한 사람이 더 나섰다.
“확실해졌군! 이건 믿을 수 없다!”
일찍이 연청운과 백무호를 화산으로 안내했던 정만족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대의를 운운한다? 내가 아는 매경풍은 그런 성격이 아니다!”
“정만족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나설 자리라? 하하하하! 과연 네 그릇을 드러내는구나! 난 화산파 제자다! 이 자리에서 화산파 제자는 목소리를 낼 자격이 없다는 것인가!”
정만족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와 함께 자부진인과 정만족의 뒤로 화산파 제자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 있던 화산파 제자 중 사할 가량이었다.
자부진인이 정만족의 뒤를 이어 선언했다.
“종남파에 화산파를 바칠 생각이라면 따르지 않겠다!”
화산파가 둘로 갈라졌다.
이를 바라보던 매경풍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리하시면 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나를 겁박하겠다는 것이냐?”
“사문의 혼란을 야기하는 반도(叛徒)들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요.”
매경풍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화산파 제자들을 반역도당(反逆徒黨)으로 규정했다.
“자꾸 사부님의 편을 드시는 걸 보니, 혹 장문인께서 암습당하셨을 때 손을 보탠 분이 아닌지 의심이 되기도 하는군요.”
매경풍은 손에 쥐고 있는 강력한 명분을 가차 없이 휘둘렀다.
하지만 자부진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네놈이 저지른 일을 자허에게 뒤집어씌운 것이 아니고?”
“더 들을 것도 없군요.”
매경풍이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부진인에게 합류하지 않은 화산파 제자들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저들을 제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산.파.를.위.해.서.”
다들 내키지 않는 얼굴들이다.
하지만 화산파를 위해서라는 이야기에 누군가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