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17
316화 살수들의 접근(1)
세상은 넓다.
이미 한 번 가봤던 길이라고 해도 다시 그 길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미묘하게 바뀌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해라도 생기면 모든 것이 쓸려나가 지형 자체가 바뀌는 일도 허다하다.
지도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걸 만들어 배포했다간 관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해진다.
매우 높은 확률로 금의위나 동창과 바람직하지 못한 면담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길잡이라든가 표국 같은 업종의 수요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우! 일 년도 안 된 것 같은데 꽤나 바뀌었네.”
과거 백무호와 함께 화산으로 갔던 길을 되짚으며 따라가 보는 중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바뀐 부분들이 많았다.
나무가 우거졌던 길목이 깔끔하게 밀려있다든가, 어디서 굴러왔는지 집채만 한 바위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든가.
사소하지만 막상 보면 헷갈리게 만들기 충분한 것들이다.
하물며 이번이 두 번째 가는 길이라 더 헷갈리는 것 같았다.
물론 사부님들이 조언을 주시기는 했다.
[크흠!] [거 보래도. 이 길이 아니라니까.]틀렸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한 해 만에 이렇게 길이 바뀌는데 수백 년 전의 분들이 알고 계시던 길과 지금 길이 같을 리가 없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 때는 저런 거 없었는데…….] [쯧쯧! 그렇게 얼렁뚱땅이니 등선도 얼렁뚱땅으로 했지.] [아니, 그 이야기가 왜 여기서 나오는가!]희귀한 광경이다.
달마 사부가 장삼풍 사부를 갈구다니.
뭔가 훔쳐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니, 그보다 꽤나 흥미로운 단어가 들려왔다.
‘장삼풍 사부가 등선을 얼렁뚱땅했다?’
뭔가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있는 것 같다.
[어이쿠! 그러고 보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지? 나 먼저 가보겠네.]하지만 그 전에 장삼풍 사부는 전략적 퇴각을 선택하며 도주를 감행하셨다.
뒷이야기를 기대했지만, 달마 사부는 장삼풍 사부가 없는 자리이니 뒷담화라고 생각하셨는지 이야기를 멈추셨다.
‘뭐,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나는 작게 웃음 지었다.
요새 워낙 이리저리 구르기만 해서 그런지 이런 작은 웃음조차도 차 한 잔의 여유처럼 소중하게 여겨졌다.
“아아, 한 사나흘쯤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좋겠네.”
갑자기 여유로운 삶에 대한 고찰이 머리를 스쳤다.
대체 언제부터 사나흘 쉬면서 뒹굴거리는 게 사치라고 느껴지게 된 것일까?
젊었을 때 빡세게 일하는 이유는 미래의 안정을 대비함에 있다.
한데 나는 지금도 바쁘고, 죽어서도 바쁠 것이 분명하다.
이 불합리함은 대체 뭔지 싶다.
이래서 도를 믿습니까, 같은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튀어야 하는 것이라고 선인들이 조언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이쯤에 마을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대로라면 대충 이삼일 정도면 화산파에 도착할 수 있지 싶다.
그 전에 피로라도 풀 겸 객잔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 좀 하고 편하게 눈을 붙이고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 길을 따라가다 보니 역시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뭔가를 하고 있었다.
“떠돌이 상인이라도 왔나?”
가장 흔한 가능성이지만, 그런 것이라면 위치가 좀 이상하긴 하다.
떠돌이 상인이라면 마을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푸훕!”
그리고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토했다.
“아, 더럽게…….”
“죄송합니다.”
가까이 있던 사람 중 한 명에게 침이 튀었는지 불평을 했다.
“조심하쇼. 용신님께 벌 받을라.”
“……주의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앞에는 반인반룡의 나무 조각상이 모셔져 있었다.
문제는 그 옆에 시중을 드는 소녀상의 모습이 아무리 봐도 이화를 똑 닮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무 조각상이 모셔져 있는 작은 사당에는 멋들어진 글씨로 [장강용왕]이라고 쓰인 명판이 걸려 있었다.
뭔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내 신도(?)들인 모양이다.
“그런데 용신님은 무슨 용이지?”
“장강… 황하의 용이니 황룡 아냐?”
“그런가? 그럼 황룡으로 하자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만해애애애애애!’
새로운 종류의 고문인가?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럼, 이제 수행이나 하러 갑시다.”
그렇게 사당에 기도를 하던 사람들이 누군가 꺼낸 말에 마을 공터로 우르르 몰려갔다.
뭘 하는가 보니 눈에 익은 움직임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다.
‘십육식?’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건 뭔가 낯간지러워 십육식이라고 명명한 수련법이다.
꾸준하게 수련하면 근골이 단련되어 일반인은 무병장수할 수 있고, 무인이라면 잠들어있는 무재를 일깨울 수 있는 기초 수련공.
검을 들지 않은 맨손으로 하는 움직임이었지만, 마을사람들은 분명 십육식을 따라 하고 있었다.
“난 이거 하면서 그간 쭉 골치였던 요통이 사라졌어.”
“난 굽었던 허리가 펴졌다네.”
“이게 신통력이지 뭐겠어?”
“암암! 용신님의 가호지.”
갑자기 용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난 이유가 이해되었다.
열심히, 꾸준히만 하면 반드시 성과를 얻게 되는 수련법이 십육식이다.
표국을 통해 퍼트리려 했던 수련법이 민간에 퍼져나가며 내 종교적(?)인 위명과 결합되었던 것이다.
내 자괴감이야 그렇다고 쳐도, 내가 의도한 바를 아득히 초월한 성과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촉진시킨 곳이 어디인지도 알 것 같았다.
‘명운표국 이 작자들이…….’
퍼트린 것이야 다른 누군가의 협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근원이 명운표국이란 것만은 분명하다.
안휘에서 살짝 조져놓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의 집념(?)을 근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언제 한번 제대로 조져야겠네.’
커져도 너무 커졌다.
이 정도면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자칫 정체불명의 사교집단으로 찍히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안 되겠다. 여기서 자면 악몽에 시달릴 것 같아…….’
잠깐이라도 편하게 눈 좀 붙이나 싶었지만, 적어도 이 마을에서 편히 자기는 그른 것 같다.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건량과 육포를 채워 넣은 나는 곧장 마을을 떠났다.
***
“잠시만요!”
마을을 떠나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젊은 남녀였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두 남녀는 숨을 헐떡이며 쉬이 대화를 잇지 못했다.
“후… 하… 저기… 무림인이시죠?”
“예. 뭐. 보다시피.”
무복에 권갑. 내 차림은 누가 봐도 무인 복장이긴 하다.
한데, 그걸 굳이 물어보는 이 사람들은 뭘까?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여쭤도 될까요?”
“화산에 갑니다만?”
“아!”
엄청 기뻐한다.
그러더니 곧 애처로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한다.
“화산 인근에 화성촌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제 친부가 사시는 곳인데, 거기까지 동행을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화성촌?”
아는 곳이다.
적혈랑과 북방 마적들에게 습격을 받았던 마을.
백무호와도 인연이 깊은 마을이다.
그곳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니 마냥 무시하긴 어려웠다.
“혹, 알고 계십니까?”
“예전에 인연이 있긴 했지요. 그런데, 친부께서 사시는 곳을 찾는 것이라면 좋은 소식이라도 전하러 가시나 봅니다.”
“예!”
넌지시 혼인 허락을 받으러 가는 것이냐 물었더니, 남자는 세상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그 옆에 있는 여인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인이다.
어지간한 도시에서도 손꼽힐 만한 미모다.
눈에 띈다는 소리다.
신분마저도 애매해 보이는 것이 함부로 돌아다녔다간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침상을 함께할 가능성도 있다.
“호위가 필요할 만하네요. 능력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아하하…… 이것 참… 쑥스럽네요.”
남자가 순박하게 웃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바꾸곤 한숨을 쉬었다.
“해서 표국을 찾아갔습니다만, 무슨 일인지 죄다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부근에는 흉흉한 이야기가 돌고 있고요…….”
“아하.”
‘내 탓인가?’
현재 위치는 얼추 하남과 호북, 섬서의 경계가 겹쳐있는 부근이다.
그렇다면 인근 표국들은 역참에 참여했을 공산이 높다.
그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젊은 남녀를 보고 있자니 소림 갈 때 봤던 일가족이 떠오르며 내심 미소가 지어졌다.
아주 잠깐은.
나는 이미 눈앞의 남녀를 경계하고 있었다.
화성촌을 언급한 것까진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내 행동과 지시가 원인이 되어 발이 묶였다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대화 도중 느껴지는 심장의 움직임은 눈으로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너무 규칙적이다.
심장 박동은 감정의 변화와 몸의 상태에 따라 올라가고 내려간다.
그런데 이들의 심장 박동은 각각의 상황에 맞춰져 있다는 느낌이다.
화를 내야 할 때, 슬퍼할 때, 기뻐할 때 어느 정도로 심장 박동을 조절하라는 식으로 훈련되어있다는 느낌이랄까?
그 증거로 표정은 아직 숨을 헐떡이지만, 심장 박동은 겉모습과 달리 규칙적이었다.
어지간한 무인들은 속여 넘길법한 위장이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상화를 얻고 나서 극도의 감각에 눈을 뜨며 자연스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살수 같은데…… 흑살대?’
화성촌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에 대한 뒷조사를 세밀하게 한 것 같다.
나를 표적으로 삼은 느낌이다.
종남파와 화산파가 격돌하는 사이 틈을 노릴 사파세력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나를 노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후로는 지금처럼 편하게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슬쩍 주변의 기색을 살폈지만, 따로 매복한 자들은 없는 것 같다.
만약 이번에도 무당산에서처럼 흑살대와 함께하는 곳이 있었다면 이를 통해 제육천의 단합상태라던가 연계하는 세력의 구도 등을 추론해볼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낚인 척 해봐?’
흑살대는 살수조직이다.
그런 곳이 내 뒤를 캐고 있다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 나를 얼마나 파악했는지 볼까?’
어차피 여기서 거절한다고 해도 다른 더 은밀한 방법을 통해 접근할 것이 뻔했다.
차라리 이 기회에 흑살대의 허실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호위가 필요하신 겁니까?”
“예. 사례는 하겠습니다. 어떻게 좀 안 될까요?”
“길이 좀 바쁜데…….”
내가 지나갈 길을 미리 파악해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화산에 가는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너무 손쉽게 승낙하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렇게 한 번 튕기자 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스스로가 미인이라는 것을 잘 아는 여자다.
비스듬한 각도로 얼굴을 보이는데 확연하게 미모가 돋보였다.
‘미인계(美人計)라…….’
나를 상대로 미모를 활용하려는 것을 보면 아직 나에 대한 조사가 미흡한 모양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어릴 때부터 설아 누나를 바라보며 자라왔다.
손꼽힐법한 미모이긴 하지만, 나를 현혹시킬 정도는 아니다.
“말이라도 한 마리 구해오세요. 저도 급한 일이 있어 여정을 맞춰드릴 수 없는 입장이거든요.”
“예! 바로 구해오겠습니다!”
남자는 급히 마을로 향했다.
졸지에 미인 살수와 남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평생,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미인계가 잘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배시시 웃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미모를 부각시키려고 한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정보를 뽑아낼지 고민했다.
무림에 나서며 여러 선배(?)들을 통해 들은 조언에 의하면 좋은 살수는 죽은 살수뿐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마을과 가까운 곳이기에 쉽게 손을 쓰기는 어렵지만, 사실 살수를 만나면 단번에 쳐 죽여야 한다고들 하셨다.
다만 최근에 이런저런 일들로 불가피하게 사부님들의 주머니를 털어먹은 일이 많았기에 가능하다면 뽑아낼 정보를 최대한 뽑아내 사부님들의 부담을 덜어드릴 생각이다.
‘이참에 흑살대 본거지가 어딘지도 파악해둘 수 있으면 좋겠네.’
배시시 웃는 그녀를 향해 나도 최대한 좋은 사람처럼 웃음을 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