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35
334화 길이 있으면 누군가는 걷는 법
장문경 선배가 엉덩이를 걷어차며 떠민 덕에 장소월 소저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상처 부위가 부위다 보니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곳을 찾아 주변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뒤 장소월 소저의 상처를 확인했다.
“어디 봐요.”
상의의 살짝 젖히니 어깨가 드러났다.
어깨에서부터 목까지 예쁜 선과 살결이 드러났지만 음흉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살결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너무 선명했다.
엉성하게 대충 묶어둔 헝겊을 푸니 상처가 훤히 드러났다.
“읏…….”
“아플 만했네요.”
적어도 검날이 반 치가량은 들어간 듯 보였다.
자칫 뼈에도 검이 닿았을지 모른다.
게다가 상처 주변에는 검게 굳어있는 피딱지와 균열 사이에서 번들거리는 붉은 핏기가 감돌았다.
격렬하게 움직이며 상처가 벌어지기를 반복한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팔을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신경이 손상된 건 아닌 것 같지만, 이대로 방치했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아팠을 텐데, 어떻게 버텼어요?”
“참았죠. 모두가 힘든데, 아픈 기색을 드러내는 건 어리광이었어요.”
장소월 소저는 의연하게 답했다.
그사이 나는 피에 전 헝겊을 제거하고, 내가 가지고 있던 천을 꺼냈다.
퇴각전을 감행하는 만큼 부상자가 상당할 것이라 여겨 백가와 헤어질 때 의약품과 물자를 가능한 한 많이 챙겼었다.
헝겊을 새로 대기 전에 더러운 부분을 깨끗한 물로 씻어냈다.
“으읏!”
뭔가 민망하다.
핏자국을 닦아내니 맨 살결이 보이기 시작한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상황에서 얕은 신음이 흐른다.
‘진정해. 진정해라, 나.’
동요하는 마음을 눌러보지만 낯간지러운 느낌이 피부를 간질였다.
나는 담담함을 가장하고 소림에서 받았던 약을 상처에 발랐다.
“아파요…….”
너무 가까운 것이 아닌지 싶다.
숨결이 자꾸 닿아온다.
“너무 엄살 피우는 거 아니에요?”
“아프거든요. 아플 땐 아프다고 하라면서요?”
“그 말 취소요. 좀 참아 봐요.”
“칫!”
장소월 소저가 불만 가득 입술을 삐죽거렸다.
간식을 빼앗긴 아이처럼 군다.
그간 보아온 장소월 소저와는 전혀 다른 익숙하지 않은 투정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어리광이 가득하면서 그 고통은 어떻게 버텼대요.”
“그건 나도 신기하네요. 어떻게 버텼을까요?”
어리광 가득하던 장소월 소저의 얼굴이 다시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투정 부리던 아이 같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뭔가 더욱 성숙해진 모습의 장소월 소저는 문뜩 뭔가 떠올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 왠지 알 것 같아요.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말을 하며 장소월 소저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강하게 주시하는 커다란 눈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워질 정도였다.
“분명 그런 이유였을 거예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커다란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배시시 웃는 장소월 소저의 미소는 분명 투정만 부릴 줄 아는 어린애가 짓는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
상처를 치료한 장소월 소저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곧바로 운기조식에 집중했다.
당장 이곳에서 피하기보단 전투력을 복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
계속 습격을 당하는 중이었다면 위험천만한 행동이지만, 연청운 일행과 합류한 데다 습격자들을 일소한 상황이라 안심하고 몸을 회복했다.
운기조식으로 몸을 회복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녹림마인들이 외곽을 경계하며 호법을 섰기에 나는 다른 쪽으로 몸을 뺄 수 있었다.
그렇게 거리를 벌리자 알 수 없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와…… 이번 건 좀 셌다…….”
설아 누나가 아니었다면 단번에 넘어갔을 것이다.
어지간한 남자라면 절대 못 버틴다.
“점점 힘들어지네.”
뭔가 위험한 외줄타기라도 하는 기분이다.
남녀 간의 감정이란 무척이나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다듬는 가운데 묘한 것이 눈에 밟혔다.
“저기도 참 기이하단 말이지.”
이전에 무당산에서 보고 어이가 없던 광경이 재현되고 있었다.
팽철이 제갈세가의 여식에게 추근대고 있다.
제갈설화. 제갈윤재의 여동생이라고 얼핏 들은 소저 옆에 팽철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견원지간까지는 아니어도 전혀 성향이 다른 하북팽가 사람과 제갈세가 여인이 저러고 있으니 기이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저거는… 방치하는 건가? 묵묵히 지켜보는 중?’
제갈윤재는 두 사람의 동향을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외의 제갈세가 사람들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북팽가와 밀접한 관계가 생기길 바라는 느낌이다.
지금 같은 시국에는 혈연만큼 확실한 협력관계는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주변의 그런 분위기나 기대와는 달리 제갈설화는 팽철에게 벽을 세우고 있었다.
장소월 소저 때문에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나는 무심코 다가가 물었다.
“둘이 사귑니까?”
“그럼. 당연하지.”
“아뇨.”
동시에 대답했지만,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혼인식 때 초대할게.”
“저는 맹수조련사가 아닙니다.”
“……대충 어떤 관계인지는 알겠네요.”
둘 다 진심이다.
그래서인지 더 의외였다.
팽철에게 저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저게 남들에게는 싸가지없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남자라는 건가 보다.
문제는 제갈설화의 저 철벽을 팽철이 어떻게 공략할 지다.
팽가 특유의 근성은 인정하지만, 제갈설화의 철벽이 그저 들이받는다고 깨질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모순(矛盾)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결과가 궁금해졌다.
확실하지 않기에 더 흥미가 생긴다.
어쩌면 제갈세가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이미 이청려 누나는 전병을 입에 문 관람자의 자세로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가만? 그럼 다른 사람들이 볼 땐 나도 이런 느낌인가?’
그리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주변의 눈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몽실몽실한 기분도 이내 사라졌다.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보였다.
“오문도장.”
공동파는 화산파와는 상황이 다르다.
대부분이 혈교의 대법을 받아들여 변질되었기에 공동파는 그야말로 명맥만 남아버렸다.
그나마 사할 정도를 확보한 화산파와는 처지가 달랐다.
마음을 굳게 잡고 다가가니 피투성이의 오문도장이 처연한 웃음을 흘렸다.
“면목이 없네. 자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반도 구하지 못했어…….”
정확히는 혈교에 물들지 않은 제자들을 반이나 살려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의 구할 가까이가 혈교에 넘어간, 사실상 적지 한가운데에서 제자들을 여기까지 살려온 것이다.
얼마나 처절한 싸움이었을지 쉬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천하십검의 장문경 선배와 제갈세가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절대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웅의 업적이다.
하지만 오문도장은 스스로의 업적보다는 공동파의 미래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더 커 보였다.
이대로 공동파가 역사의 흐름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건 곤란하다.
구파의 명맥은 이어져야 한다.
천상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천사대선을 위해서라도!
신입들로 일손을 덜어야 할 사부님들을 위해서라도!
등선 이후로도 신입 신선들을 받아야 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아직 공동파의 무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잖습니까.”
“과연 그럴까…….”
오문도장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목처럼 주름진 손은 굳은살로 가득했다.
평생 검만 잡고 살아온 수련자의 손이다.
나는 거기에서 공동파의 무맥이 아직 이 땅에 남아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오문도장은 다른 것을 보는 모양이다.
“나는 늙었네. 나와 함께 온 몇 안 되는 이들 역시 그러하고.”
문파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무공이 남아있다 해도 이를 온전하게 성장시키기까지는 기십 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거대 문파에서 보통 일대부터 삼대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제자들을 구성하는 이유다.
“과연 우리에게 공동파를 재건할 시간이 있을까?”
오문도장을 비롯한 공동파의 생존자들이 그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난제다.
정파 무공은 완성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갑자(30년)를 수련해도 오의를 터득하기 힘든 것이 정파 무공이다.
그 정파 무공의 필두에 서 있는 구파의 무공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다.
오문도장이 남은 생을 제자 육성에 매진한다 한들 그 제자가 무공을 완성하여 스스로의 입지를 세우는 것을 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그렇게 불완전한 무맥이 이어져 봐야 결국 무너질 뿐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러나 나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자네…….”
오문도장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동그랗게 커진 눈에서 잠깐이지만 희망의 빛이 번뜩였다.
무당파에서 보았던 내 무공 습득력을 떠올린 것 같다.
“그렇군… 자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나라면 공동파 무공이 사라지기 전에 모두 배울 수 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사실을 알릴 수는 없지만, 정확히는 가장 원론적인 공동파 무공을 전수할 수 있다.
지독한 절망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한 오문도장을 향해 나는 포권을 쥐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연합에 오문도장님의 자리를 만들어놓겠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랬었지.”
“다시 한번 정중히 공동파가 합류하기를 청하겠습니다. 이미 화산파도 저희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허어!”
오문도장 역시 화산파의 상황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동쪽이 아니라 사천을 향해 움직인 것이다.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
연합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질 무림맹 안에서 공동파의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새롭게 재건될 공동파의 토양이 존재할 것이다.
이를 상상하는지 오문도장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그래, 길이 있으면 누군가는 걷는 법이지…….”
미래를 바라보는 오문도장에게서는 더 이상 절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복수도 하셔야죠.”
으득!
이빨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그래, 그래야지.”
오문도장에게서 지독한 집념이 생겨났다.
살기마저 감도는 독기가 아른거렸다.
좀 과하게 목적의식을 심은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의 오문도장에게는 딱 좋았다.
지독한 원한은 사람을 변질시킬 수도 있지만, 목적을 위한 강한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가 이를 증명했다.
그렇게 완전히 기력을 찾은 오문도장이 외쳤다.
“공동파 제자들은 모여라!”
이미 나와 오문도장 사이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는지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며 공동파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십여 명에 달하는 공동파 제자들 앞에서 오문도장이 맨손으로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이어 피에 물든 손으로 도포자락을 찢어 그 위에 손자국을 만들었다.
누가 지시를 내린 것도 아닌데 공동파 제자들 모두가 피를 내어 도포자락에 손을 올렸다.
피로 얼룩진 도포자락으로 결의를 내보였다.
“맹주께서 공동파의 미래를 열어주겠다니 기껍기 그지없소. 우마(牛馬)처럼 부려주시오. 이 늙은이의 목숨이 필요하다면 초개(草芥)와 같이 내던지리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동자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피가 끓었다.
나 역시 손을 뻗었다.
오문도장이 내민 도포자락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피 묻은 손바닥을 도포자락 위에 올렸다.
“함께하시죠!”
내 행동을 지켜보던 공동파 제자들의 눈가에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 감정을 오롯이 담아 오문도장이 외쳤다.
“공동파는 맹주를 따르겠소!”
나는 그들에게 미래를.
그들은 내게 목숨을.
이 피 묻은 도포자락은 계약의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