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79
378화 할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남기룡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보통 이름을 날리는 무림인들은 어린 시절 재능을 인정받아 뛰어난 고수의 제자로 들어가 기초를 다진다.
그 배움을 기반으로 무공을 쌓아올리고, 훗날 배움이 가득 차올랐음을 느낄 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간다.
허나 남기룡은 기초를 다질 시기에 험한 곳에 나가 실전에서 검을 휘둘렀다.
낭인 무리에서 자란 아이의 숙명이었다.
우연히 습득한 검법과 내공심법이 있었지만,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실전에서 써먹었다간 목숨이 몇 개라도 감당이 안 될 그런 무공이었다.
차라리 동네 삼류 무관에서 기초를 쌓는 것이 나았을 정도로 형편없는 무공이었지만, 당시 남기룡에게는 그마저도 감지덕지했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숱한 실전을 겪으며 셀 수 없이 다듬어나갔다.
검극을 위로 올리는 독특한 기수식인 단천일검은 그렇게 초라하게 시작되었다.
다행히 타고난 재능이 뛰어났고, 운도 따랐기에 남기룡은 수많은 실전에서 살아남아 능히 고수라 불릴만한 무위를 쌓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남기룡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의 손으로 일가를 이뤄낸 자들이 빠지는 전형적인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뭐든지 내가 옳다.
보아라, 나는 이만큼 해내지 않았는가!
편견은 고정관념이 되었고, 아집(我執)이 되었다.
특히나 어려서부터 거친 삶에 내팽개쳐졌기에 여유가 없었고, 예민했다.
관리들을 바라보는 인식 역시 극히 부정적이었다.
어렵고 힘든 자들의 고혈이나 빠는 쓰레기!
그렇기에 연자연과의 만남에서도 남기룡은 편견과 아집으로 대했다.
하지만 어느새 스스로가 얼마나 딱딱한 껍질을 두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남기룡은 스스로를 제약하던 껍질을 벗어던졌고, 얽매임을 버렸다.
동시에 깨우침을 준 평생의 지기이자 유일하게 흠모라는 감정을 가지게 한 연자염을 닮고자 했다.
어투부터 행동까지 모든 것을 따라 했다.
그렇게 중후한 무게가 실리기 시작한 남기룡은 어느덧 무림에서 검왕이라 불리는 무인이 되었다.
연자염의 청에 은거를 깨고 무림에 나선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가장 밑바닥을 겪었던 남기룡이기에 믿기 어려웠다.
연자염에게서 손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기룡은 헛웃음을 지었다.
무공을 배운 지 고작 이 년도 되지 않아 대단한 고수가 되었다는, 저잣거리에서 술안주로나 써먹을 법한 이야기였다.
흠모하는 친우의 말이었으나 실로 믿기 어려웠다.
내심 여느 할아버지들과 다를 바가 없는 팔불출과 같은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직접 본 연자염의 손자는 진실로 대단한 고수였다.
도리어, 연자염이 무림인이 아니었기에 그 실력이 과소평가되었다.
고작 약관의 나이로 단천일검을 깨트린 무인은 지금까지 전무했다.
머리가 희게 변해가는 나이가 아니었다면 추한 질투심을 느꼈을 재능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기룡은 그마저도 힘을 감춘 것임을 알았다.
아니, 지금도 전신전력을 다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것이… 사람이 맞는가?’
흠모하는 친우와 정면으로 마주한 채 본신의 무의를 드러낸 연청운은 남기룡조차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였다.
그저 마주한 것만으로 몸이 통제에서 벗어났다.
볼품없이 다리를 떨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뿌듯함이 느껴지던 연청운의 무위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혹 이대로 저 아이가 엇나간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들었다.
수십 년을 함께하던 애검(愛劍)을 잃은 상황이지만, 목숨을 던져서라도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겠다는 결심에 남기룡은 손날을 세우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허어?”
친우의 행동에 남기룡은 몸을 던질 각오마저 내려놓은 채 입을 떡하니 벌려야만 했다.
***
따악!
나는 잠깐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칼날처럼 벼린 각오를 할아버지 앞에 드러냈다.
비록 할아버지께는 내 의지의 무게가 닿지 않도록 조치했으나 사방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비명을 토하는 광경을 보셨을 것이다.
그런 내 의지에 대한 할아버지의 대답은 딱밤이었다.
“어떠냐? 아프지?”
“……예.”
“오래전 황사(皇師)로 지내며 현 폐하께도 회초리를 들었던 것이 이 할애비니라.”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였다.
올곧음과 엄정함, 그 속에 손자를 향한 마음을 가득 채우신 분.
내 이마를 때린 딱밤이 아픈 건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다른 것이 부딪쳐 온 연유일 것이다.
“무엇이 너를 그리 몰아세웠는지 내 알 수는 없다만, 내가 아는 너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이지.”
“예…….”
“허나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할아버지의 훈계가 가슴을 찔러왔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이 할아비도 잘 알지. 허나 어렵다 하여 시도도 하지 않음은 겁쟁이나 할 짓이 아니더냐. 이 할애비가 네게 그리 어려운 존재였더냐.”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는 내게 큰 이정표였다.
동경하는 사람이 설아 누나였다면, 할아버지는 존중(尊重)과 흠모(欽慕)의 대상이었다.
할아버지의 지적에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두려웠던…… 건가?’
할아버지가, 흠모하는 분이 나를 책망하며 뜻을 꺾으려 할까?
그래서 힘을 내세웠다.
내 마음대로 할아버지의 판단을 예단하고 선수를 치려 했다.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아집을 세웠다.
그저 나에게만 편한 길을 가려 했다.
편한 길이 최선의 길은 아니건만!
이래서야 할아버지의 훈계를 부정할 수 없다.
[쯧! 얼간이 녀석.]내 심경의 변화를 느끼셨는지 천마 사부가 투덜대셨다.
“이 할애비 또한 용린대의 수장으로서 거친 수단을 쓴 일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구나. 이번 이부상서의 일도 그렇고. 하지만 늘 생각하곤 한다. 더 나은 길은 없는가. 그렇기에 당부하고 싶구나. 이 할애비는 네가 좀 더 나은 길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틀린 것이 있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목소리를 높여라.
그러나 그 가운데 최선의 길을 찾아라.
최선의 길을 찾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 하여 부딪침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가슴에 새겨야 할 조언이다.
[어째 저 아해가 더 신선 같냐?] [그럼 우린 뭔데?] [상한 생선?] [상한 생선 맛 좀 볼래?]머릿속에서 잡소리가 들렸지만, 사뿐히 무시했다.
드러냈던 의지를 회수하자 주변을 진동시키던 힘도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폐하께서 실정하신 것이 있다 하였는데, 어떤 것인지 알려줄 수 있겠느냐?”
“예.”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화가 다가와 보따리를 풀었다.
그 서신 중 하나를 확인한 할아버지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구나. 이리 죽어선 안 될 사람들이 제법 있어. 그나마 부패한 이들을 견제하던 청류파마저도 털어내려 하시다니. 아무래도 폐하께선 아예 궁의 모든 관리를 쓸어버리고 뼈대부터 새로이 쌓으려는 생각이신 것 같구나.”
“사실, 오늘 어르신들의 행보를 보고 황제의 명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할아버지는 내 행동을 은연중에 납득하신 것 같다.
그리곤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부상서의 수작질 때문에 북방군이 무너질 뻔했다.”
“예?”
오늘 본 극단적인 선택의 이유인 모양이다.
“병부의 인사에 장난질을 쳤더구나. 보급에도 손을 댔고. 올곧은 이들이 있어 어떻게든 균형을 잡고는 있지만, 이대로라면 사달이 나겠더구나. 현재 궁의 상황으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부상서를 쳐낼 길이 없기에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만… 폐하의 선택은 다른 의미로 나라를 망하게 만들 길이구나.”
할아버지가 나를 이해했듯, 나도 할아버지의 판단을 이해했다.
이부상서의 수작질로 북방군이 무너진다?
그 여파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혹여, 이것도 멸천회주의 노림수인가?’
실제로 북방군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크나큰 피해가 일어난다면 엄청난 과율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멸천회주의 진짜 노림수는 황제가 아니라 북방군인가 싶었을 정도다.
“폐하의 실정으로 천하의 명줄을 미친놈의 손아귀에 넘겨주게 될 수도 있다 했지? 주체가 학이더냐?”
“멸천회라 합니다.”
“고약한 이름이구나.”
멸천(滅天).
하늘을 멸한다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신 건지 할아버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검재.”
“말하시게.”
남기룡 어르신이 대답하셨다.
할아버지가 친우분들 사이에서 무애라 불리듯, 가까운 사람들끼리 칭하는 별칭인 모양이다.
“어떤가? 내 손자, 강하지?”
자랑하듯 말하는 할아버지의 입가에 장난스러움이 어렸다.
이전부터 한 귀로 흘려들었던 이들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네. 여기 모두가 힘을 합쳐도 감당할 수 없겠어.”
“그런가.”
할아버지의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그려졌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내 손자가 저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이가 학… 멸천회에 있는 모양일세. 내 손자가 말한 대상은 분명 한 개인의 존재였으니. 그렇지 않느냐?”
“몇 년 후라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힘들 겁니다.”
“으음…….”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해 학이라 부르던 암중세력.
그 암중세력의 힘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기준점이 드러나자 남기룡 어르신이 침음을 흘리셨다.
남기룡 어르신의 반응을 확인한 할아버지가 말의 방향을 돌렸다.
“들었는가?”
내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쓰러졌던 용린대원들이다.
아직도 몸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는지, 몸을 부들거리는 그들이 나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곤 창백하게 질렸다.
암담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내게 희망을 거는 기색이 엿보였다.
설령 지금 당장은 패배할지라도 언젠가 승리로 이끌어 줄 가능성.
그 시선을 느낀 나는 지금이야말로 뜻을 모을 때란 걸 알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황제의 폭주를 막고 황도를 안정시키는 거다.”
황제처럼 짜증 나니 일단 다 쓸어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방도를 따름을 천명한다.
“겸사겸사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간신들 몇몇을 쳐낼 생각이다.”
간신들을 척결하고 올곧은 자들이 수습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그리고 내가, 우리가 일으킨 문제는 모조리 흑살대에 뒤집어씌운다.”
“흑살대? 뒷수습이 가능하겠소?”
“이름을 이용당했음을 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얼마 전 싹 다 쓸어버렸으니 걱정할 것은 없다. 저기 할아버지 손에 쥐어진 것이 거기에서 찾은 의뢰서다.”
엎어져 있느라 할아버지 손에 들린 게 뭔지 알지 못했던 용린대원들이 헛웃음을 흘렸다.
흑살대가 어떤 조직인지 익히 알고 있기에 그 충격이 더욱 컸다.
“따를 수밖에 없구려.”
“나라를 좀먹는 썩어빠진 놈들의 목을 썰 수 있다면 뭔들 못 하겠소이까.”
빌어먹을 간신들의 목을 쳐낸다는 것이 특히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게 용린대원들이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처음 생각한 대로 일이 진행되진 않았지만, 더 좋은 방향으로 풀렸다.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친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
그런 강박관념이 일부나마 녹아내리며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
북방군 사령부는 늦은 밤까지 불을 꺼트리지 않고 머리를 맞댔다.
“오늘도 공격이 있었나?”
“예.”
“숫자는?”
“어제보다 적었습니다.”
유목민으로 이뤄진 군세와 교전으로 북방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오랜 평화는 군병들에게 경험을 앗아갔고, 과거 북의 군세가 떨쳤던 위명을 뇌리에서 지웠다.
조(趙)의 명장 이목의 고사를 떠올려 성문을 걸어 잠근 뒤에야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적의 군세가 보인 힘은 대단했다.
공성전에 취약하다는 기마병들답지 않게 맨손으로 성벽을 타올랐다.
내공을 익힌 무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불같은 기세도 잦아들었다.
“보급이 끊긴 것이 치명적이었나 보군.”
연자염과 그를 따르는 고수들이 후방을 뒤집어놓으며 만든 결과였다.
“놈들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지?”
“말은 홀쭉했고, 놈들도 잔뜩 굶주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랬겠지. 이 시기에 식량을 구할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테니까.”
군마들이야 건초가 없으면 풀이라도 뜯어 먹을 수 있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하물며 지금은 겨울이 막 지난 시기다.
“머릿수가 줄고 있다면 이미 사분오열 수준까지 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이 초전의 굴욕을 갚아줄 절호의 기회다! 이번에 놈들의 맥을 완전히 끊어놔야 북방이 평안해질 터!”
북방군 사령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열의 어린 목소리에는 깊은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 모인 이들은 잘 알고 있다.
북방의 평화를 내세우지만 사실 군공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여기 모여 있는 대부분이 이부상서의 손길이 닿은 이들이다.
군공을 세우고 위세를 드높여라!
병부의 명성과 영향력을 키우고 돌아와라!
그럼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전쟁이 흐지부지 끝나버리면 말짱 꽝이다.
이 전쟁에서 누가 일등공신인지는 명명백백(明明白白)했기 때문이다.
북방군 내부에 연자염과 손을 맞추고 있는 이들이 상당했기에 그들의 군공을 축소하거나 감출 수도 없었다.
“한참 성문을 두드리다 소득 없이 돌아갔으니 제법 힘이 빠져있을 터. 굶주려 제힘을 내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어 있는 놈들의 뒤를 쳐 몰살시킨다!”
적의 상황이 그토록 형편없다면 겁날 것이 없다.
이미 군공과 부귀영화가 손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다만 조심성이 있는 일부가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연자염을 따르는 것들은 성문을 굳게 지키자고 할 터인데…….”
연자염을 따르는 무리 중에는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 제법 있었다.
특히 하북팽가를 비롯한 고강한 무공을 갖춘 무인들은 사령관일지라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괘념치 않았다.
“북방군 사령관은 나다! 내 결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내가 군세를 몰고 나가면 제 놈들이 안 따라올까!”
대의에 목숨을 거는 얼간이들이기 때문이다.
오판이라 여겨도 북방군이 위기에 처할 상황이라 판단하면 싫어도 몸을 던져 막을 미련한 놈들이다.
“출진이다!”
북방군 사령관은 히죽 웃으며 출진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