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42
41화 그래도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적혈랑을 비롯한 무뢰배들은 목적이 목적이었던지라 약탈은 없었지만, 파손된 것은 제법 있었다.
화산파 제자들이 나서자 마을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구파제자들은 전반적으로 손재주가 좋다. 기본적으로 속세를 등지고 살아가다 보니 자급자족이 반쯤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다친 상처를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한적한 곳에 방치(?)되었다.
겉보기와 달리 괜찮다고 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뭐, 덕분에 사부님들과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일일지도.
“죄송합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별게 다 죄송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더 많이 기다리게 했지.]퉁명스럽게 말씀하시는 장삼풍 사부와 배려 있게 말씀하시는 달마 사부.
방식은 다르지만 두 분 다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응? 그런데 두 분뿐?
“어, 천마 사부는요?”
[그 양반이라면 지금 업무 중이란다.]“아하, 예.”
바쁘시구나. 지옥에서 죄인들 튀길 똥 푸시느라.
비꼰 거 아니다?
진짜 하는 일이 그거라니까?
천마 사부가 계실 땐 이런 쪽으로 가급적 질문 자체를 하지 않는 쪽으로 가야겠다. 이거 실수로라도 입 밖에 내면 대형 사고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그쪽이야 늘 바쁘지. 어쩔 땐 우리도 차출되어 나가니까.]“아…… 옙!”
방금 실수로 장삼풍 사부랑 달마 사부도 똥 푸는지 물을 뻔했다.
역시 이 주제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뭐, 그래도 이후 이렇게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는 일은 없을 게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 없이 지내긴 했지.] [이번에 며칠 자리를 비운 것도 그것을 좀 체계화시킬 필요가 있던 탓이란다.]“아하.”
결론은 앞으로 좀 더 체계적으로 돌아가며 나를 돌봐주신다는 것이다.
내게는 좋은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그렇게 된다면 세 분이 모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은근히 고대했던 일인데.
그도 그럴 것이, 역대 무림의 전설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분들이다.
다른 수식어도 필요 없다.
장삼풍 사부, 달마 사부, 천마 사부. 그저 한꺼번에 언급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 같으니 나중에 기회를 보면 되려나?
그런 가운데 장삼풍 사부가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어 오셨다.
[그래, 잠깐 자리를 비운 며칠 사이 일들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거나 좀 이야기해 보자.]내가 무슨 일로 사람들 사이에서 저런 칭송을 받고 있었는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천마무겁수를 펼칠 때 궁금했던 점이 하나 있었다.
과연 내가 일면식 하나 없던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면 사부님들은 뭐라 하실까?
칭찬해 주실까, 아니면 목숨을 아끼라고 야단치실까?
“백무호랑 화산 지척에 도착할 즘에 정만족이라는 화산파 제자를 만났는데,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화산파가 지금 공격당하는 중이라고. 그런데 화성촌이란 곳에서 연기가…….”
나는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앳된 모험담을 늘어놓는 기분으로, 굳이 쓸데없는 이야기들과 감상까지 섞어 가며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작은 무용담이었다.
“……천마무겁수를 써야 했어요. 목숨을 걸고. 달마 사부가 쓰던 보패가 부서질 줄은 몰랐지만, 이것도 부서졌고요.”
물론 동화처럼 밝기만 한 무용담은 아니었다.
[천마무겁수라…….] [흐음.]왠지 목소리에서 떨떠름해 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실제로 장삼풍 사부의 경우 내가 그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직접 보셨다. 당연히 얼마나 위험한지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역시 꾸중을 하는 쪽이려나?
[납득은 했고?]“납득이요?”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꾸중은 아니지만, 칭찬도 아니다.
나의 말을 듣고자 하신다.
[일면식 하나 없던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일. 세상에 몇 없을 귀한 보물을 잃은 것. 그것들을 납득했냐는 거야.]납득했느냐.
이게 후회하지 않느냐는 물음이라면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내가 하고자 한 일을 관철한 결과를 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길을 보고 감사를 표해 왔을 때.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납득했습니다.”
[그럼 됐다.]“정말요?”
[그거면 됐지. 그럼 뭐? 극성인 팔불출마냥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고 그럴 줄 알았냐?]“어… 네니요?”
[이놈 보게.]장삼풍 사부가 바로 코앞에 있었을 때의 표정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하하…….”
한동안 백무호랑 단둘이만 어울리다 보니 감이 좀 떨어진 것 같다.
이거, 웃는 거로 어떻게 못 얼버무리려나?
내가 그렇게 슬슬 눈치를 살피는데 달마 사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람은 누구든 언젠가는 죽는다. 언젠가 너 역시도 그 생이 끝나는 날이 있을 게다. 결국,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빠르든 늦든 사람이 죽을 때 그 죽음은 결국 둘 중 하나란다. 납득할 수 있는 죽음이냐,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냐.]“납득…….”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사후세계가 있는가?
사람은 그 사후의 세계에서 어떻게 되는가?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생각들을 낳는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알 수 없는 미지.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사부님들은 그 과정을 초월하셨다.
즉, 사부님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그렇기에 관점이 다르다.
정말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피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정진하여 깨달음을 갈구하는 자들이 잊어선 안 되는 말.
역시 사부님들이라고 할까.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불분명한 생각의 경계에 확실한 선이 생긴다.
그런 내게 달마 사부는 조금 전 장삼풍 사부가 했던 물음을 다시 던지셨다.
[납득하느냐?]같지만 닿아오는 느낌은 달랐다.
같은 질문이더라도 아이와 어른이 받아들이는 생각의 양이 다르듯.
“예.”
[그럼 굳이 네 길을 우리에게 확인받으려 할 것 없단다. 스승은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지, 네 대신 걸어주는 존재가 아니니라.]달마 사부의 말은 좀 더 부드러웠다.
하지만 두 분이 하는 말의 요지는 같았다.
[그래도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그렇게 안도하는 순간 뒤이어진 달마 사부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하고자 한 일을 관철한 결과를 보았을 때의 만족감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길을 보고 감사를 표해 왔을 때의 성취감에도.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없는 뿌듯함.
[잘했다.]사부님에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흠! 그런 일들이 있었단 말이지? 확실히 점혈도 가르칠 때가 되었지.]다음 강의는 점혈법이 될 것 같다.
[뭐 달리 필요한 건 없고?]안 그래도 한 가지 더 배우고 싶은 게 있었다.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법이요.”
[간단하네. 제운종(梯雲縱).]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장삼풍 사부와 달마 사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당과 소림의 절기를 꺼내셨다.
[금강부동신법은 거의 보법에 가깝지 않나? 신법 수준으로 구사하기는 어려울 텐데? 게다가 특징이 명확해서 언제 어디서 배웠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리 따지자면 제운종도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네만?]의견 불일치로 두 분이 잠시 투덕거리기 시작하셨다.
이윽고 잠시 말이 없으셨다. 의견 정리 중이신가?
[제운종. 사다리 구름을 늘어놓고 거닌다는 뜻이니까, 금강부동이라는 말과 섞으면…… 대충 능운금광보(凌雲金光步)라고 지을까?] [이름이야 뭐든 어떻겠는가. 알맹이가 중요하지.] [그럼 이걸로 가자고.]저기요? 뭔가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태연하게 오갔던 것 같은 느낌이?
[네가 배울 무공은 능운금광보다. 알겠냐?]“……옙!”
그 잠깐 사이에 무당과 소림의 절학을 섞어 버리셨다고?
“하하.”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스르륵 흘려버렸다.
그래, 이 느낌.
좀 그리웠어.
이제야 확실히 사부님들이 돌아와 계신다는 것이 실감 났다.
***
다음 날.
화산파로 향하는 나와 백무호가 화산파의 본산제자들과 화성촌을 떠날 즘 마을 사람들이 대거 몰려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감사했습니다, 연청운 소협!”
“무운을 빕니다!”
“언제 한번 다시 들려주세요!”
“잘 가, 형아!”
그런 마을 사람들 가장 앞에서 청우를 닮은 어린 소년이 가장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동시에 조금 무안하기도 했다.
“이거, 저만 고생한 게 아닌데…….”
“하하! 자네는 저만한 칭송을 들을 자격이 있네. 과례는 실례라 했으이.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는 일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장부가 행할 일이 아니야. 떳떳하게 가슴 펴고 받아들여야 저들도 기뻐할 걸세.”
어제 나를 좋게 보았던 화산파의 노도인이 웃으며 그리 말했다.
과례는 실례라.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중을 나온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깐의 환호성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다.
그런데.
“저놈은 저기서 뭐 하냐?”
그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백무호가 뒤늦게 빠져나와 이쪽으로 달려왔다.
뭔가 마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 같았는데?
“뭐 하냐?”
내 물음에 백무호가 잠깐 이맛살을 찌푸리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안전장치?”
“……뭔 소리여?”
이게 무슨 동문서답인지.
“목 졸리기는 싫어서 말이야.”
백무호는 진지했다.
***
연청운의 아버지 연경응은 간만에 찾아온 백가표국의 국주 백진성을 반갑게 맞았다.
“이거 혼자 마시기가 적적해서.”
“하하! 이거 참. 낮부터 술이라.”
사실 백진성의 방문도 방문이지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약주도 무척 반가웠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 틀림없이 바가지를 긁힐 거다. 안 그래도 무림을 떠돌고 있는 자식 놈 때문에 마눌님의 신경이 무척이나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진성이 온 이상 당장은 묵인될 것이다.
연경응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근래 참하게 자란 백진성의 여식 백설아를 은근히 며느릿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한잔만 할까요?”
“예, 딱 한 잔만.”
백진성이 돌아가고 나면 분명 바가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연경응은 백진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 남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다.
그렇게 남자 둘이서 화기애애한 자리를 만들고 있는데.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연경응은 묘하게 백진성이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 사이에 목덜미를 대여섯 번이나 쓰다듬는 것이 누가 봐도 이상해 보였다.
“아, 하하. 별거 아닙니다. 그냥 아이들이 걱정되기도 해서.”
“아하.”
가볍게 말하는 것 같지만 연경응은 백진성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확실히 낮부터 술을 들고 찾아온 것만 해도 평소 알고 있던 백진성과 달랐다.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거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충분히 이해한 연경응이 가볍게 받아넘겼다.
‘백 국주 안주인께서도 바가지 꽤나 긁으시는가 보군. 하긴, 금쪽같은 아들이 험한 무림으로 훌쩍 떠났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본 지아비를 원망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저 양가 아이들 모두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요.”
백진성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정말 그래야지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번 목을 쓰다듬으며 답하는 백진성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