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75
74화 방도를 찾다
처음 봤을 때는 잘못 본 것인가 했다. 하도 고민하다 헛것이라도 보고 있나 싶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정말 사천에 올 때 인연을 맺었던 청성파 후기지수 세 사람인 이도천, 이청려, 사공패였다.
그리고 과거 인연이 있었는지 먼저 취죽 선생에게 인사를 하겠다며 관청으로 들어간 노인은 무려 청성파 장로 청풍자라고 했다.
정파든 사파든, 무림문파 입장에서는 무림인들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는 관리의 존재는 귀했기에 어지간하면 척을 지려 하지 않는단다.
취죽 선생이야 할아버지와 비슷한 성향이니만큼 무림 인사들과 친분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가 사파 영역이라는 점이다.
‘아니, 사천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도 지금 여기 있는 게 불안한 마당에 청성파 장로씩이나 되는 양반이 여길 왜 와?’
청풍자 장로의 신분을 들었을 땐 정말 생각지도 못한 거물의 등장에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내 속이.
정사대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억눌러야 할까 고민하던 상황이었기에 누군가 나를 엿 먹이기 위한 고도의 술책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깔 수는 없었기에 돌려서 까기로 했다.
“오는데 겁나지 않았어요?”
“뭐, 처음엔? 하지만 용기를 내봤어. 그도 그럴 것이, 청운 소협도 온 곳이잖아? 잘 감추고 움직이면 못 올 거 없다고 생각했지.”
“…….”
아무래도 내가 판 무덤 같다.
뭘까, 이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은. 용기의 원천이 나라고 하니까 뭔가 실수한 기분이 드는데.
“사실 오면서 놀랐어. 사파의 영역이어서 엉망진창일 거라 상상했었거든. 악의 소굴 같은 곳 말이야. 약육강식의 법칙이 태연하게 적용되는 그런 곳. 하지만 직접 와 보니 알겠더라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
왠지 얼마 전보다 어른이 된 것 같은 눈빛으로 이청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그런 곳이 없진 않을 겁니다.”
“알아. 사파가 무조건 나쁘지만 않다는 걸 알았다는 거지, 본래 알고 있던 나쁜 점을 잊었다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 놀랐다는 거야. 생각보다 내 상식이 편협하게 쏠려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이청려는 정말 한 단계 성장한 것이 맞았다.
시야가 트이고 사고가 넓어진 것이 보였다.
이도천 역시 여동생의 성장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다.
‘응?’
그런 와중에 문뜩 뭔가 간질거리는 게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얻었다는 걸 느꼈는데, 의식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느낌.
방금 이청려와의 대화에서 그런 걸 느낄 부분이 있었나?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겠습니다.”
뭔가 놓친 것 같은 기분에 기억을 더듬는 와중, 이도천이 예의와 상식이 충만한 인사를 해 왔다.
다행히 이쪽이랑은 여전히 말이 통할 것 같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거겠죠.”
“맞습니다. 그러니 이런 파격을 행했지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당가의 가주께서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는 중이라 합니다.”
독과 암기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사천당가. 그 당가의 가주가 중독으로 사경을 헤맨다?
내 귀에는 잉어가 배 까뒤집고 웃다가 익사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예? 정말로?”
“극비인지라 외부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해독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벌이라도 해야겠다며 본문에 대라신단을 요청하기까지 한 상황입니다.”
“어우야…….”
공개적으로 드러나면 당가의 역사에 남을 수치로 기억될 만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니 당가가 얼마나 다급한지 느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정도로 외부와 차단하고 있는 중이라면, 당가의 반응이나 대응이 굼뜰 수밖에 없었겠는데?’
독에 관해선 천하제일을 논하는 당가다. 당연히 근래 사천에 대대적으로 퍼지고 있는 독의 존재를 알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상황이 방치된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이야기가 맞아떨어져. 그럼 이것도 마교 짓인가?’
화산파 내에 마교의 간자로 심겨 있었던 상우경의 경우를 보면 마교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넓고 치밀했다.
아무리 마교라지만 이게 정말 ‘단일 세력에서 가능한 행사’인가 싶을 정도다.
‘정말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면 독에 정통한 당가 가주라도 한 방 먹일 수 있는 비장의 수단이 마련되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해서 찾아오게 됐습니다. 화타의 진전을 이은 소협에게 말이지요.”
“아…….”
확실히 직접 찾아올 만한 이유다.
‘나를 위해서였구나.’
할아버지가 굳이 내 손을 빌려 취죽 선생에게 서신을 전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제삼자를 통할 경우 쉽고 간단하지만, 정보가 어떻게 새어 버릴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경우 그 문제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것은 나다. 내 위치와 정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다. 그렇게 되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다.
“이거 얼굴이 뜨거워지는데요.”
“하하. 별말씀을. 여기 고현에 떠도는 소문을 들어보면 딱 맞는 분을 찾아온 듯싶습니다만. 급한 일이 없으시다면 함께 가도록 하시지요. 당가는 예로부터 원한을 품은 이에게 손속이 독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그 못지않게 받은 은혜를 후하게 갚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당가 가주님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분명 소협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겁니다.”
“당가라…….”
‘어?’
뭐랄까, 이청려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감각이 이번에 다시 한번 느껴졌다.
무의식이 나더러 ‘눈치 좀 채라, 빡대가리야.’라고 욕을 날리고 있는 듯한 감각.
“아!”
그리고 떠올렸다.
정사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천의 전쟁을 막을 방법.
“니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뭔가 굉장히 피곤한 일이 일어났었는데…….”
옆에서 나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백무호가 투덜거렸지만, 사뿐하게 씹어 버렸다.
나는 곧장 취죽 선생과 청성파 장로 청풍자가 있는 관청의 거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혹시 선생님은 흑애무천의 고위 인사와도 인맥이 있으십니까?”
청풍자와 대면하고 있던 취죽 선생은 갑자기 들어와 다짜고짜 물은 내 말에 약간 당황한 모습이었다.
반면 청풍자는 조금 묘한 눈길로 나를 보더니, 꽤나 흥미진진해 하는 것 같았고.
청성파 장로 앞에서 말하기는 좀 껄끄러운 내용인지라 잠시 고민하던 취죽 선생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고 한다면?”
“사천에서 일어날 전쟁을 막을 방도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응할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봐 주십시오.”
여간해선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나 보다. 내 말을 들은 취죽 선생이 눈을 번뜩였다.
“방법이…… 있다? 말해 보거라.”
“정파와 사파가 휴전을 맺은 이후에도 자잘한 분쟁은 쭉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휴전은 파기되지 않았지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연유들이 엮여 있지만 주된 이유는 역시 정파나 사파, 양측 모두에 전쟁은 이득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란 한 세력의 의지를 다른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행위다.
개인 대 개인 간에 벌어지면 싸움이지만, 세가 커지면 전쟁이 된다.
정파와 사파 사이에 휴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양쪽 모두 싸움의 규모를 어느 선 이상으로 넘기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청려와의 대화에서 무의식 중 느꼈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사파의 수뇌부들도 상식이 있고, 이해득실을 따질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거지.’
나조차도 편견이 있었다. 사파라면 좀 더 폭력적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편견.
사파의 논리는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인 것이지, 그들 자체가 무지하다는 소리가 아니다.
“당금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주된 요인 중 하나는 더 이상 정파에 인내심을 기대하기 어려워진 점이 큽니다.”
정파 내부에서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기류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청성파에서도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파가 불을 지르면 극단적인 상황, 즉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헌데?”
“사천당가를 설득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천당가는 사천에 있는 정파의 세 기둥 중 하나. 그들의 결정은 큰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즉, 사파가 불을 질렀을 때, 사천당가의 의견은 정파에서 다시 한번 인내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죠. 여기 계신 청성파 장로님께서 힘을 써주신다면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고요.”
사천당가와 청성파. 두 곳이 나서서 분위기를 누른다면, 한 번 정도는 전쟁으로 이어질 상황을 무마할 수 있다.
“미봉책이다. 사파가 멈추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눈길을 돌려야지요. 진범을 내세우면 됩니다.”
“진범?”
“마교 말입니다.”
마교를 언급한 나는 일단 고현에서 있었던 일들을 풀었다.
마교의 상황이 개판이라는 건 천마 사부가 알려 준 것이니 말할 수 없지만, 고현에서 파악하고 겪었던 일로도 충분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기존에도 마교를 이용할 생각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한 일을 덮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지금은 아예 판을 크게 키워 버리자는 거다. 단기간에 사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어차피 다 그 새끼들이 시작한 짓이잖아?’
그러니 거리낄 것도 없다.
정파에는 좀 더 인내심을 요구한다.
사파에는 그 칼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을 지를 주전론자, 강경론자들은 여전히 날뛰겠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솎아내면 된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자잘한 싸움, 소규모 분쟁으로 취급한다.
“결국, 전쟁은 사람 사이의 일. 정치의 연장입니다. 필요에 의해 시작하며, 필요에 의해 막을 내립니다.”
윗선에서 입을 맞출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럼 전쟁은 없습니다. 그저 싸움이 있을 뿐이죠. 지금까지 늘, 흔하게 있어 왔던.”
고민이 깊었던 만큼 머릿속에 쌓여만 있던 말들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내 말이 끝나자 취죽 선생과 청풍자, 세월과 경험이 깊은 두 노인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취죽 선생이었다.
“논리에 비약이 크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면만 부각시켰구나. 네가 간단하게 말하고 지나친 부분에서 얼마나 무질서해질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간다.”
취죽 선생의 판단은 부정적이었다.
“허나 지금으로서는 최선이겠군.”
동시에 다른 방도가 없음을 인정하셨다.
들었다 놨다 하시네, 이분.
반면.
짝! 짝! 짝!
청풍자 장로는 내 말에서 허실을 찾지 않았다. 그저 긍정적인 부분만 보고 있는 느낌이다.
단순한 반응이지만 저렇게만 받아주는 사람들이 많다면 내 생각도 제법 통하지 않을까 싶다.
“좋구먼. 다 늙어서 주책이랄 수도 있겠네만, 듣고 있자니 피가 끓는 기분일세. 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쟁을 막는다. 허헛! 좋구나! 좋아!”
볼을 발갛게 물들인 모습이 흡사 이팔청춘으로 돌아간 듯한 표정이다.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온몸으로 풍기는 기색은 그러했다.
“청성은 내 책임지고 설득하겠네. 암! 반드시 해내고말고!”
피가 뜨거워진 사람의 열기가 있었다.
하지만 청풍자는 한 가지를 분명히 짚었다.
“허나, 이는 자네가 당가 가주를 치료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네. 할 수 있겠나? 천하의 사천당가조차 애를 먹고 있는 독의 해독을?”
청성파만으로 사천 정파를 진정시킬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청성파 내부에도 강경한 주전론자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컸다. 사천당가에서 나서 줘야만 강경론자들을 잠재울 수 있다.
청풍자 장로의 말대로 이 모든 전제는 내가 당가 가주를 치료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자신 있게 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화타 선생이 있다는 건, 편작 선생도 있을 거란 소리잖아? 화타 선생만으로 부족하면 편작 선생한테까지 도움을 청하면 되겠지. 그 두 전설이라면 저승 문턱을 넘었어도 꺼내 오실걸.’
과신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만에 하나 따위를 고려하기에는 내 뒤를 봐주시는 분들이 지나치게 위대했다.
***
모종의 거처.
음산한 어둠이 깔려 있는 자리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오간다.
“청풍자가 고현, 사파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이 시국에?”
“고현에 신의가 났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당가 가주를 생각해서 움직인 것이겠지요.”
“하긴, 옛날부터 피가 뜨거운 놈이긴 했지.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그 피가 남아있는 모양이군.”
“그리고 우리에겐 좋은 기회이지요.”
어둠 속에서 말을 늘어놓는 자가 히죽 웃었다.
일을 꾸미는 모사의 웃음.
그 웃음은 주변의 어둠과 잘 어울렸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나를 찾아왔다는 건, 직접 움직이겠다는 소리인가?”
“사파 놈들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자칫 저희가 드러날 염려가 큽니다. 게다가 어차피 사파 영역. 직접 손을 쓰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군. 사파의 영역에서 청풍자가 죽으면…….”
“정파에선 사파를 추궁할 겁니다. 하지만 사파에선 부인하겠지요. 정말 그들이 저지른 짓이 아니니까요. 허나 의심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강한 부정은 오히려 강한 긍정으로 들리는 법입니다. 그러면 반발하는 사파는 근래 자신들의 영역에 퍼지고 있는 독에 관한 이야기를 들고나올 것이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겠지.”
“예. 그럼 저희 행적은 그대로 묻힐 겁니다.”
“좋군.”
그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그려졌다.
어둠에 녹아드는 웃음이 서로 닮아간다.
“물론, 이 모든 건 청풍자를 죽일 수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러는 사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 나왔다.
그럼에도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받아넘겼다.
“청풍자라면 쉬운 놈은 아니지.”
사내는 청풍자를 무시하지 않았다.
“허나 본좌라면 꺾을 수 있다.”
그저 스스로의 강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뿐.
본인이 청풍자의 위에 있음을 말하는 그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우르르릉!
그저 기운을 드러낸 것만으로 주변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며 울었다.
신뢰할 수밖에 없는 힘을 드러내는 그의 위용을 보며 일을 꾸민 모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위대한 마(魔)를 위하여.”